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402회 학술발표회가 온라인 줌으로 개최됐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이재근 회장)가 지난 2일 오후 2시 제402회 학술발표회가 온라인 줌을 통해 개최됐다. 이날 이혜원 교수(연세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연구교수)가 ‘H. G. 언더우드의 韓譯 교리서를 통해 살펴본 기독교 용어의 동아시아 유통’, 임석재 목사(구세군 상암교회 담임사관)가 ‘김진호 목사의 목회와 영성’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먼저 이혜원 교수는 “19세기 말, 조선에 개신교가 전래된 이후 약 10년간은 기독교 용어가 한글로 만들어지는 시기였다고 평할 수 있다. 선교사 및 조선인 동역자들은 기독교의 이질적인 사상을 설명해 내기 위해 노력하였는데, 그러한 노력은 한 편에서는 성경 번역을 통해, 다른 한 편에서는 교리서 편찬을 통해 이루어졌다”며 “이 시기의 성경 번역과 교리서 편찬에서 나타나는 공통점은, 바로 중문본과 일문본을 적극적으로 참조하였다는 것이다. 그 결과 많은 기독교 한자 용어들이 아시아에 유통되어 조선에서도 자리를 잡아 뿌리를 내렸고, 현재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그러한 기독교 용어 유통에 대한 연구는 현재 성경 번역에만 집중되어 있는 실정”이라고 했다.

이어 “선교 초기에 출판된 교리서는 대개가 중문본에서 번역·출판된 것이었는데, 그 번역 과정에서 드러나는 용어의 도입에 관한 선행연구로는, 미 북감리회의 「교리와 장정」 중문본인 「美以美會綱例」(1880)와 한글본인 「미이미교회강례」(1890)의 용어를 비교한 담안유의 연구(2016)와 중국어로부터 번역된 6권의 교리문답서 용어를 각기 비교·고찰한 졸고(2021), 그리고 북감리회 「미이미교회문답」의 중문본·일문본·한글본을 비교하여 판본 및 용어의 흐름을 살펴본 졸고(2022)가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언더우드가 중문 문헌으로부터 번역한 교리서는 선행연구에서 언급된 16권이 아닌 8권이었음이 본 연구를 통해 고증되었다. 나머지는 낱장문서였거나, 번역서가 아닌 저작서였고, 심지어 실제로 출판되었다고 보기 어려운 책자들도 있었다”며 “교리서의 용어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지만, 내용과 관련하여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언더우드가 가장 많이 번역한 그리피스 존의 책에는 원시 유교의 ‘상제’가 기독교의 신이라는 인식이 기저에 깔려있다”고 했다.

이어 “예를 들어, 그리피스 존은 「上帝眞理」에서 유교 경전에 등장하는 여러 ‘상제’에 대한 언급을 살펴본 뒤, ‘상제에 대한 [유교경전의] 언급이 이토록 많은데, 안타깝게도 후세의 사람들은 모두 이 참된 상제로부터 멀어졌다[필자 역]’고 하였다. 그리고 「悔改爲要」에서도 ‘회개’의 의미가 유교 경전에 나오는 개과천선과 일맥상통한다는 논지를 보인다”며 “그리피스 존의 이러한 사상은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교도 대전」에 나오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긍정, 그리고 16세기 프란시스코 데 비토리아가 이를 바탕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제1본성’을 모든 사람이 소유한다고 본 적극적 해석, 이러한 제2토미즘을 바탕으로 중국에서 활동한 마테오 리치 신학의 연장선상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오염된 제2본성으로 인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인 제1본성까지 어두워지기 전의 중국인들이 고대 유교 경전에 써 놓은 ‘상제’가 바로 기독교의 신과 같은 신이라고 본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언더우드는 그러한 신학에 반대하여 1900년대 중반까지 ‘하님’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거부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며 “그래서인지 위에서 언급한 「上帝眞理」의 해당 구절도 언더우드는 ‘이 같은 말씀이 손가락을 이겨 곱지 못하거늘 애석하다. 그러나 이 상제도 세상 처음 조성하신 여호와에서 좀 멀어진 말이니’라고 의도적 오역을 하면서 그리피스 존이 의도한 의미를 비틀어 놓았다”고 했다.

