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원장
이효상 원장

매주 이메일로 칼럼의 구독자가 5천여 명이고, 문자 SNS로 까지 최소 1만여 명 선이다. 기타 온·오프라인 신문 방송으로 접하는 이들까지 포함할 경우 대충 20여만 명에 접하고 있다.

글을 쓰는 이유는 단지 국익(國益)과 우리의 삶을 위해서다. 비정상이 일상화된 현실에 분노하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의 삶을 위해 고민과 진액을 쏟아내며 글을 쓴다. 하지만 “왜 그런 글을 쓰느냐”에서부터 글의 찬반에 대한 워낙 다양한 의견들이 많아 참 조심스럽다.

아무리 어둠이 짙었어도 닭이 울면 새벽이 온다. 작은 목소리, 작은 글이지만 메시지가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위로와 도전과 용기를 불러 일으켰으면 한다. 글을 쓸 때면 고민이 참 많다. 찬반(贊反) 호불호(好不好)가 갈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정치적이진 않은데, 기득권에 대해, 기득권 층의 오만방자함에 대해서는 단호히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다.

펜이 무딘 탓인지 몇 년을 그렇게 다양하게 쓰다보니 이젠 별 오해가 없는 듯하다. 간혹 이런 질문을 받는다. “원장님은 어느 편이세요?” 몹시도 궁금한 모양이다. 아마도 정치적 견해를 묻는 것 같다. 딱히 대답하기가 곤란하다.

나는 철저한 ‘자유민주주의’ 지지자다. 정치적으로 극우나 극좌, 종교적으론 이단 사이비 돌팔이들을 배격한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린다고 죽기 살기로 싸우는 꼴도 보기 싫다. 평화주의자로 살며 적을 안 만들려 노력한다. 시비를 걸어오는 적은 피하지만 그래도 생긴다. 그만큼 양 진영으로 갈라져 있는 벽을 마주보는 것 같다. 시대상황에 따라 명분없이 이익을 좇아 이편저편 넘나들고 기웃거리며 어느 편에 줄서고 싶은 생각도 없다. 굳이 따진다면 난 ‘예수님’ 편이다.

삶은 ‘보수’적이나 생각은 ‘진보’적이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삶은 ‘진보’적이면서 생각만 ‘보수’적이면 곤란할 듯 싶다. 요즘 ‘진보’나 ‘보수’가 영 맘에 들지 않는다. 보수나 진보 세력이 자기네 집단만을 위해 열심히 일하고 국가와 국민들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오직 자기들 이권을 챙기는 것이 먼저다 보니 국가는 어려워지고 국민들 삶의 질이 떨어질 수밖에 없어 보인다. 민심은 시계추와 같다. 오늘의 흔들리는 추가 내일 어디에 멈출지 아무도 모른다.

예전에 진보의 유 모(某) 이사장이 ‘보수’를 가리켜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다. 유럽에서는 그렇다”라고 말했는데, ’보수‘가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는 것’이라면 ‘진보’의 실체는 무엇일까? ‘진보’는 공동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는 것일까. ‘진보’의 입장에서는 이렇게 말을 할 수가 있겠다. ‘진보’는 ‘공동체의 가치변화를 추구해 가는 것’이라고.

‘국민 생존권’과 ‘국가존망’이 걸려 있는 최근 코로나 상황에서 ‘보수다, 진보다’ 하는 이분법적으로 가치를 나누는 것은 사실 무의미하다. 하지만 중간에 기준을 두고 오른쪽에 더 가치를 두느냐, 왼쪽에 더 가치를 두느냐 하는 것은 나라 발전에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이다. 한 바퀴로는 움직이기 힘들기에 양 바퀴가 함께 움직이는 것처럼. 그런데 양 바퀴로 돌지 못하고 한쪽 바퀴로 돌다보니 한 참 돌아도 발전이 없는 제자리이다.

최근 진보는 기득권이 되면서, 참 꼴불견이다. 소위 ‘20년 집권론’을 거론하고, 권력의 오만함을 드러냈다. 보수가 기가 죽어 아무 말도 못하는 처마 밑에서 비맞은 생쥐처럼 풀 죽은 모양새라고 해도 그렇게 꼭 용비어천가를 불러야만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중도진영은 양 날개로 날아야 할 새의 한쪽 날개가 꺽였다며 불안해 한다.

