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원장
이효상 원장

저 출산율, 암 사망율, 음주 소비량, 양주 수입률, 교통사고율, 청소년 흡연율, 이혼율, 국가부채… 이런 각종 타이틀에서 손가락 순위권 밖으로 벗어나지 않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국내총생산(GDP)에 비해 국가부채, 가계부채 증가폭도 코로나19 위기 이후에 경고음이 더 크게 울렸다.

2019년 회계연도 국가결산 보고서를 보면 국가부채가 2019년도 1743조6000억 원으로, 그 전년보다 60조2000억 원이 늘면서 국민 1인당 1409만원 상당의 빚을 떠안고 전 국민이 3년 동안 한 푼도 안 써야 다 갚을 수 있는 상태이다. 국가채무 급증은 재정수지 악화로 국채 발행이 늘기 때문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재정안정 마지노선’인 40%를 넘어 41.4%로 치솟고 있다. 하지만 이는 향후 예상되는 6월 추경이 반영되지 않은 수치로 추경이 반영되면 국가채무비율은 더 높아질 전망이다. 늘고 있는 나랏빚, 경기 불황으로 세수마저 줄면 나랏빚은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게 된다. 국가채무에 국세마저 1조3000억 원 덜 걷히는 세수 결손까지 발생하는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다.

코로나 사태 이후 경제의 먹구름은 언제 걷힐지 아무도 모른다. 고용부가 발표한 ‘3월 사업체 노동력’ 발표에 따르면 3월 한 달 새 강제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가 59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렇듯 전 산업으로 번진 피해를 최소화하려면 앞으로 재정 지출은 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정부가 코로나 충격으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을 돕는 것은 마땅히 할 일이지만, 부유층에도 재난지원금을 뿌려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지난 해 본 영화 ‘국가부도’가 생각나면서,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불과 20년 전 1998년 IMF 현실을 소재로 ‘국가부도’라는 초유의 사태를 맞았던 상황을 그린 영화였는데 어찌나 실감나든지, 어떻게 예나 지금이나 현실을 그대로 직시하지 못하고 “아니다” “괜찮다”는 말만 되풀이 하는 것인지 참 모를 일이다. 모두들 힘들다 어렵다고만 하는데 당국자나 정치권만 여전히 괜찮다고 하니 도무지 무엇을 보고 괜찮다고 하는지 모를 일이다. 더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나서 깨닫지 말고 현실을 직시해야 할 시점이다.

정부는 6월, 3차 추가경정예산안 편성을 서두르고 있다. 1969년 이후 처음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이동제한 장기화에 따른 내수 위축과 전 세계적 경제 추락으로 인한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각국이 천문학적 재정을 투입하고 있는 게 ‘뉴노멀(New Normal)’이 되고 있다. 추경도 적정 규모를, 적기에 처리하는 게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어려울 때라도 재정 건전성 악화를 최소화하는 노력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재정 쓰임새가 커질수록 재정의 투명성과 건전성을 유지하는 노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중요한데 그 누가 감당할 것인가.

국민 혈세는 꼭 써야 할 곳에 써야 한다. 빚낸 돈을 자기 주머니 쌈짓돈 쓰듯 선심성으로 뿌린다면 국가 미래는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브레이크 없는 재정 질주 및 1당 독주는 미래전망을 어둡게 만든다. 그래서 ‘견제와 균형‘이라는 선명 야당의 역할이 더 기대된다. 하지만 이 지경이 되면 나라 살림을 관리하는 정부와 정치인이 무슨 대책이라도 내놔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6월 21대 개원국회는 나라 살림을 알뜰하게 운영하도록 여야 없이 지혜를 모으고 협치하는 새 풍속도를 기대하면서도 이미 두 차례 추경 과정에서 줄일 수 있는 부분을 최대한 쥐어짠 상황이겠지만 공기업 등 강도 높은 추가 세출 구조조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계속 적자 국채 발행만 늘릴 경우 통화 팽창과 국제 신인도 추락 등의 부작용이 예상된다. 정부투자 대부분 비생산적 혈세 낭비로 정부가 재정 지출을 늘릴수록 세금이 늘어나고 그만큼 민간은 새로운 투자 기회를 잃게 된다. 결국 정부의 확장정책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한 채 국가의 부담만 늘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런 만큼 정부는 512조원 규모의 슈퍼 예산에서 불요불급한 지출을 삭감하는 등 과감한 세출 구조조정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 나라 곳간을 맡은 정부의 책임 있는 자세다.

‘빚 살림살이’는 정부에서만 벌어지는 일도 아니다. 340개 공공기관의 부채는 지난해 21조원 이상 불어 사상 최대인 525조1000억원에 달했다. 당기순이익은 2016년 15조4000억원에서 6000억원으로 쪼그라들었지만 지난 4년간 임직원을 10만명이나 늘렸다. 경영이 얼마나 방만한지를 말해주는 수치다. 근거도 없고 기준도 애매한 나라빚 불리기는 정부나 공공기관이나 똑같다.

