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대 박준철 교수   ©한성대

면벌부, 가톨릭 역사의 오욕

종교개혁 오백주년이 불과 4년 앞으로 다가왔다. 천 오백년 간 단일 체제를 유지해 온 서유럽 기독교 세계를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양분시킨 종교개혁의 단초는 이른바 '면벌부(免罰符)'라는 증서였다. 면벌부는 오늘날 가톨릭교회에서 '대사(大赦)'라는 용어로 지칭되는 특별사면에 그 뿌리를 두고 있고, 대사의 기원은 11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베드로의 후계자이자 신의 지상(地上) 대리인으로 자처한 교황들은 이 시기를 즈음하여 죄를 범한 신자들이 수행해야 하는 참회고행(또는 보속)을 특별한 경우에 사면해주는 일종의 특혜를 베풀곤 하였다. 대사가 최초로 시행된 시점은 1095년이었다. 당시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성지탈환을 위한 십자군 전쟁의 시급성과 당위성을 만천하에 역설하면서 참전 군인들에게 그들이 범한 죄에 부과되는 참회고행을 사면해주었다. 우르바누스가 그 효시를 이룬 대사는 그 후 교황들에 의해 점차 보편적 관행으로 자리 잡았다.

대사는 교황의 특권이었지만 교회법적 근거가 결여되었다는 치명적 약점을 안고 있었다. 이 심각한 사안에 부심해 온 교황청은 대사가 시행된 지 약 250년이 지나 마침내 문제해결의 열쇠를 마련하게 된다. 1343년 교황 클레멘스 6세가 일종의 교회법으로 간주되는 교서를 공포하여 대사를 가톨릭교회의 공식제도로 승격시킨 것이다. <우니게니투스(Unigenitus)>라는 제목이 붙은 이 교서는 교황이 베푸는 특별사면에 합법적 입지를 부여함으로써 신자들에 대한 교황의 권위와 위상을 한층 제고하였고, 대사는 이제 중세 사람들의 일상적 신앙생활에 보다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대사는 중세 기독교인의 신앙생활에서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던 고해성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죄의 사슬에 예속되어 있고 따라서 끊임없이 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다는 인간관에 토대를 두고 있는 고해성사는 일상생활에서 반복되는 죄를 씻어내는 공식적 통로였다. 고해성사에 참여하는 자가 자신의 과오를 고백하고 이를 진정으로 뉘우치면 고해신부는 신을 대신하여 그 죄를 사해 준다. 그러나 죄가 사해진 후에도 죄의 대가로 감수해야 하는 벌은 남는다. 이 벌은 신자들이 천국에 이르기 전 경유하는 연옥에서 감당해야 할 몫이지만, 이를 현세에서 대신하는 것이 참회고행이다. 참회고행은 죄의 경중에 따라 고해신부가 다양하게 부과하였다. 성지순례, 금식, 철야기도, 자선금 기부 등은 가장 일반적인 참회고행의 형태였다. 이 참회고행을 면제해 주는 것이 바로 대사였던 것이다.

클레멘스 6세의 교서 <우니게니투스>를 통하여 신학적 명분과 교회법적 근거를 갖추게 된 대사는 중세 말에 이르러 본래의 취지에서 일탈하여 다양한 모습으로 오남용 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부작용은 대사가 교회의 재원확보에 이용되었다는 점이다. 점차 비대해지는 교회조직을 원활하게 유지해야 했고 한편으로는 화려한 생활을 즐겼던 르네상스의 교황들은 안정적 재정구축에 심혈을 기울였고, 이를 성취하기 위한 일환으로 면벌부를 판매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 증서를 구매하면 죄에 수반되는 벌, 즉 참회고행이 면제되었고, 이는 결국 대사를 금전적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모순을 낳고 말았다. 1476년 교황청이 내린 결정은 사태의 심각성을 더욱 가중시켰다. 교황 식스투스 4세는 당초 현세 사람들에게 국한되었던 면벌부의 적용범위를 이미 사망하여 연옥에서 벌을 감당하고 있는 영혼들에까지 확대하였다. 이제는 누구든지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부모와 친척들을 위한 면벌부를 구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대사의 진의 왜곡과 교회의 난맥상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1515년 3월 교황 레오 10세가 교서공포를 통하여 단행한 면벌부 판매였다. 장엄한 자태를 뽐내는 성 베드로 성당의 재건축 비용을 조달하기 위한 목적으로 등장한 이 면벌부는 1517년 초 체계적이고 엄중한 정책 하에 판매가 시작되었다. 판매를 위한 다양한 인적 네트워크가 구축되었고, 이들에게는 세부적 지침이 하달되었다. 면벌부 구매의 당위성을 알리는 설교가 곳곳에서 울려 퍼지면서 대중의 구매욕을 부추겼고, 판매를 방해하거나 이의를 제기하는 자는 처벌되었다. 로마 교황청은 수입증대라는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였지만, 면벌부 판매는 대사의 본질을 심각하게 훼손시키면서 가톨릭교회를 전례 없는 궁지로 몰아넣고 말았다. 점차 일그러져가는 대사의 관행에 우려와 비판의 목소리가 퍼져갔고, 이를 현장에서 목격한 마르틴 루터는 유럽 기독교세계에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선행에 의한 구원'과 성직자의 권위

'성 베드로 성당 면벌부'는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 면벌부 구매를 촉구하는 설교와 선동이 봇물을 이루면서 대대적인 구입 열풍이 불어 닥쳤고, 판매가 금지된 지역의 주민들마저 판매가 성황을 이루고 있던 지역으로 "미친 듯이" 건너가 자신들과 고인들을 위해 기꺼이 호주머니를 열었다. 현장에서 면벌부 판매를 총괄하고 있었던 한 수도사는 성공적 과업수행의 대가로 엄청난 호사를 누리기도 하였다.

