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성 전도사·이재근 전도사·이병주 전도사,
자주독립 위해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 본 보여”

지난 11월 17일은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신명을 바치신 애국선열들을 추모하고, 그 숭고한 위훈을 기리기 위해 제정된 ‘제82회 순국선열의 날’이었다. 116년 전 11월 17일은 일제의 강압에 의해 체결된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국권을 빼앗긴 날이며, 우리는 그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 순국선열의 날을 제정해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금년 순국선열의 날은 정부도, 국민도 너무나 조용히 기념일을 보낸 것 같다. 더욱이 지난 17일이 순국선열의 날이라는 것을 모르는 이들도 많다.

우리 선열들은 국권침탈이라는 치욕과 함께 36년이라는 기나긴 억압의 길을 갔지만, 결코 굴복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조국광복’의 날까지 독립 의지를 져버리지 않았다. 그러한 의지와 투쟁으로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웠고, 위대한 대한민국의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이에 기독일보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애국애족의 삶을 살았던 기독인들의 삶을 조명하고 존경과 추모의 뜻을 바치면서 알려지지 않은 3인 전도사의 독립운동 이야기를 소개한다. <편집자 주>

지난 17일 독립공원 내 독립관 앞 뜰에서 광복회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가 주최한 제82회 순국선열의 날 대한민국 순국선열·애국지사 영령 추모제가 열렸다.
지난 17일 독립공원 내 독립관 앞 뜰에서 광복회와 대한민국순국선열유족회가 주최한 제82회 순국선열의 날 대한민국 순국선열·애국지사 영령 추모제가 열렸다. ©리진만 선교사

일제강점기 원주지역 기독교 지도자들의 독립운동 고찰
-1919년 3·1운동 이후 독립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교역자를 중심으로-

 

1. 들어가기

2018년 정부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일을 1919년 4월 11일로 정하고 100주년 기념행사부터 매년 4월 11일을 법정기념일로 지켜오고 있다. 이는 3.1독립만세운동을 도화선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시작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매년 독립운동에 대해 언급할 때 대부분 조명되는 것은 3.1만세운동이고 33인의 업적과 사상만을 높이 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지금까지 3.1운동에 대한 자료 등은 많이 모였으나 서울의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 즉 통칭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國民議會)에서 수립한 통칭 ‘노령정부’(露領政府), 그리고 ‘상해임시정부’(上海臨時政府)와 연계해 투쟁한 독립운동에 관한 역사나 자료들은 많은 부분이 전수되지 않거나 발굴되지 않아 소개된 것이 매우 미미하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독립운동의 배경은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905년 조선은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유린당하고, 1910년 한일합병으로 나라를 잃게 되었다. 조선을 강점한 일제는 의병 운동으로 인한 통치상의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헌병경찰에게 제한된 사법권을 부여하고 행정에 관여할 수 있는 방대한 권한과 기능을 부여함으로써 조선인들의 민족 해방 운동을 철저하게 탄압했다. 군 단위에 헌병파견소 1개소와 헌병출장소를 관할하게 하여 헌병경찰제도에 의한 무단통치 지배를 확고히 했다.

 

