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들어 연이어 종전선언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하면서 한미관계의 미묘한 파장이 일고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9월 23일 녹화로 진행된 유엔 총회 연설에서 한반도 종전선언을 위한 국제사회의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 지난 10월 8일 비영리단체 코리아소사이어티의 연례만찬 기조연설에서는 “종전선언이야말로 한반도 평화의 시작”이라며 이 문제를 재차 거론했다.

그 후 청와대 안보·외교·국방 라인이 즉시 미국 워싱턴으로 총출동했다. 종전선언이 이루어지려면 정전협정의 당사자인 미국의 참여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정부로서는 북의 선 비핵화를 고집하는 한 현 남북 관계가 한 발짝도 나아가기 어렵다 보고 먼저 종전선언으로 교착상태에 빠진 남북관계의 물꼬를 트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입장은 우리 정부와는 결이 사뭇 달랐다. 북의 선 비핵화 조치 없이 종전선언은 불가하다는 것이다. 서훈 청와대 안보실장은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만난 자리에서 선 종전선언에 대한 문 대통령의 의지를 설명했으나 미국은 북의 비핵화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기존의 입장을 되풀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기존의 입장을 고수하고 있는 이유는 군사 안보 외교 뿐 아니라 경제에서까지 아시아의 맹주로 떠오른 중국 때문이다.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전술적 핵심 과제를 북한이 아닌 중국에 두고 있다. 중국의 군사력이 팽창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억제하는 것이 아시아의 공산화를 막는 길이라고 보는 것이 미국의 대아시아 정책의 핵심이다. 그렇기 때문에 외교가에서는 문 대통령의 종전선언이 아시아를 향한 미국의 전략적 의도를 간과한 섣부른 정책이라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남과 북이 일촉즉발의 긴장관계를 유지해야 하느냐 하는 비판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남북이 종전선언을 통해 긴장관계를 해소해야만 통일시대를 열 수 있으니 미국과의 관계가 좀 소원해지더라도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는 것이 문 대통령과 청와대 등 핵심부의 일치된 의지로 읽힌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소리이다. 북이 보유한 핵무기의 성격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데서 오는 오류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한반도에서 종전선언이 이루어진다고 가정하면 가장 먼저 유엔사가 해체되고, 주한미군은 철수해야 한다. 더 이상 외국군대가 주둔할 명분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시작전권이 우리 군에 자동 이양되고, 사드배치, 전쟁 억제를 위한 한미군사훈련도 아무 의미 없게 된다. 이런 그림이 통일을 위해 언젠가는 단계적으로 실현되어야 하겠지만 지금으로선 잃을 것만 많은 위험천만한 도박이다.

문 대통령이 주창하는 대로 “종전선언이 한반도 평화의 시작”이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론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지금 남북관계가 종전선언을 하지 않아서 평화롭지 못한가라고 되묻는다면 쉽게 대답하기 어렵다. 말 그대로 종전선언이 평화를 여는 시작이 되려면 서로 걸림돌이 없어야 하는데 그것이 남쪽에서만 싹 치워지게 문제다. 그 즉시 북한 3대 세습 정권이 오매불망 기다리던 그날이 마침내 열리게 되지 않겠는가. 그러니까 문 대통령의 바람대로 종전선언이 “한반도 평화의 시작”이 아니라 “한반도 적화통일의 시작”이 될 수도 있음을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샬롬나비는 지난 18일 발표한 논평에서 “미중 갈등이 최고조로 달하고 북한의 개성 남북사무소 폭파, 공무원 사살 사태 가운데 종전선언은 낭만적 교조적 민족 공조라고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북한의 핵무장이 굳어지고 대남 공산화 전략이 바뀌지 않았는데 종전선언 제안은 무슨 의미인가”라며 “시대착오적이 아닌가”라고 꼬집었다.

북한은 이미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제2의 6.25와 같은 한반도 전쟁 뿐 아니라 미국 본토를 겨냥한 더 큰 전쟁이라도 불사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었다. 지난 10월 10일 자정에 시작해 새벽에 끝난 북한노동당 창건 75주년 열병식에서 초대형 방사포와 신형 ICBM 등 신무기를 대거 공개하며 무력시위에 나선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 대통령이 종전선언을 위한 국제사회의 적극적인 동참을 거듭 호소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제사회가 꿈쩍도 하지 않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6.25 한국전쟁을 일으킨 호전적인 북한이 핵무기로 완전무장 했는데 그것을 그냥 놔두고 무슨 평화 타령이냐는 것이다.

한반도 종전선언은 대통령의 의지로 되는 게 아니다. 청와대와 정부, 여당이 힘을 몰아준다고 될 수도 없다. 적어도 북의 비핵화와 대남공산화 전략이 폐기될 때나 가능한데 지금은 그 분위기가 거꾸로 가고 있다. 문 정부가 북한에 눈치 보며 끌려 다니는 동안 북한은 원하는 것을 이미 손에 넣었다.

우리 국민 중에 종전선언이 무얼 의미하는지, 그 결과가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는가. 그냥 한반도에서 영원히 전쟁의 위험이 사라지게 되는 것 쯤으로 낙관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문 대통령의 거듭된 종전선언에 진정성이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 국민을 사살하고 불에 태워버린 북한을 향해 대통령이 왜 저토록 비굴한 구애를 해야 하나 생각하는 국민들이 느낄 굴욕감도 고려해야 하지 않겠는가.

미국 대선이 초읽기에 들어가면서 북미간의 ‘쇼 타임’도 끝났다. 아무리 피리를 불고 꽹과리를 크게 울린다고 상대가 덩달아 춤을 출 타이밍은 아니란 말이다. 한반도에 항구적 평화를 원한다면 지금으로선 금이 간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재점검하고 국제사회의 신뢰와 존경을 회복하는 게 훨씬 더 시급한 과제다. 백 마디 말이 무슨 소용인가. 평화는 지킬 힘이 있는 국가와 국민만의 특권이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