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윤정 교수(월드미션대학교)
최윤정 교수(월드미션대학교)

삼국지에 보면 남만(南蠻) 장군 맹획(孟獲)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갈량은 촉나라에 적대적인 남쪽 오랑캐들을 평정하고자 출정했으나 남만이 맹획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음을 보고 그를 생포한다. 그러나 제갈량은 맹획을 쉽게 풀어준다. 가만히 있을 리 없는 맹획은 기고만장하여 다시 군사를 일으키지만 제갈량에게 거듭 잡힌다. 이렇게 제갈량은 맹획을 일곱 번 사로잡은 후 일곱 번 풀어주게 된다. 이것을 칠종칠금(七縱七擒)이라 일컫는데, 결론적으로 맹획은 제갈량의 아량에 감복하여 촉나라에 완전히 복종하게 된다.

맹획의 이야기를 대할 때 마다 이상하게도 이와 맥락이 전혀 다른 서구 소설 하나가 생각난다. 바로 체코 출신의 소설가 밀란 쿤데라가 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인공은 개인의 아픔과 역사의 질곡을 안고 각자 방황하며 삶의 가벼움 내지는 무거움을 추구한다. 이 소설에서 삶의 가벼움을 나타내는 소재는 주로 남녀의 비행이지만 어쩌면 이것이 인간의 무거운 실존, 즉 관습과 도덕에 대한 반작용을 나타내는 가장 쉬운 모티브가 아닌가 한다. 이 소설은 포스트모던 작품 답게 독자들로 하여금 이데올로기 혹은 도덕이나 인간의 책임과 같은 삶의 무거움에 천착하지 말고 존재의 가벼움을 추구하며 살 것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다.

맹획의 이야기와 쿤데라의 소설에서 공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은 피조물로서의 인간의 본질과 한계이다. 맹획은 바벨탑을 쌓은 인간 군상의 표본이다. 자아로 똘똘 뭉친, 그래서 율법에 완전한 자요 의로운 자가 됨으로써 스스로를 구원코자 한 사울과도 닮아 있다. 쿤데라의 소설 주인공들은 어떠한가? 그들이 선택한 가벼움의 결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독자를 한 순간 허탈하게 만드는 남녀의 허무한 죽음이다. ‘어차피 죽을 인생 무겁게 살 필요가 없다’가 작가가 말하려는 인간 실존의 한 변(辯)이라면 ‘인간은 죽기 때문에 무겁게 살아야 한다’가 또 다른 실존의 해석이 될 수 있다. 실로 허무와 실존은 동전의 앞뒤와 같이 맞닿아 있는 것이다. 어떠한 세계관에서 인간을 바라볼 것인가가 관건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맹획을 지지하고 쿤데라의 모티브를 환호하게 만든다. 상대주의 앞에서 인간은 육체와 정신의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개인이 선택한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 비록 그것이 가치 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하더라도 그 가치조차 각 개인의 규정에 달려있는 것이므로 자유야 말로 개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이라 믿는다. 그러나 문제는 철학으로도, 불굴의 의지로도, 인간 존재의 그 어떠한 기제로도 뛰어넘을 수 없는 바로 ‘죽음’이라는 철벽이다. 이 죽음 앞에 선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그렇기에 한없이 겸손하다. 종국에는 자유라는 고귀한 두 글자가 죽음이라는 명제 앞에서 그 위엄을 잃고야 만다.

맹획의 자유는 지독한 자아에 갇혀 있고, 쿤데라의 자유는 무서운 허무에 사로잡혀 있다. 어쩌면 동양과 서양의 세계관의 생김새도 이와 같을지 모르겠다. 동양은 여전히 형이상학을 추구하는 모험에 갇혀 있고, 서양은 실존주의로도 돌파되지 않는 죽음의 난제 때문에 허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특히 서구 세계관의 입지는 불혹(不惑)은 커녕 아직 이립(而立)에도 도달하지 못한 질풍노도의 청소년기를 못 벗어난 형국이다. 서구는 언제까지 탕자의 방황을 자유란 명목으로 합리화할 것인가?

인간을 진정 자유케 하는 것은 진리의 힘이다. 진리는 죽음을 이기기에 인간의 허무를 거뜬히 뛰어넘는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맹획을 굴복시킨 제갈량의 아량에 비유할 수 있을까? 예수님의 오래 참으심을 자유와 정의에 목말라 하는 인간 실존의 외침에 비교할 수 있을까?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 8:32)

최윤정 교수(월드미션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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