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뉴 노멀 시대 뉴 크리스천 되기

 

박동식 교수
박동식 교수

요즘 많이들 "뉴 노멀" 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새로운 현상'이 '일상'이 되어버린 것이지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대면보다는 비대면으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렇다면 "올드 노멀"이 진짜 노멀이고 "뉴 노멀"은 일시적 현상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말은 "뉴 노멀'이 지속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뉴 노멀 시대에 우리 기독교도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선교학자인 레슬리 뉴비긴의 말처럼 '복음은 변함이 없습니다만 세상은 변하고 있으니' 그 복음을 전하는 방식도 변해야 할 것입니다. 바뀐 상황에 복음의 형식이 발맞추어 가야 하는데 복음이 바뀌면 안 되죠. 그런데 그동안 교회가 사실 어떤 의미에서 반대로 성도들의 형편에 따라 복음을 변질시키지 않았나요? 그들의 삶이 부하여 기쁨과 평안의 설교만을 원하면 십자가와 진정한 복음 이야기보다는 복과 더불어 긍정적 삶의 태도를 더 강조했었지요.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철저한 복음의 왜곡일 것입니다.

복음의 본질을 붙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뉴 노멀 사회에 적응하며 살아야 할 교회와 우리는 "뉴 처치"와 "뉴 크리스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이상 우리는 늘 언제나 옛날만 그리워하는 "꼰대 교회"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 때만 이야기하는 "라떼 크리스천"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뉴new"는 변하는 시대에 카멜레온처럼 약삭빠르게 대처하는 그런 이미지가 아니라, 어떤 시대가 되었다 하더라도, 삼위일체 하나님을 고백하고 복음대로 살고자 하는 진짜 그리스도인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새로운 피조물"(고후5:17)이 아니겠습니까?

코로나 19 이후 이제 교회든 성도든 자신이 새로운 피조물인지, 진짜인지를 스스로 고민하고 답해야 합니다. 그동안 예배당 출석으로 성도인지 아닌지가 구분되었다면 이제는 정말로 자신의 삶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고 그분의 말씀 따라 사는 자가 '진짜' 그리스도인이고 '새로운' 그리스도인일 겁니다. 바울도 고린도 교인들에게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고 권면합니다. 우리 스스로 정말로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믿음 안에 있는지 질문하고, 만일 우리 자신이 정말로 그러하다면, 그것을 입증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믿고 안 믿고의 문제는 아닌 것 같습니다. 그 믿음 대로 사는지를 스스로 확증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보며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 믿으며 살아가기로 다짐하는 진짜 "남은 자"들이 있는 한 기독교와 교회는 희망이 있습니다. "나는 유수된 사람들이 희망을 먹고 산다는 것을 안다."(아이스킬로스) 코로나 19라는 전 지구적 억압적(?) 상황에 유수 된 자들로 살아가면서 우리 교회에 필요한 것은 "희망"입니다. 다시금 우리의 가슴을 뛰게 하고, 교회의 십자가 불을 밝히고, 교회 문을 열고, 서로를 맞을 준비를 하는 그런 희망을 갖고 살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교회와 더불어 세상을 회복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시다고 믿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도 하나님은 우리를 동역자로 사용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쓰임 받아야 하는데, 바울의 고백을 엮어 보면, '바울은 심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하나님이 자라게' 하셨습니다.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그러나 아무것도 아님을 고백합니다(고전3:7).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진짜 아무것도 아닌 것이 아니지요. 바울은 자신과 아볼로를 "하나님의 동역자들"(고전3:9)이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데 하나님의 동역자이죠. 우리도 '아무것도 아닌 하나님의 동역자'이니 교회와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회복하는 일에 동역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세상에 살아갈 때 소금과 빛이 되라 말씀하십니다(마5:13, 14). 빛과 소금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존재론적이며 실천적 상징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빛을 비추며 어떻게 짠맛을 낼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에게 교회에 오라 해서 주보 나눠주듯이 빛과 소금을 조금씩 나눠주면 될까요? 그렇게 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세상으로 나가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무엇이 더 세상을 밝게 할까요? 교회에 오는 숫자는 한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빛과 소금인 우리가, 교회가, 세상에 나가면 교회에 오는 이보다 더 많은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면 훨씬 더 세상은 밝아지고 훨씬 더 세상은 싱싱해질 것입니다. 이 상상이 현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인 기형도는 「나리 나리 개나리」라는 시에서 "봄은 살아 있지 않은 것은 묻지 않는다" 했습니다. 살아 있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살아 있기를 소망합니다. 코로나 19라는 겨울을 살아내어 다시 오는 봄에 꽃 피어 서로 안부를 물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꽃 이야기하니 갑자기 궁금하네요. '꽃은 왜 자신의 줄기 혹은 가지 끝에 필까요?' 조금은 안정적인 중간에 꽃 피지 않고 가장 많이 흔들리는 끝에 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잘은 모르겠지만, 꽃이 그렇게 말하는듯합니다. '바람아 아무리 불고 흔들어 봐라. 나는 네가 가장 많이 흔드는 곳에서 내 꽃 피운다.' 가장 많이 흔들리는 지점에 꽃이 피는 것은 꽃의 담대함이자 역설적으로 꽃의 아름다움일 겁니다.

코로나 19로 인해 세상도 교회도 흔들립니다. 그러나 교회는 중심을 잡아야지요. 꽃처럼 담대해야지요. 그리고 아무리 흔들려도 꽃 피워야지요. 이 기간이 지나면 교회도 다시금 꽃 필 날이 올 것입니다. 허술한 신앙이 이단이 활동하는 계기가 되게 할 수 있으니, 하나님 말씀에 굳건히 서서 단단하게 무장하고, 예수 십자가 바라보며, 성령의 도우심을 간구하며, 세상 속에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그런 그리스도인, 그런 교회 되기를 소망합니다. (끝)

박동식(미주장로회신학대학교 조직신학교수)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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