이 교수는 “언더우드는 1908년 출판한 강연집 「동아시아의 종교」에서 ‘가장 고대의 인간들이 더 순수하고 높은 수준의 하나님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매우 결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라고 하면서 제2토미즘을 긍정하는 발언을 하는데, 이러한 사고의 전환 과정에서 혹시 그리피스 존의 저작이 미친 영향은 없었는지 더욱 살펴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리스도문답」의 1894년판에서 언더우드는 한 차례 ‘하님’을 사용하여 출판하기도 하였는데, 이것은 언더우드가 ‘하님’ 사용을 “완강히 반대했다”는 주장38에 배치된다. 그리피스 존의 신학에 반대했다면 과연 그렇게 적극적으로 존의 교리서를 다수 번역하여 출판하였을까하는 의문이 남는다“고 했다.

아울러 “한편 선교 초기 번역된 교리서의 용어의 흐름을 더욱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해서는 당시 언더우드 다음으로 혹은 동일하게 많은 수의 책을 중문에서 번역한 감리회의 올링거가 출판한 교리서 6권이 우선 연구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어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임석재 사관은 “한국 기독교 영성은 초기 기독교인의 삶과 가르침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선조들은 기독교의 개인 구원에 대한 열망과 함께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사회적 성화의 비전이 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사회구조를 변화시키고자했던 자유로운 기독교 실천가였다”며 “그들의 기독교 영성으로 인해 사회 봉건사회질서를 변화시켰고, 우리 사회는 사상의 자유, 학문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특징들은 오늘날 한국 교회의 영적 갈증을 해결하는 데 중요한 귀감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중요한 사실은 초기 기독교인의 기독교 입신의 한 계층이 유교 배경을 가진 엘리트 개화파 지식인이었다는 점”이라며 “이들은 유교엘리트 계층으로 기독교를 힘입어 사회를 개혁하려 했고,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에 주도적 역할을 감당했다. 일제 침략에 대항한 구국의 방편으로 기독교와 관련을 맺은 계층이었다. 이들은 개인의 존엄성, 인간의 권리와 같은 근대화 가치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들은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독립운동을 전개하며 사람들에게 사회의식과 역사의식을 일깨워 준 개화와 계몽의 역할을 감당하였다”고 덧붙였다.

임 사관은 “애산(愛山) 김진호(金鎭浩, 1873-1960) 목사는 1873년 청풍 김씨(淸風金氏) 24대 손으로 사남 중 차남으로 태어났고 1899년 26세에 500년 넘게 조상들이 살던 경북(慶北) 상주(尙州)에서 아브라함처럼 떠났다”며 “격동의 한말 민족적 위기 상황에서 1905년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를 통해 기독교에 입신했으며, 기독교로 개종 후 상동파 인사들과 함께 ‘종교 구국’의 길을 걸어갔다”고 했다.

이어 “상동교회에서 신앙생활하며 부속 공옥소학교와 상동청년학원 교원으로 활동하였고, 1907년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 신민회에 가입하였다. 1916년 배재학당 교사로 피임 후 1919년 3·1운동 때 학생들을 이끌고 만세 시위를 주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미 감리회 목사로 안수를 받은 후 인천 내리교회 목회, 배재학당 교목으로 사역하였고, 일제말기 서울 궁정교회와 삼청교회를 거쳐 함남 청진교회와 주을교회 등에서 목사로 목회하였다“며 ”해방 후 월남하여 교회 분열과 갈등 상황 속에서도 교회 연합에 힘을 쏟았다“고 덧붙였다.

그는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 표출과 민족운동 참여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직후였다”며 “상동교회를 중심으로 연동교회 교인들과 이화학당 교사와 학생들은 ‘구국기도회’를 개최하여 기독교는 민족문제를 외면하지 않는 ‘구국 신앙’의 모습을 대내외적으로 알렸다”며 “특히 전덕기 목사가 이끄는 상동파는 엡웟청년회(상동청년회)를 중심으로 도끼를 메고 조약이 체결된 경운궁(덕수궁)에 가서 ‘조약무효상소운동’을 벌였으며 조약 체결을 주도한 ‘을사 5적’ 척결의 무장투쟁을 시행하였다. 1907년 안창호와 전덕기, 양기탁 등이 조직한 항일비밀결사 신민회(新民會)는 서울과 지방의 기독교 민족운동 세력을 하나로 묶어 민족계몽운동으로부터 시작하여 해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이르는 다양한 민족저항운동을 이루는 시발점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민족운동 참여는 기독교가 개인 신앙에 머무르지 않고 한말 민족적 위기상황에서 민족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구국운동’의 한 방편으로 인식한 것”이라며 “기독교를 통해 사회개혁과 국권회복이 가능하다는 인식이 시민사회에 확산되었음은 물론이며, 많은 조선의 지식인과 독립운동가들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맞물려 김진호의 기독교 개종도 이루어졌다”고 덧붙였다.

