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잠정적 윤리가 아닌 항구적 윤리

김영한 박사
김영한 박사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예수가 산상설교에서 가르친 윤리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전까지 신자들이 행할 잠정적인 삶의 규범을 가르쳤다고 본다. 이들은 예수가 가르친 윤리는 하나님 나라의 항구적 윤리가 아니라 중간시기의 윤리였다고 본다. 이 윤리는 이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신자들이 잠정적으로 행해야할 삶의 지침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윤리는 영구적으로 타당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말이 오기 전 까지 한시적으로 통용되는 일시적인 타당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윤리를 잠정(暫定) 윤리(an interim ethics)라고 칭한다. 잠정 윤리는 임박한 하나님 나라에 초점을 맞춘 ‘철저한 종말론’에 입각한 중간기의 윤리이다. 산상설교의 윤리란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는 짧은 현세에서 지켜나가야 할 임시적 윤리라는 것이다. 세상 종말을 기대하는 자들을 위한 일종의 비상조치 윤리다. 여기서 윤리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시적이고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이다.

슈바이처는 다가오는 미래적 하나님 나라를 묵시록적으로 이해했으나 그것은 실재적으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라기보다는 후기 유대교의 묵시록에 영향을 받은 신화론적 나라라고 보았다. 실제로는 역사의 종말이 없고, 도래하지 않는 종말에 앞서 예수가 짧은 막간(brief interval)에서 실천을 제시하는 중간기 윤리는 어느 누구도 진지하게 실천할 필요가 없는 윤리라는 것이다. 슈바이처는 이러한 신화론적 나라를 선포한 역사적 예수는 그가 살았던 시대와는 전혀 동떨어진 “고상한 망상(妄想)”(a noble delusion)에 사로 잡힌 자라고 보았다. 슈바이처가 신약성경 연구에서 발견한 역사적 예수는 슈바이처 자신이 살았던 19세기의 계몽주의적 세계관과는 전혀 생소한 신화론적 세계상에 갇힌 자였다.

그러나 이 윤리적 주제에 대한 슈바이처 입장의 역설이 있다. 신약 신학자로서 슈바이처는 중간기 윤리가 종말론적 망상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했다. 그런데 의료 선교사로서 슈바이처는 신학, 의학, 음악에 있어서 문명사회에서 직업적 출세의 전망을 포기하고 서아프리카의 렘바르네에 가서 흑인들에게 봉사하는 헌신적인 삶을 살았다. 그 동기는 그가 해석한 중간기 윤리였다고 말할 수 있다. 슈바이처는 신학적으로 종말론적 환상(幻想)에 불과하다고 여긴 예수의 윤리를 선교사로서는 실천했던 것이다. 여기에 슈바이처 삶의 역설이 있다.

그러나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산상설교의 윤리는 이 세상에서는 지킬 수 없고 천국에서만 지킬 수 있는 윤리이다. 이것은 슈바이처가 해석하는 바 세상 끝날이 오기 전까지 임시적으로 지키는 "중간기의 윤리" 내지 “잠정 윤리”(interim ethics)가 아니다. 복음서에 의하면 예수가 가르친 것은 중간기의 임시적 윤리가 아닌 하나님 나라의 윤리요 그것은 항구적인 사랑의 윤리이다. 슈바이처가 예수께서 전파하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환상(幻想, illusion)으로 본 것은 복음서를 전혀 성경적 세계상이 아닌 현대의 실증주의(實證主義)적 세계관에서 해석했기 때문이다. 슈바이처는 예수가 행한 종말에 관한 설교란 “철저적 종말론”(consistent eschatology)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예수의 세계관이 이 세상을 멸망할 도성처럼 보는 후기 유대교의 묵시록적 세계관에 포로되었다고 보았다. 이러한 슈바이처의 해석은 역사적 예수에 대한 바른 이해가 아니다. 이것은 예수 선포의 비종말론화요, 예수 선포의 비신화론적 해석으로서 사복음서가 한결같이 증언해주는 실제적으로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윤리를 가르치고 살았던 지상적(地上的) 예수의 설교와 윤리를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의 윤리는 하나님 나라 시민의 헌장으로서 오늘날에도 타당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IV. 종말론적 윤리

