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목사
▲이선규 목사ㅣ금천교회

[기독일보=이선규 목사] 우리는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강절 세 째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이 절기의 주재는 ‘기다림’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다림이 빠진 주님의 오심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기다림으로 충만 할 때 만남의 기쁨이 더 커질 수 있는 것처럼 주님의 오심을 대망하는 일이 없다면 감격적인 만남은 기대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전심으로 기다린다면 주님의 오심은 우리에게 더 없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어떤 의미에서 기다림의 연속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일을 기다리고 내게 주시는 말씀을 기다리고 응답을 기다리고 은혜를 기다리고 주님의 나라를 기다리고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기대하고 사모하고 바라는 마음이 얼마나 큰 가에 따라서 우리의 신앙 더 풍성해 질 수 있고 주님의 능력도 체 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에는 기다림을 주제로 한 비유의 말씀들이 기록 되어 있습니다. 35-38절까지는 주인을 기다리는 종의 비유, 39~40절 집 주인의 비유, 그리고 41절 이하는 선한 종과 악한종의 비유를 통해서 주님의 오 심을 기다리는 성도들의 자세와 행동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들의 공통점은 한 마디로 말해서 ‘기다림’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기리는가? 무엇 때문에 기다려야 하는가? 또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가?

신앙생활에 성공하려면 기다림에 성공해야 합니다. 다른 기다림은 다 실패 했다고 해도 다시 오시는 주님을 기다리는 일에는 실패하지 않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누구나 처음 시작 할 때는 열정적으로 기다립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기다림에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다리다가 약속시간을 어기고 시간을 지체 하거나 연기 할 경우 기다림에 대한 영정이 식어 지면서 점차 실망으로 바뀔 것입니다.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기다려야 하느냐가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기다림에 실패하는 이유가 주님의 때가 아니라 나의 때를 기다리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주님의 때에 맞추어 있어야 합니다.
나의 성공의 때 출세의 때가 아니라. 주님의 오심에 우리의 모든 시선을 집중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 멋대로 판단하여 주님의 때를 무시해 버리기 일 수입니다. 주님의 때와 내 때가 서로 상충 할 때 과연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내 때를 접고 주님의 때를 먼저 택할 줄 알아야 합니다. 불충한 종은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할지 모릅니다. 주님이 먼 길을 갔으니 돌아오려면 한참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동안 무엇을 해야 하나 하고 싶었던 일이나 실컷 해보자. 주인이 시키지도 않은 일을 제 멋대로 하다가는 주인이 귀환 하는 날 큰 낭패를 당하게 될 것입니다.

내 때가 아무리 그럴듯해 보이더라도 언제나 주님의 때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다림에 실패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기다기가 힘들고 지친다는 것입니다. 주인이 빨리 오셨으면 좋겠는데 왜 이렇게 더디냐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조급증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습성 때문에 원하는 목표를 빨리 이룰 수도 있지만 이로 인해 많은 것 들을 잃어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 빨리 빨리 해서 잘 되는 게 뭐가 있습니까? 건물이 무너지고 다리가 붕괴되는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이번 서해대교 사고를 두고도 건립 과정에 문제가 있지 않았나 의구심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빨리 빨리 부자 되고 빨리 성공하고 출세하면 좋을 것 같으나 이 빨리라는 말 속에는 항상 부 실과 거짓이 내포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무리 빨리 완공을 했더라도 기초가 부실하면 얼마 가지 않아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빨리 가겠다고 과속하면 오히려 천천히 가는 것 보다 못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아무리 급해도 밥이 되려면 뜸이 들기까지 기다려야 합니다.

요즘 핸드폰이 얼마나 빨라졌습니까? 전철 안에서든 버스 안에서든 화장실 안에서든 단추만 누르면 바로 통화가 터집니다.

이젠 전화기가 사람을 가만히 놓아두지를 않습니다. 옛날에는 전화 한번 울리면 무슨 소식일까? 궁금하고 기대가 되었는데 요즘에는 신경질부터 냅니다.

무슨 일이든지 빨리 빨리하면 좋을듯하지만 여기에는 인생을 망치는 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믿는 자들도 세상 사람들 보다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어떤 의미 에서는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심합니다. 매사 잘 참지 못해 해 손해를 보거나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통에 속이 상하는 여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나에게 인내의 은사를 주세요. 내 힘으로는 할 수 없으니 성령의 능력으로 역사해 주세요’라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덧붙였다고 합니다. “지체하지 마시고 지금 즉시 당장 주세요.”

우리의 기도가 이와 같지 않습니까? 신앙이란 오랜 세월을 거쳐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당장 해 달라가 있습니다. 말세의 특징 중 하나가 조급 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기다림에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끝이 이렇게 될 것이다. 결말이 이렇게 날 것이다. 라는 분명한 확신이 있으면 아무리 시간 이 들어도 끝까지 잘 견디어 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말이 불확실 하면 기다리는 것이 어려워집니다. 아무리 어려운 문제라도 해답을 알고 있으면 끝까지 참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렇다면 기다림에 성공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어 있어야 합니다.