영변 지방 전도자들과 해리스 감독, 모리스 선교사
영변 지방 전도자들과 해리스 감독, 모리스 선교사 ©GCAH Digital Galleries

이에 따른 민족의 저항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일제는 이러한 저항 운동의 움트는 싹을 잘라버리려 ‘105인 사건’ 날조를 통해 한민족을 탄압하고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1911년 11월 일제는 평북 선천에서 신성중학교를 급습해 교사 7명과 학생 20명을 체포했다. 이후 일제는 대대적인 검거 선풍을 일으켜 테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혐의로 무려 700여 명을 체포했다. 검거되어 조사를 받은 이들 중에는 외국인 선교사들도 있었는데, 감리교 선교사로는 해리스, 노블, 벡커, 빌링스, 폴웰 등이 있다. 이중 기소된 사람이 123명, 이 가운데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 105명 중 장로교인 82명, 감리교인 6명, 조합교인 2명 등 개신교인이 모두 92명이었다. 이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고 나온 민족 지도자들은 경찰의 감시가 심해져 독립운동 노선과 방법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즉, 무장독립 노선과 국외 독립군 기지건설과 국외에서의 투쟁으로 민족운동의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1916년 발간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 강원도편, 1915』에 보면 원주 지방에 포교소(교회)는 미감리교회파 6곳, 포교자(목사, 전도사) 역시 미감리교회파 11명, 신도 수는 모두 290명이었다. 위와 같은 통계연보에 따르면 헌병은 원주군 본부면에 원주분대(原州分隊)가 있었고, 횡성군 군내면에 횡성분견소(橫城分遣所)에 헌병이 파견되어 운영되고 있었다. 1919년 3월 독립만세운동 등이 일어나자 유화정책의 하나로 헌병경찰제를 폐지하고 1군 1경찰서, 1면 1주재소 정책을 실시하였다. 1919년 3.1운동 이후 강원도에서 발생한 첫 항일운동 사건은 일명 ‘철원애국단 사건’으로부터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 필자는 먼저 1919년 원주지방의 독립만세운동(일본 경찰과 헌병은 이를 ‘조선소요사건’이라 불렀음)을 살펴보고, 계속해서 전국에서 가장 커다란 규모로 조직된 대한애국단 강원도부를 조직한 ‘철원애국단 사건’을 소개한 뒤, 마지막으로 3.1운동 이후 원주지방 전도사들의 독립운동 참여 실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가 일제탄압에서 해방되어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사회문화적인 모멘텀을 만들어냈던 애국선열들을 기억하고, 자신을 희생해 자유 대한민국이 탄생하게 되는데 초석이 된 이분들의 공헌과 이름을 기억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음을 강조할 것이다.

1915년 원주 헌병분대
1915년 원주 헌병분대 ©원주시 박물관

2. 1919년 원주지방의 독립만세운동 정황과 교회

 

여기에서 3.1만세운동 이후 원주지방 독립만세운동 정황과 특별히 기독교계가 주축이 되었던 원주 지방 목회자들의 독립운동 상황을 소개하고자 한다. 서울에서 3.1만세운동이 일어난 후 통신망을 가지고 있던 강원도 지역의 선교부, 그리고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던 학생들 등을 통해 서울의 3.1만세운동 상황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3월 상순 이후 원주보통학교 학생들이 고종 인산을 맞이하여 조의의 상징으로 삼베천으로 만든 상장(喪章)을 달고 다녔고, 보통학교 4년생 김정열(金正烈)이 태극기를 만들고 운동을 일으키려고 계획하다가 하시구치(橋口龍太郞) 교장에게 발각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움직임 때문에 3월 16일 춘천 79연대 소속 보병 20명이 원주에 증파되고, 4월 초에는 일제 본국에서 병력이 증강됨에 따라 원주에 1개 중대의 보병을 추가로 파견하여 경계를 철저히 강화하였다.”1)

원주와 인접한 횡성 시장에서는 1919년 3월 27일 구한국기를 만들어 흔들며 독립만세운동을 펼쳤으며, 이 투쟁의 열기가 원주읍 외부 지역으로 번져갔다.

“4월 8일과 9일 밤, 그리고 그 며칠 후에 이르기까지 지정면(地正面), 건등면(建登面), 부론면(富論面) 3개 면 일대의 산봉우리마다 독립만세 소리가 퍼져났으며 밤새 총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이러한 봉화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마을을 돌아보면, 건등면 반계리·동화리·궁촌리, 지정면 보통리·가곡리·간현리·안창리, 부론면 천리·손곡리 등을 들 수 있다.”2)

4월 8일 건등면(현, 문막읍)에서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을 일제는 ‘건등면 면민 횃불 시위’라고 불렀고, 이 독립운동에 대해 당시 강원도 장관은 전화로 내무부 장관에게, 일본 경찰에서는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에서 조선총독부에 보고했다. 시위에 참가한 건등면민 인원에 대해 도장관은 200여 명, 고등경찰과에서는 150여 명이라고 보고했는데 일본경찰의 보고 내용은 아래와 같다.