보수에 대한 비난, 모두 맞는 말이다. 많은 유권자들이 ‘보수’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돌려버릴 만큼 망가진 것도 사실이고, 이대로 남미(南美) 모델로 가면 진보가 실제로 20년 동안 집권할 수도 있으니 한쪽으로 치우친 대한민국을 걱정하는 것도 이해된다.

보수가 무너지고 힘을 못 쓰는 상태가 된 것은 맞다. 이렇게 된 것은 보수의 가치가 아니라 보수를 참칭하던 가짜 보수 세력 아닐까. 집권 기간 점진적 개혁을 통해 대한민국 공동체와 자유민주주의를 신장하는 대신, 계파 이익과 특권 유지에만 몰두한 가짜 보수 세력이 무너진 것이지 보수의 가치가 쓸모 없어진 것은 아니다.

사실 어느 세력이 집권했건 ‘기업하기 더 좋은 나라가 되었는가? 보통사람들의 일상이 더 자유로워졌는가? 사회는 더 안전해졌는가? 학생들의 교육은 더 창의적이 되었는가? 안보와 평화는 더 신장되었는가? 미래 비전은 분병한가?’ 등을 자문해보면 분명해 진다. 그동안 정치의 계파는 더 단단해졌고 특권은 더 늘어만 갔던 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가령 정치인들이 특권의식을 버리고 이탈리아처럼 의원수를 3분의 1로 줄인다든지 ‘무보수 명예직’으로 하라고 하면 아마 정치인들이 무조건 한 팀이 되어 결사반대 할 것이다. 그들만의 리그(league)이기 때문이다.

시대에 따라서 ‘선’의 기준도 변하는 것이고, ‘악’의 기준도 변하고 있다. 그것은 사회변화에 따라 당연히 따르는 현상이다. 하지만 너무 과거의 선을 절대적인 것으로 주장하여 기득권의 유지를 위한 방편으로 옹호하고, 또한 검증되지도 않고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하는 선의 기준만을 추구한다면 나라는 개판이 될 수 있다. 흑백의 이분법 사고는 매우 위험하다는 생각이 든다. 절대선의 공동체의 가치를 지키기도 하고 변하는 선의 기준에 따라 공동체의 가치를 변화시켜 나가기도 해야 하는데, 시민들이 여러 시각을 교환하고 적절히 선택하는 것이 나라발전의 중요한 관건이라 생각된다. 역사의 정(正)-반(反)-합(合)은 언제나 있어 왔고 필연적이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면 진짜 보수가 추구해야 하는 가치는 무엇인가. ‘자유’와 ‘공동체’다. ‘자유’에는 개인의 자유를 지키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의 자유를 지키는 ‘시장경제주의’가 포함되어 있다. ‘공동체’에는 외부의 적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국방과 안보’가 강조되고, 내부의 적으로부터 공동체를 지키기 위한 ‘법질서’가 포함된다. 즉 보수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주의, 국방과 안보, 법질서 수호 등 지키고자 하는 철학과 가치를 담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지난 4.15선거에서 국민이 이런 가치를 외면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대다수 국민이 여전히 이 가치들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이 가치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실천도 하지 않는 다수 사람들이 보수의 간판을 들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유와 공동체는 어찌되든 개인의 이익과 특권을 누리는데 끝까지 추종한다든지, 책임질 상황에서 책임지지 않는 사람들이 보수를 참칭한 것이 문제였다. 이렇듯 보수의 위기는 사람의 문제이지 가치 그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의 가치 가운데 논란이 가장 많은 항목을 고르자면 아마도 ‘시장경제주의’일 것이다. 시장에만 맡겨둔 결과 빈익빈 부익부, 양극화가 심화했다는 주장이 팽배했다. 사회적 평등을 실현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해서 문정부가 물가에 개입하고 시장에 개입한 결과 식물경제가 되고 말았다. 시장경제주의는 불가피하게 결과의 차이를 가져온다. 이 차이가 실은 사람들을 더 노력하게 만드는 동력이 된다. 노력한 사람과 노력하지 않은 사람 사이에 결과의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결과 평등주의가 우선시되면 더 이상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굳이 힘들게 노력하려 할 사람이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주도성장’은 이미 실패했다. 그들은 재정건전성에는 관심이 없다. 따라서 공동체의 발전 동력인 시장경제주의의 가치를 중시해야 한다. 다만 빈곤·장애·환경·에너지와 공정거래 등 시장이 풀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정부가 나서서 개입하는 방식을 택하는 것이 옳다. 그러지 않고 평등주의적 해결부터 시작하면 경제를 하향 평준화시키면서 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려 결국 더 많은 빈곤층을 만들게 된다.

