*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2) 길선주 목사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우리나라 장로교 최초의 7인 가운데 한 사람이자 3.1운동 민족 대표 33인 중 한 사람이었던 길선주 목사는 25세 때까지 선도(仙道)를 배웠으나 1896년 28살의 나이에 회심을 하였습니다. 길 목사님은 19세에 병을 고치려 용악산에 입산한 뒤 ‘관성교’에 입교하여 주문을 외우며 살다가 마펫 선교사가 건네준 기독교 서적을 읽고 “예수가 참 구주인지 알려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방안에 옥피리 소리가 가득하더니 곧이어 천지를 진동할 만큼 요란한 총소리 같은 것이 울려 퍼지더니 공중에서 ‘길선주야 길선주야 길선주야’ 하고 세 번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때 마음의 문이 열리면서 방성대곡의 울음이 터졌다고 합니다. 이후 길 목사님은 한국 기독교 사상 최초로 가장 큰 영향력을 가진 목회자요 부흥사로 1910년에는 1백만 구령운동을 전개하며 60여 개의 교회를 설립했습니다. 특히 교회당 안의 남녀를 구분하는 휘장을 최초로 없애버린 인물입니다. 1912년에는 105인 사건에 휘말려 장남의 목숨을 잃는 슬픔도 당했습니다. 길 목사님은 교육사업에도 투자하여 숭실학교를 설립했으며, 3.1운동에 관여한 죄목으로 옥고를 치루기도 했습니다. 이후 길 목사님은 전국을 순회하며 부흥집회를 인도하다가 1935년 평남 고창교회에서 축도를 하고 난 다음 숨을 거둔 일화로 유명합니다.

역사상에서 어거스틴과 길선주 목사님 외에도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듭난 과정을 겪었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이 과정을 거쳤기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은 자신이 거듭난 때에 대한 영적인 체험들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영적 체험이 기적이나 신기한 일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대부분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어떤 말씀이 계기가 됩니다.

저 같은 경우는 뚜렷이 기억나는 것은 호세아 6장 3절과 6절, 그리고 이사야서 43장 1~3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듣고 저는 저를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쌓는 일을 즐겁게 생각하고 살고 있습니다. 더불어 저는 하나님이 언제 어디서든,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저를 부르신 이후 지금까지 안전하게 지켜 주셨음을 믿습니다.

2. 세속적인 그리스도인들

그런데 우리 시대에는 거듭남의 의미가 상당히 왜곡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많은 광고들에서 새롭게 변신한 기업이나 상품들을 두고 자신들이 거듭났다고 표현합니다. 어떤 정당도 이름만 갈아치우면서 거듭난 것처럼 국민에게 홍보합니다. 한 연예인이 도박 사건에 연루되어 방송계를 떠났다가 세월이 좀 흐른 뒤에 슬그머니 방송에 출연하면서 자신이 거듭났다고 고백합니다.

이런 일은 기독교회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재 많은 교인들이 거듭남을 가벼이 여기고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미국에 기독교 여론조사기관인 ‘바나그룹’이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거듭난 복음주의자’로 자칭하는 1,200명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가 우리를 놀라게 합니다.

이들 중 겨우 9%만 십일조를 하고, 10대 가운데 80%가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고, 이중 26%는 단순히 육체적 쾌락의 차원에서 여러 명과 혼전 성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미국과 서구에서 폭넓게 정의하는 복음주의 교회는 전체적으로 세상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뜻입니다. 1980년부터 미국 베들레헴침례교회에서 담임목사를 하고 현재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 겸 신학자로 칭송받는 존 파이퍼는 이러한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이렇게 촌평합니다.

“복음주의자들은 주일에 교회에 감으로써 종교로 겉 포장을 합니다. 그러나 이 종교는 변화를 일으키는 능력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세상과 동일한 방식의 삶에 추가된 부가물일 뿐입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닌다 하면서 세상과 구별되지 않는 모습으로 삶을 살며, 세상과 다름없이 죄를 지으며, 세상만큼 불의한 일을 버젓이 행하고, 세상만큼 물질을 탐하고, 세상처럼 이 땅에서 부귀와 영화를 누리려 하고 조금도 자기의 것을 축내지 않으려 하며, 남의 것을 더 가지려 하며, 세상만큼 이웃을 위해 희생하지 않으려 하며, 세상과 같이 오락을 즐기고 거짓말을 하고 약속을 어기고 게으르고 방탕하며 하나님을 무시하고 양심에 가책도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이 거듭났으며 천국에 간다고 믿고 있으며, 그럴듯하게 자신의 신앙을 포장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저는 저 자신을 예수님께 드리기로 결심했습니다.”
“저는 예수님께 저의 죄를 고백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다.”
“저는 확실하게 천국에 가리라고 믿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성경은 이런 것을 두고 거듭났다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사람이 거듭나면 완전히 바뀐다는 절대적 확신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므로 입술로만 자신의 거듭남을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실상은 완전히 변화되지 못했음을 깨닫습니다. 거듭났다는 것은 신앙의 행위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다음의 신약성경 중 요한일서의 구절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요일 2:2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3:9)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4:7)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5:18)

이 말씀들이 가리키는 바가 무엇입니까? 거듭났다는 것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며 죄 된 삶과 단절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을 단순히 새롭게 된 어떤 것을 염두하거나 그저 수명을 연장받았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거듭남이란 용어는 성경에서 아주 귀하고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거듭남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합니다. 성경은 거듭남에 관해 많이 말합니다. 그럼에도 거듭남은 신비합니다. 그것이 신비한 이유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고전 13:12)하게 볼 때 모두를 이해할 수 없고 이해한다 해도 그게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거듭남을 인간의 언어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것은 그 일이 오로지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거듭남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25)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거듭납니다. 거듭나기 전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인 줄 모르다가 하나님의 말씀이 심령에 박히면 드디어 영안이 열리고 마음의 문이 열려 하나님이 나를 낳으신 영원한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고 믿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로부터 이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거듭나기 전까지는 밥만 먹고 사는 육신적 생명 안에 갇힌, 죽음을 기다리는 유한한 삶이었지만, 거듭난 후엔 영원한 생명(조에)이 주어졌고 언제나 이 영적 생명은 이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양식을 먹어야 영적 건강을 유지하고 누리며 살도록 된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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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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