“원주군 건등면(현, 문막읍)에서 4월 8일 8시 반, 건등면민 약 150명이 면내 고지에 올라 봉화대에 짚으로 불을 태우며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 헌병이 주모자를 비밀리에 쫓아서 조선어로 집주인에 대해서 강제로 가옥 문을 열게 했는지 등을 상세히 조사해 하나하나 기입했다고 말했지만, 아직 몇 명이 되는지 판명이 안 되어 조사 중이다.”3)  

 

1919년 4월 강원도 장관이 내무부 장관에게 보고한 문서(좌), 1919년 6월 조선 헌병대 사령부가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조선소요사건상황(대정8년 헌병대장 경무부장 회의석상 보고)’ 표지(우)
1919년 4월 강원도 장관이 내무부 장관에게 보고한 문서(좌), 1919년 6월 조선 헌병대 사령부가 조선총독부에 보고한 ‘조선소요사건상황(대정8년 헌병대장 경무부장 회의석상 보고)’ 표지(우)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원주 지방 기독교계에는 민족의 독립을 위해 애쓴 많은 교계 지도자가 있었다. ‘3.1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자 33인 중 한 사람인 신홍식(申洪植) 목사는 원주제일교회 제10대 담임 목회자였다. 3.1 만세운동 발발 후 강원도에서 처음으로 추진된 ‘애국단강원도단’ 결성에 협력해 힘을 실어주었던 조윤여(趙潤如) 전도사 역시 원주제일교회 제5대 담임 목회자였다. 이와 함께 박종성 전도사는 문막교회를 1916년부터 1918년까지 담임했고, 이재근 전도사는 귀래 당우리교회에서 1916년부터 1917년까지 사역했으며, 이병주 전도사는 당시 원주지방회에 소속된 단양교회와 충주 목계교회, 그리고 문막교회에서 1924년부터 1928년까지 목회를 했다.

 

여기에 소개한 분들 이외에도 많은 기독인이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민족독립운동에 참여한 사례들을 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 기독교인들은 교회 활동을 통해 국채보상운동, 애국부인회, 기독교 농촌운동, 신간회와 근우회,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 등을 통해 애국·독립운동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한 예를 들어보자면 자기가 맡은 지역의 지리와 환경에 능통했던, 성경을 판매하고 전도를 하던 매서인(권서)들을 들 수 있다. “3.1운동이 발발했을 때 권서들에 대한 일제경찰들의 검속과 방해가 심했던 것은, 그들이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있었지만 그 못지않게 독립운동의 정보를 이곳저곳에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발’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4)

앞에 거명한 전도사 3명의 독립운동 이야기는 이어서 상세히 소개하겠지만, 이들처럼 매서인 출신 중에서도 주남선(朱南善)은 군정서(軍政署)의 군자금 모집에 관계하였다는 이유로 체포·투옥된 경우도 있었다. 매서인(권서)들은 “그들의 권서행로의 여건을 십분 활용, 군자금모집 등의 독립운동에도 공헌하였다는 것이다. 그런 관계로 일제의 경찰들은 이들의 행적을 늘 감시하였으며, 때로는 이근식과 같이 살해되는 경우도 나오게 되었던 것이다.”5)

한편, 이러한 공헌에도 불구하고 기독교계에 대해, 특별히 3.1운동 당시 원주지방선교부 책임자였던 모리스(C. D. Morris) 선교사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도 있다. 3.1운동이 일어나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일어났다. 강원도에서도 여러 곳에서 일어났지만, 유독 원주읍내에서는 시위가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중 교회에서는 더욱 그러하였다. <계속>

[미주]

리진만 선교사

1) 오영교·왕현종, 『원주독립운동사』, 원주시, 2005.
2)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편, 《독립운동사》2, 590~593쪽.
3) 〈건등면 면민 횃불시위〉, 경무총감부 고등경찰과, 대정8년-10년 조선관계사건관계서류, 共7冊其7. 번역: 정경숙 선교사
4) 류대영, 옥성득, 이만열, 『대한성서공회사 Ⅱ』, 대한성서공회, 1994, 402쪽.
5) NBSS AR for 1920, P.35.

 

리진만 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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