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영성의 성경적 어의(語義)

이경섭 목사
이경섭 목사

‘영성(Spiritualitas)’이라는 용어가 성경에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와 관련해선, 영성과 딱 맞아떨어지는 용어는 성경에 없습니다. 다만 그 어원이 되는 ‘호흡’ ‘하나님의 입김’의 뜻을 가진 라틴어 ‘Spiritus’ 는 라틴어 성경 여러 곳에 나오는데, 이 단어는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적절히 정의해 주는 용어로 보입니다.

이 하나님의 ‘Spiritus’가 태초에 인간에게 불어넣어질 때, 육체뿐인 인간이 비로소 생령이 됐고(창 2:7), 타락한 후에는 죄인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재창조되는 동인(動因)이 됩니다(요 3:5). 이렇게 ‘Spiritus’란 용어 안에는 기독교의 중심 교리인 창조론적, 구속론적 정의가 함의되어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영성은 ‘하나님의 Spiritus(입김)’을 소유한 하나님 자녀의 본질과 속성으로 정의될 수 있으며, 그 지향점 역시 하나님께서 본래 의도하신 인간 본연의 정체성(正體性)입니다.

"영성이 없이는 그 누구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reformed Spirituality)”는 개혁주의 영성학자 '하워드 라이스(Howard L. Rice)'의 말은 영성의 본질을 간파한 타당한 주장입니다.

그런데 오늘 ‘영성’을 단지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 혹은 ‘고도로 훈련받은 소수인들의 영적 기술’, 아니면 부흥, 은사운동의 원동력으로서의 ‘영적 파워’ 쯤으로 이해하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런 인식은 ‘기독교 영성’을 지엽적인 것으로 한정시키면서 소수 영적 엘리트들의 전유물로 만듭니다.

‘영성’은 포괄적인 동시에, 지정의가 통합된 전인적(全人的)인 것이고, 예배, 기도, 말씀 같은 예전적(禮典 的)인 것에서부터 삶 전반을 아우르는 전 삶 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성을 센세이셔널리즘(sensationalism)이 가미된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닌, 기독교의 본질과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정의하는 일반론적인 입장에서 차분하게 접근해야 하겠습니다.

4.영성과 경건

혹자는 기독교에서 전통적으로 써온 ‘경건(piety, 敬虔)’이라는 좋은 용어가 있는데, 꼭 ‘영성’이라는 용어를 써야 하느냐고 반문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경건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가장 잘 표현한 성경적 용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만, 너무 무겁고 성별(聖別)된 용어라, 포괄적이고 다양하게 응용하는 면에서는 다소 제한이 있습니다.

‘경건(piety)’이 ‘성경 신학적인 용어’라면, ‘영성’은 변증적이고, 예전(禮典)에서 문화까지 망라한 ‘문화신학적인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화란 개혁교회의 흐라플란트(C. Graafland) 교수 역시 견해를 같이 합니다.

“영성은 하나님을 만남에 있어서 마음의 내적 구원 체험뿐만 아니라 성향이나 행동에 있어서 전체적인 삶의 분위기를 포함한다. 예를 들어 사회생활에서의 태도나 윤리적, 사회적 행동들까지 포함한 생활 방식(way of life), 곧 전체 문화생활과 관계 된다”

특별히 ‘경건’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단순하게 쓰는 데는 자연스럽지만 변증적인 용도로 쓰기에는 언어적 한계가 있습니다. 예컨대 신앙의 건전성을 판단하는 의미로서의 ‘불건전한 경건’‘건전한 경건’ 등의 표현이나, 종교의 속성을 규정하고 비교하는 ‘기독교적 경건’ ‘마호멧적 경건’ 같은 표현은 어색합니다.

그리고 기독교 내의 다양한 신앙 노선을 표현하는데도 ‘영성’은 훨씬 자연스럽습니다. 예컨대 ‘바울의 영성’, ‘루터의 영성’, ‘칼빈영성과 루터영성의 차이’ 등의 표현입니다. 이런 표현은 마치 기독교 내에서 교리나 교파의 차이를 암시하는 정도로 들립니다.

반면에 ‘경건’은 기독교의 본질적인 핵심을 나타내는 무거운 용어이기에, 기독교 내의 미미한 차이들을 서술해 내는 데는 적당치 않습니다. 예컨대 ‘바울의 경건’, ‘루터의 경건’이란 말은 마치 ‘바울의 하나님’, ‘루터의 하나님’이라는 말처럼 들려 바울의 하나님이 다르고 루터의 하나님이 다른 것 같은 암시를 줍니다.

유사한 개념들을 함께 묶어, 필요에 따라 두리 뭉실하게 혼용하는 언어사용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신학의 발전은 언어의 발전과 맞물려 있으며, 신학 용어의 빈곤은 다양한 용어 차용(借用)을 어렵게 하여 논리전개를 부자연스럽게 합니다.

이런 논리 전개의 부자연스러움은 필연적으로 신학의 발전을 막는 장애 요소로 작용하게 됩니다. 따라서 신학 발전을 위해서는 언어의 작은 뉘앙스의 차이라도 무시해서는 안 되며, 더구나 뉘앙스의 차이를 품사의 차이만큼이나 크게 느끼는 현대인들의 의식 구조 하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서 ‘영성’을 구차하게 ‘경건’과 대비시키며 장황하게 말하는 것도, 언어의 세분화가 신학 발전에 기여하리라는 기대감 과 무관치 않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신학, 철학을 비롯해 전체 인문학 분야에서 유럽이 우위를 점하고 있음은, 정교하고 세분화된 언어 체계 때문으로 보는 것은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새로운 용어 차용을 지나치게 두려워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 이 글은 이경섭 목사가 쓴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2005년)’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목사의 저·역서는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이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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