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
김민호 목사

8.15 광복절 시위를 기다렸다는 듯이, 현 정부는 기독교와 보수 단체가 코로나19 발원지처럼 프레임 씌우고 있다. 언론은 연일 교회와 보수 시위자들로부터 전염병이 확산되고 있다는 보도로 국민들의 눈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언론만 본다면 대한민국은 애국시민들과 교회로 인해 전염병으로 다 죽을 것처럼 공포스럽게 느껴진다. 팩트에 조금만 관심을 갖는다면 코로나 확산의 1차적 책임은 정부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확진자 수가 늘기 시작한 것은 8.15 광복절 이전이다. 정부가 중국인 입국을 허용하고 330억 국민 혈세를 풀어 외식을 독려하였다. 또 민노총 시위를 허용하고 17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하여 많은 인파가 해수욕장에 몰려들게 한 것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이 정도 팩트만 보더라도 정부가 전염병 확산의 불을 지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그 책임을 교회와 보수단체에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교회와 보수단체가 정부의 이런 선동 앞에 너무 쉽게 몸을 낮추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임에 걸렸다 싶으면 곧바로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잘못했다고 사과한다. 더 나아가 같은 보수 진영 안에 있는 사람들이 8.15 광복절 시위 참가자들과 교회를 향하여 거리를 두고 극우라 비난하는 사람들까지 나오고 있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다. 성경에도 없는 비대면 예배를 성경적이라고 합리화하며, 대면예배 행위가 마치 질병을 퍼뜨리는 몰상식한 행동이라 공격한다. 이 모습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주기철 목사님을 공격하며 목사직을 박탈시켰던 과거의 악몽을 떠올린다면 지나친 것일까? 제발 프레임 공포에서 해방되어 냉철하게 현실을 보았으면 한다.

프레임은 예나 지금이나 사탄이 교회가 진리를 증거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는 전형적인 수단이었다. 사탄은 프레임에 빠지면 죽을 것이라는 공포를 조장해서 진실을 가리고 할 말을 못 하도록 했다. 그러나 여기에 굴복하면 거짓이 왕 노릇 한다. 반대로 프레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를 증거하고 진실을 존중하면 프레임의 결계는 놀랍게 깨진다. 왜냐하면 이것이 진리와 진실의 힘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역사는 끊임없이 이 싸움의 연속선상에 있었다.

다니엘서 6장을 보면 다니엘은 정적들의 제거 대상이었다. 정적들은 다니엘을 제거하기 위해 30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는 법률을 만들었다. 이 법률은 오로지 다니엘이라는 한 사람을 제거하기 위해 만든 프레임이었다(단 6:7). 성경에 의하면 다니엘은 이 프레임이 자신을 죽이기 위해 만든 법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공포에 이성을 잃지 않았다. 자기 방식대로 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적당히 타협하지도 않았다. 30일만 기도를 멈추거나 비대면으로 예배하듯 피해가지 않았다. 스스로 그 프레임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그는 자기 집에 돌아가서 항상 하던 데로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6:10)고 한다. 우리 안목으로 보면 미련한 행동이다. 어쩌면 너무 율법주의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행동은 사자 굴에서 그 진실성이 입증됐다. 하나님은 사자굴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기적적으로 다니엘을 살리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프레임을 정적들의 무덤으로 삼으셨다. 프레임을 두려워하지 않고 진리 편에 서 있는 자를 하나님은 이렇게 보호하셨다.

예수님도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 의해 귀신 들린 자(요 8:52), 미혹하는 자(요 7:12),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마 11:19)이라는 프레임 공격을 받았다. 이런 프레임 앞에서 예수님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거나,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으셨다. 도리어 더 강력하게 말씀을 증거하셨다. 사람들의 평가나 정치적 공격을 의식하지 않으셨다. 오로지 하나님 앞에 부끄럼 없는 태도를 견지하며 스스로 프레임 안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였다. 그 과정은 고난이었지만, 결과는 부활이었다.

종교개혁자들도 동일한 길을 걸어갔다. 개혁자들은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 때문에 이단이라는 프레임을 뒤집어써야 했다. 또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 때문에 여자를 좋아하는 음란한 사람이라는 프레임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루터는 진실을 존중하고 진리를 증거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프레임이 두려워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도리어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며 프레임이라는 울타리를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의 결연한 태도는 보름스 종교재판에서 루터가 했던 최종 진술에 잘 나타난다.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들과 교회 회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어긋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달리 어떻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여기 제가 서 있습니다(Here I stand).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1)

루터의 이런 태도는 결국 로마 가톨릭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을 격파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프레임에 무너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프레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더 선명하게 나타났다. 지면 관계상 일일이 다 언급할 수 없지만, 이런 모습은 위대한 개혁자 칼빈에게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물론 이 말은 우리가 막무가내 식 행동을 해도 된다는 말이 아니다. 어찌하든지 적에게 오류와 틈을 보여서는 안 된다. 단지 정당한 주장과 권리를 쉽게 내주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할 소리를 해야 한다는 말이다. 무력한 복종과 침묵이야말로 프레임의 늪에 빠지는 지름길이다.

작금의 현실을 바라보면 과거에 기독교가 어떻게 복음으로 세상을 정복할 수 있었는지 잘 모르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이제까지 편하고 쉽게 종교생활 하던 상황에서 겪게 된 공포정치 앞에 무력한 실체를 드러낸 것일 수도 있다. 우리를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 한다.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은 ‘저항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런데 오늘날 프로테스탄트에게 ‘저항’은 낯설게 느껴지는 단어다. 프로테스탄트는 프레임 때문에 할 말을 못하는 무능한 존재가 아니었다. 도리어 복음 전파를 금지 시킬 때, 베드로와 요한이 했던 선언처럼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행 4:19)는 태도를 견지했다. 우리의 입을 막고 거짓을 은폐하며, 종교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람들을 향해 거칠게 저항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다.

누군가의 말처럼 자유는 결코 공짜가 아니다(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유지비용이 든다. 과거 한때 선조들이 비싼 대가를 한 번 치르면 그 자유의 효력이 영구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그 자유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우리 후손들도 정당한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마치 월세살이 같다. 다른 자유민주주의 선진 국가들이 누리는 자유도 여전히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작금의 미국도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정당한 유지비용을 지불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나라들의 시민의식은 뭔가 다르다. 특히 기독교인들의 의식이 다르다. 미국 펜스 부통령이 댈러스 제일침례교회에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미국의 기초는 자유입니다. 그리고 자유의 기초는 신앙입니다.”
(The foundation of America is freedom, and the foundation of freedom is fa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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