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헐버트는 한국의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가재를 팔고 친구의 주머니를 털었다. 그는 한국의 비극을 손님으로 구경한 사람이 아니라 그 비극에 스스로 동화되어 한국과 더불어 고행을 자청한 역사의 양심이었다. 나는 마땅히 헐버트 박사의 기념비를 세워 우리 민족의 사표로서 앙모하고 싶다"

[기독일보 오상아 기자] 이 글은 해방 후 초대 내무부장관을 지낸 독립운동가이자 정치가인 윤치영이 1972년 12월 19일자 대한일보에 기고한 '헐버트 박사-나의 교우록'이라는 글이다.

안중근 의사는 1909년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고 여순감옥에서 헐버트 박사에 대해 일본 경찰에 '헐버트는 한국인으로서는 하루도 잊을 수 없는 인물'이라고 공술(供述·진술)하기도 했다.

▲헐버트 박사 65주기 추모식이 12일 백주년기념교회 선교기념관에서 진행됐다.   ©오상아 기자

이처럼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파란눈의 한국혼'으로 불렸던 독립유공자이자 선교사였던, 한글학자이고 역사학자, 교육자이자 언론인이었던 호머 헐버트 박사(Homer B. Hulbert)의 65주기 추모식이 12일 오전 11시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내 백주년선교기념관에서 진행됐다.

이날 추모사를 전한 광복회 박유철 회장은 "헐버트 박사님은 일제에 맞서 우리 민족이 자주독립을 찾는데 평생토록 기여하신 참으로 은혜로운 분"이라며 "을사늑약 직후, 미 국무장관과 대통령을 만나 을사늑약의 무효와 우리 민족의 자주독립을 주장했으며, 저서를 통해 일본의 야심과 야만적인 탄압을 폭로하는 등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앞장 서셨다"고 소개했다.

박 회장은 "외교자문관으로 고종황제를 보좌하시다가 1907년 헤이그 세계평화회의 참석을 도모하려는 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헤이그 밀사 3인을 적극 도우셨으며, 헤이그 현지로 가서 각국 외교관들과 언론의 협조를 구하여 을사늑약의 무효 주장과 우리나라의 국권 회복을 호소하는데 3인의 특사를 도와 큰 역할을 했다"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 일로 인해 일제의 미움을 사게 된 박사님께서는 이후 한국에 들어오시지 못하고 고국인 미국에 머물러 계시면서 신문기고와 강연 회의 참석을 통해 한시도 쉬지 않으시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역설하는 정의롭고 양심 있는 행동을 멈추지 않으셨다"고 전했다.

박회장은 이어 "특히 1919년 3.1 독립운동 직후에는 미 상원 외교위원회에 일본의 잔학상을 고발하셨으며 '대한제국멸망사'를 집필, 우리의 민족정신이 살아 있음을 전 세계에 알리셨다"며 "우리나라가 광복 되었다는 소식에는 '이는 정의의 인도와 승리이며, 나의 조국이 독립된 것이나 마찬가지'라며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당시 재임한 대학의 제출논문에도 '나는 한국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위해 싸워왔으며 한국인들에 대한 사랑은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가치'라고 쓰셨다"고 한국에 쏟은 노력을 강조했다.

그리고 헐버트 박사의 평소 소원이었던 한국 땅에 묻히게 된 사연에 대해서도 소개하며 "박사님은 우리 정부의 초청으로 1949년 815 경축식에 참석키 위해 내한하셨다가 광복절을 며칠 앞두고 서거하셨다"고 알렸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원 내 헐버트 박사의 묘가 화환들에 둘러싸여 있다.   ©오상아 기자

행사를 주최한 사단법인 헐버트기념사업회 김동진 회장은 헐버트 박사의 삶을 '23살의 나이에 미지의 세계 조선 땅에 와서 오직 한민족을 위해 일생을 바친 삶'으로 요약했다.

김동진 회장은 "모든 것이 낯설었던 조선 땅에서 박사님은 용기와 인내로 한민족 사랑을 싹틔웠고, 국제적 미아가 된 한국을 위해 한시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고 강조하며 "항상 미래지향적이셔서 1910년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자 미국 언론을 통해 '한국은 50년 내에 나라를 꼭 되찾을 것이다'고 한민족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었다"고 강조했다.

특히 "박사님은 을사늑약 직후 '한국은 루스벨트 행정부의 친일정책 때문에 일본에 나라를 빼앗겼다. 미국은 한국을 독립시킬 의무가 있다'며 심지어 자신의 모국인 미국을 맹비난하면서 정의의 편에 섰다"고도 소개했다.