저자의 견해에 의하면 사복음서가 전해주는 역사적 예수는 신화가 아닌 구속사적 세상 이해 속에서 살았고 역사 속에서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선포했다. 이 윤리는 예수의 산상설교에서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산상설교의 윤리는 그의 인격 안에 이미 다가온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종말론적 윤리(eschatological ethics)이다. 이러한 윤리는 인간의 능력으로는 지킬 수 없다. 그렇다고 이 윤리가 전혀 이 세상에서 실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지킬 수 있다. 산상설교의 윤리는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는 특별한 경우에는 역사 속에서 실현되기도 한다.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에게 특별한 사랑의 은혜가 주어질 때 종말론적 윤리는 가능하다. 한국교회 안에서 우리는 손양원 목사의 경우 이러한 원수 사랑의 계명이 실천된 것을 볼 수 있다. 여수반란 사태 시 손 목사의 두 아들이 공산당 청년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살해범이 경찰에 붙들여 처형당하게 되었을 때에 손 목사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그의 석방을 탄원하고 석방된 청년을 자기 수양 아들로 삼는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원자탄”이라는 손양원 목사가 실천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교회사적으로는 중세의 성 프랜시스, 19세기 나병환자의 목자 성 다미엔, 현대에 와서는 테레사 수녀 등이 이러한 사랑의 윤리를 실천한 신자들이다. 역사과정에 있어서 산상 설교의 윤리는 온전한 모습은 아니나 파편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 가운데 파편적으로 실현된다.

보통 신자들은 손양원 목사, 성 프랜시스나 성 다미엔이나 테레사 수녀처럼 살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 안에서만 이러한 성화의 삶은 가능하다. 이러한 경우는 부자 청년에게 극단한 요구를 하신 예수의 가르침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부자청년이 예수에게 나아와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였다. 이에 예수는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라고 대답하신다. 이에 청년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지키었사온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니이까”라고 대답한다. 이에 예수는 말씀하신다: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마 19:21). 그 청년은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갔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말씀하신다: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 19:23 f.). 이에 제자들이 몹시 놀라 말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는 실망하고 좌절한 제자들에게 새로운 방향을 제시해주신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마 19:26). 예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은 인간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없으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불가능한 가능성”(impossible possibility)이다. 기독교 윤리란 미국의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 윤리학자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말처럼 불가능한 가능성의 윤리(ethics of impossible possibility)이다.

이러한 사랑의 윤리는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이 되었을 때 가능한 윤리이다. 왼 빰을 맞거든 오른 뺨을 돌려주고 오리(五里)를 가자면 십리(十里)를 가고, 겉 옷을 달라면 속 옷도 주는 윤리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윤리이다. 이러한 윤리는 원수를 갚고 보복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원수를 향하여 축복하고 우리를 핍박하는 자를 향하여 축복하는 윤리이다. 이것은 더 이상 옛 질서, 옛 세상에서 통용되는 윤리가 아니라 새 질서, 새 세상에서 통용되는 윤리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윤리는 종말론적 윤리(eschatological ethics)이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예수의 인격과 삶과 더불어 우리 가운데 있다.