임 사관은 “김진호에게 나라와 민족을 위한 종교가 아닌 기독교를 모른다. 그는 당대 사회문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은 엘리트 계층이었다. 또한 심각한 사회문제에 깊은 책임의식을 갖고 실천한 실천가였다”며 “특히 그의 사회적 성화의 영성은 자신이 체험한 역사적 사건에서 시작하여, 기독교의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로 사회개혁을 이루고자 실천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의 영성을 실천한 실천가라 할 수 있다”고 했다.

이어 “웨슬리 다양한 사회적 차원의 문제에 대해 포괄적인 접근을 하였다. 그는 사회적 영성이 인격적인 변화인 새 사람됨, 영적인 변형의 역사를 떠나서는 참된 열매를 맺을 수 없다고 통찰하였다. 그의 목표는 인격과 삶의 통전적인 온전한 성화였다. 김진호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개인의 인격과 삶의 통전적 의식개혁에서 시작하여 민족의 새로운 기독교 사상으로 진정한 영적 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며 “이러한 김진호의 사회적 성화 영성은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하는 유교적 전통에서 시작하여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기독교 사회적 성화 영성으로 완성하고자하였다고 할 수 있다. 즉 그에게 나라와 민족을 버린 사회적 성화 영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김진호의 영성은 첫째, 나라와 민족을 개혁하고자 했던 사회적 개혁의 영성으로 정의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그의 영성은 사회 운동적 성격을 띠었고, 사회개혁뿐만 아니라 민족운동, 독립운동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 나라를 이 땅 가운데 희망했던 웨슬리안 이었다. 이를 위해 자신의 희생과 고난을 감내했으며, 설교 가운데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갈망하였다”며 “조국의 독립을 기독교적으로 성취하고자 했던 그는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회개와 구원에 머물지 않고 사회적 성화로 나타나길 원했다”고 했다.

이어 “둘째, 그는 사회적 성화의 영성은 의식 개혁적 영성이었다. 암울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설교였다”며 “그는 설교를 통해 끝없이 사회와 교회의 상황을 비판하며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는 기독교 공동체로 태어나길 기대했다. 성화의 출발점이 믿음과 본질적인 사랑에서 시작된다”고 했다.

또한 “웨슬리의 사랑은 성화의 기본 동기이며 본질적인 내용이며 다른 사람을 위한 책임에서 일어나는 동료적인 행위”이라며 “김진호는 웨슬리의 사랑이 조선인의 의식을 개혁하는 희생으로 나타나길 설교했다. 즉 그의 사회적 영성은 먼저 교회 공동체의 의식개혁에서 시작하여 조선 사회 전체로 확대되는 의식개혁운동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의식 개혁적 영성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조선의 모든 민족의 삶과 사회를 개혁시키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셋째, 김진호는 변화(Transformation)를 강조한 사회적 성화의 영성가이다. 그는 기독교를 통해 정치·사회·교육· 종교가 변화되길 원했다. 정치적으로는 독립된 나라를 성취하길 원했다”며 “사회적으로는 이타적인 희생을 감내하는 변화된 사회가 되길 원했다. 교육적으로는 기독교 교육이 함양된 성숙한 교육으로 변화되길 원했다. 종교적으로는 인격과 삶을 변화시키는 통전적 기독교가 되길 원했다”고 했다.

아울러 “이러한 다양한 분야에서의 변화는 영적인 변형의 역사를 떠나서는 일어날 수 없다”며 “그러므로 그는 기도의 삶을 통해 개인의 인격적 변화를 가르쳤다. 변화된 개인의 내적 성화를 통해 사회적 변화가 성취되길 기대했다. 따라서 그는 웨슬리의 사회적 성화의 영성을 소유한 독립 운동가이자, 사회적 변혁가이며, 종교개혁의 개혁가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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