그는 "국가대혁신이라는 중차대한 과제가 놓인 이 시점에서 박사님의 삶은 우리에게 좋은 교훈이 될 것이다"고 덧붙히기도 했다

또 김 회장은 "한국의 문명 진화와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박사님의 거룩한 한국사랑과 참된 가치관의 삶을 많은 국민들이 알지 못해 안타깝다"며 "이제라도 기념관을 세워 국민들에게 박사님의 공적과 정신을 알리고 미래 한국을 책임질 청소년에게 올바른 가치관과 미래지향적 세계관을 심어주어야 할 것이다"고 강조했다.

▲양화진선교사묘원 내 헐버트 박사의 묘 앞에 세워진 헐버트 박사를 소개하는 팻말 앞에 꽃다발이 놓여 있다.   ©오상아 기자

안중현 서울지방보훈청장은 이날 추모사에서 헐버트 박사의 교육자와 언론인, 역사가로서의 면모를 먼저 소개했다. 안 보훈청장은 "23세였던 1886년 육영공원의 영어교사 자격으로 처음 내한하여 근대식 교육제도를 도입하셨으며, 1891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한글 교과서인 '사민필지'를 만들어 한국인에게 서방세계를 알리고, 1897년 서재필을 도와 최초의 한글신문인 독립신문을 창간했다"며 "또 한국역사와 문화에 대한 애정으로 집필하신 '한국사' 등의 다양한 역사서는 한국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밝혔다.

덧붙여 정청래 국회의원은 "주시경 선생님과 함께 한글 연구를 하시며 우리글에 이전에 없던 '띄어쓰기'와 '점찍기'를 도입했고, 고종에게 건의해 국문연구소를 만드는 등 한글을 널리 알리고 가르치는데 큰 역할을 했다"며 또 "아리랑을 서양음계로 오선지에 채보해 한국에 대해 음악을 사랑하는 나라로 소개하기도 했다"고 소개했다.

덧붙여 "최근 많은 청년들 사이에서 헐버트 박사의 독립정신과 한글 사랑을 기리고 계승하는 모임들도 생겨나고 있다"고 전했다.

그러면서 정 의원은 "이러한 헐버트 박사의 노고와 공로가 널리 알려진 것도 얼마 되지 않는다"며 "헐버트 박사가 작년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된 것도 지난해 헐버트 박사에 대한 재조명이 뒤늦게 이루어지면서 가능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헐버트 박사에 대한 기념비 및 기념 조형물은 작년 8월 13일 문경새재 옛길 박물관에 세워진 '문경새재 헐버트아리랑 기념비'와 작년 12월 한글마루지 사업의 일환으로 한글발전에 공헌한 헐버트 박사의 기념 조형물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주시경마당에 건립된 것이 있다.

문경새재 헐버트 아리랑 기념비에는 헐버트 박사가 채보한 '아리랑' 악보와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나간다'는 가사가 새겨져 있다.

또 주시경마당에 건립된 기념 조형물에는 '한글과 견줄 문자는 세상 어디에도 없다'고 한글의 우수성을 평한 헐버트 박사의 말이 새겨져 있다. 이 조형물은 주시경 선생님의 기념 조형물과 함께 건립됐다.

헐버트기념사업회는 최근 헐버트 박사가 1905년 11월 미국의 'The World's Work'라는 월간지에 한국의 철길에 관해 기고한 글을 미국 미시건주립대학교 메이 교수의 도움으로 발굴했다고 소개했다. 이 글에는 또 노량진에서 바라본 한강철교와 경부선 남쪽 종착지인 부산의 전경을 담은 사진도 첨부됐다.

헐버트 박사는 이 글에서 철도를 닦는 과정의 어려움과 일본 기술자들의 행패를 상세히 담았다고 기념사업회 측은 알렸다.

이외 이날은 서울경찰악대가 아리랑을 연주하고 김종택 한글학회장, 박홍섭 마포구청장이 인사말을 하기도 했다. 또 칼 슈츠(Karl T. Schutz)는 '한국인들에게 보내는 감사인사'를 보내기도 했으며 김영헌 기독교대한감리회 서울연회 감독이 기도했으며 '헐버트 박사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경복고등학교 1학년 배장환 학생이 낭독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는 헐버트기념사업회 주최로, 국가보훈처 광복회 독립유공자유족회 마포구청 후원으로 진행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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