오늘도 복음이 전파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종말론적 윤리운동이 일어난다. 1907년 한국의 평양대부흥운동에서도 이러한 종말론적 윤리운동이 일어났다. 그리스도를 영접한 어느 양반이 자기가 여태까지 데리고 있던 종을 해방시킨 사건이 있었다. 예수 믿고 회개한 사람이 중국집에 와서 주인은 이미 잊어버린지 오래된 외상값을 갚음으로써 그를 놀라게 했다. 길선주 장로는 보통 사람 같으면 전혀 문제 될 것 없는 별세한 친구의 유산에서 수고비로 챙긴 돈을 자신이 아간처럼 훔쳤다고 회중 앞에 참회하였다. 옛 질서에서 보면 문제가 되지 않은 사건이 새 질서에서는 문제가 되는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윤리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윤리운동은 파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오늘날 포스트모던 시대에서도 미국에서 시작된 청소년 혼전 순결운동이나 도덕 재무장운동, 어버이운동, 가정 지키기, 피스메이커(peacemaker)운동,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샬롬나비운동, 성시화(聖市化)운동 등 하나님 나라의 윤리를 반영하는 운동들이 파편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이것은 보편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지는 않으나 역사 속에서 이에 공감하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 가운데 그 세력을 키우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역사 속에서 겨자씨 운동으로 퍼져나가고 있다.

V. 이 세상에서 조건 없는 사랑

2008년 12월 21일 KBS 스페셜로 방영된 “엘렌 가족 이야기, 그후 8년”은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이 가족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아가페가 이 세상에서도 실현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국 볼티모어에서 살고 있는 69세인 시각 장애인 올스 니콜스 부부의 이야기다. 니콜스는 연방공무원으로서 사회보장국에서 일을 하고 있다. 그는 사회보장국에서 42년간이나 이 일에 종사하여왔다. 이들은 시각 장애인으로서 한국에서 버려진 시각장애아 4명 어린이를 차례로 입양하여 성공적으로 키워내었다. 이들은 이 세상 속의 아름다운 천사들이다. 이들의 사실이 한인사회에서 알려지자 밀알 선교회에서 이 부부를 초청하였다. 막내는 25년 전(前)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담요와 젖병에 싸서 버려진 아이였다. 시각장애뿐 아니라 자폐증을 앓고 있는 아이였다. 막내는 장애인 학교를 다니고 있으며, 집에 오면 똥오줌을 더 많이 눈다. 마음이 편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압바 니콜스는 그 때마다 기저귀를 갈아준다. 언니 세라는 한국명 신경미인데 정상인과 결혼하여 정상 아기를 분만하여 잘 살고 있다. 세라는 자폐증을 지닌 막내 동생과 특별한 교감을 갖고 있다.

니콜스 부부는 자녀들에게 항상 식사시간에 다음 감사 기도문을 아이들에게 가르친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당신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아멘” 아이들에게 신앙을 심어주고 아이들을 사랑으로 키웠다. 니콜스 부부는 말한다: “사랑은 성과를 바라지 않는다. 스스로 말할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에 의하여 입양되었기 때문에 우리도 조건없이 사랑할 뿐이다.” 니콜스 부부의 사랑은 예수의 종말론적 사랑에 의하여 역동화 되고 있다.

VI. 성령의 윤리

예수께서 가르치신 조건 없는 사랑의 윤리 실천은 인간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능력에 의하여 된다. 예수가 보내어 주시는 다른 보혜사, 성령이 우리 속에 거하게 될 때 우리는 변화되어 원수까지 사랑하게 된다.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적 자발성으로 사랑하도록 되어진다. 예수는 안식일 가버나움에서 회당에 들어 가셔서 자신이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의 일은 곧 하나님의 성령의 일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누가는 그의 복음서에 선지자 이사야를 인용한 예수의 설교를 다음같이 전해주고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하나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희락과 평안이다”(롬 14:17). 이러한 하나님 나라의 윤리는 성령의 역사에 의하여 그를 따르는 신자의 공동체 안에서 오늘도 파편적으로 실천되어진다.

사도 바울은 신자가 인간적으로는 행할 수 없는 그것을 성령이 놀라운 탄식으로 기도하시며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그리스도인은 육신의 소욕이 아닌 성령의 생각을 쫓을 때 하나님의 아가페를 역사 안에서 실현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육신으로 할 수 없는 율법의 요구를 성령이 성취함을 다음같이 증언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계속)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샬롬나비 상임대표/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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