37절입니다. 40절 ‘예비하고 있으라. 깨어 있으라.’ 이 말은 경각심을 가지고 주의를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한순간에 기다림의 대상이 뒤 바뀌는 일이 생깁니다. 이 세상의 성공이나 출세나 돈으로 바뀌는 순식간입니다.

영적으로 무기력해지고 나타해지고 게으르면 기다림의 대상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뒤 바뀌어 버립니다.

문제는 바뀐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깨어 있으면 아무리 어려운 상황이 벌어져도 즉각 대처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등불을 켜고 있으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 너무나도 어둡다고 야단입니다. 이리 갈까 저리 갈까 하면서 방황해야만 하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이런 시대에 등불을 켜들고 서있어야 할 사람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곧 나 자신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도 중요 하지만 나 자신이 여호와 하나님의 축복 속에 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하며 나의 영혼이 요한 3서2절에 말씀 하신대로 잘 되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의 등불을 켜고 있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에게만 믿음을 가지라고 권하는 것은 잘못 된 일입니다.

이 등불은 최후의 만찬이 이루어 질 때까지 켜져 있어야만 하는 등불입니다. 종이 주인을 만나는 것은 가장 귀중한 만남입니다.

생명을 살게 한자와의 만남이요 보호해 주신 은인의 만남입니다. 어떤 사람이 머슴살이를 3년이나 하고나서 주인에게 세경을 달라고 애원 했습니다. 주인은 그 종의 성실함을 보고 기뻐하는 종이었습니다.

주인이 하는 말이 ‘내가 세경은 줄 것이나 앞으로 3개월만 우리 집을 위하여 일해 주게나.’ 그 일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 집에 큰 액운이 찾아온다고 하니 등불을 들고 대문에 서있으면 되는 것일세. 머슴은 주인으로 부터 기름 한통과 등불을 받아들고서 대문 곁에서 충성스럽게 지키기를 시작 하였습니다.

한 달이 지나자 기름이 동이 났습니다. 주인에게 기름이 떨어졌으니 다시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름 통 밑에 열쇠가 있으니 그것을 가지고 집안에 있는 여러 개의 자물쇠로 문을 을 열고 그 안에 있는 다 자네의 것이니 무조건 가지라는 것 이였습니다.

머슴이 방문을 열었습니다. 그리하여 머슴은 그 집에 사위가 되었습니다.

진실과 성실의 등불을 켜들고서 일하던 머슴을 좋게 보아서 인간대접을 해주는 일로 그가 미 국 에 가서 건너가서 공부를 한 동신교회 이 회신 권사의 남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 등불은 깨어 있으면서 켜들고 서있어야만 하는 등불입니다.

등불을 켜들고 서 있으라. 이 말의 의미는 잠자는 상태가 아니라 깨어있는 상태를 말합니다.
서 있는 상태는 행동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반면에 잠자는 상태는 행동이 정지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등불만 환하게 켜놓고 그 옆에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른 채 잠만 자고 있다면 등불의 의미는 엄청나게 달라지고 맙니다. 환하게 켜져 있는 등불 밑에서 사랑하는 님을 즐겁게 만나야 합니다.

서 있다는 의미는 언제나 예비하는 지혜를 가지고 있을 것을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언제인지 분명히 알 수는 없지만 그 시대를 보아 분별 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는 계절의 추이를 느끼기 위하여 먼 하늘을 처다 볼 필요는 없습니다. 눈앞에 서있는 한 그루의 나무 가지만 보아도 지금이 어느 철인지 잘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찬 가지로 우리는 하늘보고 분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병든 자의 상태를 잘 보면 어느 때에 임종하게 될는지 짐작 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시대를 분별 한다는 것은 이러한 말세적 징조가 나타날수록 더욱 자신의 신앙을 돌아보고 시대적 사명에 자각하여 복음 운동에 열심을 다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속 주의의 거대한 물결이 도도히 흐르는 이 시대에 복음의 기치를 높이 들고 그 흐름을 거슬러 오르려는 자각과 용기 그것이 바로 시대를 분별하는 삶의 첫걸음일 것입니다.

시대는 변해도 우리가 켜들고 서 있어야하는 등불이 마지막 등불이 되어야 합니다. 기다리는 사람의 축복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우리가 주님께서 맡겨준 사명에 충실하며 기다릴 때 우리를 영광의 보좌 앞으로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그 보좌에 우리를 앉혀 주실 뿐만 아니라 지극 정성으로 영접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지막이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기다림의 끝이 어떠하기를 바라십니까? 그냥 흐지부지 하게 끝나서야 되겠습니까? 뜨거운 만남도 없이 막을 내린다면 얼마나 허망하겠습니까? 우리의 기다림은 오실 때까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성령으로 찾아오시는 2015년도의 성탄을 기쁨과 감격으로 맞이하는 여러분들 다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 하십니다.

“주인이 이를 때에 이같이 하는 것을 보면 그 종들은 복이 있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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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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