‘공동체를 지키는 보수’라고 말해놓고 보니 좀 생뚱맞다. 마치 쓰레기통 속에서 장미꽃을 피워 보려는 꿈일까. 과연 우리사회에 ‘공동체를 지키는 보수’가 있을까. 보수 아닌 보수에 바라는 애절한 절규같기도 하다. 그럼 ‘공동체’는 진보에는 없고 오직 보수에만 있다는 말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이미 닳고 단 보수보다는 차라리 진보에 대한 애정어린 방향제시로 우리사회 절대과제인 ‘공동체 복원’은 기대할 수 없는 거냐고 말이다.

브레이크 없이 질주하는 한국사회, 도대체 자유 대한민국호(號)는 어디에 중심을 맞추고 가야 하는 걸까. 또한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더 나은 길을 찾고자 해야 할까? 근본적으로 회의가 든다. 의식있는 자들이 문제를 보고도 침묵하므로, 민주주의의 위기는 더 심화되고 있다.

이미 지난 20세기 냉전을 넘어, 21세기 탈냉전 시대다. 실용사회에 그 무슨 절대 보수, 절대 진보가 따로 있을까. 결국 보수나 진보란 해묵은 진영논리에 빠져있는 진영 이념세력의 모습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혹시나 6,70년대 근대화 향수에 젖은 정치 세력를 숭고한 ‘보수’로 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얼마 전 “우리 사회 변화의 동력이었던 사람들이 어느새 기득권자가 돼 변화를 가로막고 있어 안타깝다”는 장 모(某) 의원의 연설은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를 다짐하던 그들의 변절을 일깨웠다. 보수나 진보가 추구하는 ‘가치’는 죄가 없다. 보수를 참칭하는 변절된 가짜 보수나 가짜 진보가 문제다. 권력만 탐하는 가짜 진보나 가짜 보수가 판을 치고 있으니 진짜 진보나 진짜 보수가 나서지 못하고 있다. 분명한 철학과 가치를 내재화하고 실천하지 못하는 껍데기는 가라. 가짜는 가라. 그래야 철학과 가치가 확고한 진짜가 나라를 재건할 것이다. 양 날개를 균형 있게 갖춘 강한 대한민국이 새롭게 탄생할 것 같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고 했는데 나라 돌아가는 꼴이 말이 아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 산다는 게 참 힘든 거다. 사람들 속에 터질듯한 울분이 참 많다. “어느 편이세요?” 묻지 말자. 과거를 묻지 말자. 과거나 편 가르기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좁은 땅에서 편먹고 싸움질 하지말자. 상대가 나와 다르다고 비난할 것도 없다. 어차피 4차 산업혁명의 핵심은 연결성(connectivity)이다. 그러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준비하자. 사회문제를 해결하고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고, 또한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려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경험과 지혜를 나누고 협력을 키워나가는 소통이 민주 사회의 대안이다. 대안 소통 플랫폼이라고 할까나.

현실은 이미 벌어진 일이라 생각해야 편하다. 미래로 전진할 때는 주저하지 말며, 가는 세월에 인내해야 할 때는 초조해하지 말고, 후회될 때도 있지만 낙심하지 말고 가자. 사회가 분열되고 국가적으로 민주주의의 위기일수록 보수나 진보의 미덕이나 덕목이 빛나야 한다. 변화와 혁신도 좋지만 공동체를 유지하는 기본이 되는 미덕, 규범, 국가 정체성부터라도 지키면서 가야 할 것 같다.

이효상 원장(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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