‘전시상황(戰時狀況)’이라는 대통령의 간곡한 발언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헌(改憲) 군불 때는 여(與)당은 개헌안 처리를 들고 나왔다. 어차피 재적 3분의 2를 얻어 국회를 통과하기는 힘들다. 국민들은 4.15 총선에서 개헌을 제외한 모든 권한을 여당에게 주었다. 그만큼 경제 위기극복과 책임정치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당부였다. 장차 개헌 논의를 한다고 하더라도 우선순위는 제왕적 대통령제 극복일 것이다. 지금 개헌 논의에 국력을 쏟을 여력이 없다. 경제 위기극복에 총력을 기울여도 부족할 판에 여당이 개헌 논의로 국력을 분산시키는 행동이나 궁리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장기집권을 대비한 권력의 오만함으로 비춰질 것이다. 대통령이 현 경제상태를 ‘전시상황’이라고 하는데, 여당은 왜 그렇게 반대로 가야 하나. ‘국민개헌발의’와 통합당 일부 의원들을 흔들어 보려는 꼼수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런 식으로 국론을 분열시키고 나라 두 동강 내는 진보의 폭주, 극단의 정치는 더 이상 안된다.

우리가 살면서 하는 걱정의 대부분은 아마 이런 돈 걱정일 것이다. 먹고 사는 문제라고 하지만 결론은 돈 걱정이다. 돈에 신경을 쓰고 걱정하고 힘들어하며 스트레스도 받지만 우리로 하여금 각성(覺醒;깨달아 앎)케 한다. 코로나보다 빚이 더 겁난다고들 한다. 코로나 충격 속에 서민들은 빚으로 버틴다. 실물경제 침체로 사회취약 계층은 생활고와 빚으로 살아간다. 민생경제가 응급상황에서 1700조 넘는 국가부채, 선심성 긴급재난지원금으로 과연 발등의 불은 꺼질까?

‘부익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양극화는 더 심각해진다. 어차피 70% 국민은 대출깔고 사는 서민이다. 빚 가운데서 빚으로 산다. ‘재난지원금’으로 인해 경기부양이라는 큰 도움이 되기보다는 어려움 당한 사람들에게 심리적 위로는 될 듯하다. 국가가 공짜 돈을 준다는데 싫어할 국민은 없겠지만,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느끼지 못할 정도로 배급과 할당 등을 공유하는 국가주도형 사회경제가 형성되고, 정부의 선심성 퍼주기 정책이 오히려 정부의 의존도만 높여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는 환상 속에 국민 스스로를 무기력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닐까. 경제 위기 극복을 핑계로 ‘묻지마 지원’은 안 되지 않을까. 우리 사회의 개인적 일자리 마련을 위한 노력의 엄중함과 노동 창의력 등이 상실되는 상황을 만들지 않는지 염려된다.

서민들은 일자리와 빚 상환 걱정뿐이다. 올해 1분기 파산신청이 5년 새 최다를 기록하고 있다. 국민도 돈이 없고 국가도 돈이 없다. 국민은 은행 이자내기 바쁘고 국가는 매년 늘어나는 국가부채를 부담스러워 한다. 이렇게 늘어난 빚은 누가 갚을 것인가? 향후 계속되는 적자 국채발행은 미래 세대가 떠안게 될 잠재적인 빚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선심성 퍼주기가 마냥 환영할 일만은 아니다. 정부와 여당은 4인가구 기준 최대 100만원의 지원금을 주는 대신 돈 많은 사람은 알아서 자발적으로 기부하라며 주었다. 재난지원금을 받지 않는 사람에게는 세액공제를 해주는 특별법까지 만들면서, 빚 낸 돈을 무차별 살포한다는 비판을 면하려는 황당무계한 ‘기부운동’을 벌였다. 첫 단추를 잘못 끼운 재정정책은 끝없는 ‘땜빵식’, ‘돌려막기식’으로 이어져 혼란을 부른다.

돈이 ‘빚’이 되면 어떻게 될까. ‘빚 진게 죄인’이라는 말이 있다. ‘죄인’되고, 자유함을 잃고 매이는 ‘노예’가 된다. 그래서 성경에는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빚의 대물림은 불행이다. 지금 우리는 후손들에게 너무나도 큰 빚을 안겨주고 있다. 이 기회에 ‘포퓰리즘 정치’에 맛을 들인 그리스 ‘국가부도’를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또한 아르헨티나도 부도국이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빚’ 가운데로 걸어가는 대한민국, 후손들에게 ‘빚’이 아니라 ‘빛’ 가운데로 걸어가게 해야 하지 않을까.

이효상 원장(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한국교회건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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