면벌부가 민중들로부터 대단한 호응을 유발할 수 있었던 근본적 이유는 무엇인가? 많은 신자들을 면벌부에 그토록 집착하게 한 종교적 메커니즘은 과연 무엇인가? 그것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모든 규범을 지배해 온 구원론에 기인한다. 유구한 세월을 통해 정립된 가톨릭 구원론에 따르면, 구원의 필수조건 가운데 하나는 신과 이웃을 위한 자발적 선행이며, 가장 중요한 선행은 다름 아닌 성사에 참여하는 일이다. 성사준수를 비롯한 인간의 선행은 신으로부터 그 가상함을 인정받아 결국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선행에 의한 구원'이라는 으뜸원리 하에서 성사는 신앙의 핵심으로 등극하였고 필적할 수 없는 가치와 위상을 누리게 되었다. 특히, 1215년 제 4차 라테란 공의회가 모든 기독교 성인(成人)에게 적어도 1년에 1회 이상 의무적 수행을 규정한 고해성사는 선행 축적의 첩경으로 부각되었다. 그렇다면 면벌부 구매는 참회고행을 이행한 셈이고 나아가 고해성사를 완수한 것이며 이는 결국 구원성취의 한 방편이 되는 것이었다. 요컨대 면벌부 판매가 남다른 호응을 누린 것은 재원확보라는 절실한 과제를 해결하려는 교황청과 금전적으로 구원을 성취할 수 있다는 민중들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인 것이다.

현대인들의 관점에서 전혀 수긍하기 힘든 면벌부 매매가 가능했던 또 다른 이유는 범접할 수 없는 성직자의 권위와 권력이었다. 이 역시 '선행에 의한 구원'에 입각한 성사중심주의에서 비롯되었다. 구원성취를 위해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성사의 집전은 성직자들의 독점적 권한이었기에 그들은 평신도 위에 군림하곤 하였다. 중세인의 삶은 사제가 주재하는 영아세례와 함께 시작되고 세제의 축복기도가 이루어지는 종부성사로 끝을 맺는다. 성체성사의 영성체는 사제의 축성(祝聖)없이는 예수의 살과 피로 변화할 수 없으며, 1184년부터 남녀 간의 결합은 사제가 집전하는 혼배성사 없이는 거의 불가능하였다. 사제는 신자들이 고백하는 죄를 신을 대신해서 용서하고, 죄의 경중을 판단하며, 그 판단에 따라 적절한 참회고행을 명령하였다. 요컨대 성직자는 천상의 낙원을 향한 신자들의 여정을 인도하는 주체였으며, 결국 성직자의 도움 없이 구원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성직자의 수장인 교황이 교서를 통하여 제정하고 수시로 접하는 일선의 사제들이 교회와 거리에서 독려하는 면벌부의 구입을 외면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면벌부는 성직자의 종교적 권력이 부당한 목적과 일탈된 방법에 결탁되어 낳은 가톨릭 역사의 오점임에 틀림없다.

얼룩진 과오를 반복하는 한국의 개신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든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공유하는 대명제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가 깨달은 이신칭의론(以信稱義論)이다. 인간은 그 태생적 한계로 인해 신으로부터 인정받을 만한 선행을 결코 수행할 수 없고, 오히려 구원은 예수를 구세주로 인정하는 믿음을 가질 때 주어지는 신의 은총이자 선물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성사준수는 더 이상 구원의 조건으로 인정되지 않게 되었다. 한편 이신칭의론은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에서도 중대한 변화를 이끌어 내었다. 성사의 준수가 이제 구원과 무관한 별개의 범주에 속한 것이라면, 성사를 집전하면서 평신도 위에 군림해 온 성직자의 위상과 의미는 격하될 수밖에 없었다. 사제는 더 이상 구원의 중개자가 아니며, 영생은 개인의 독자적 믿음만으로 도달 가능한 영역이므로 모든 신자는 스스로 자신의 사제가 된다는 새로운 교리가 대두되었다. 이른 바 만인사제주의(萬人司祭主義)는 프로테스탄티즘의 또 다른 핵심교리로서 신 앞에서 성직자와 평신도는 영적으로 평등하다는 혁명적 이념을 낳았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일신한 이신칭의론이 영적 자유를 지향하였다면, 성직자와 평신도의 관계를 재규정한 만인사제주의는 영적 평등을 표방한 것이다.

장구한 세월의 건너편에서 벌어졌던 일들을 지금까지 장황하게 거론한 이유는 종교개혁 오백주년을 눈앞에 둔 한국 개신교의 모습이 참담하기 그지없기 때문이다. 교회가 사회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걱정해야 하는 기묘한 상황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종교개혁사를 연구한 학자에게 정녕 감내하기 어려운 아이러니로 다가오는 것은, 이 땅의 개신교 문화가 프로테스탄티즘의 한 태동원리였던 만인사제주의에 정면으로 역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의 대한민국 개신교 성직자의 상당수는 마치 오백년 전 면벌부를 판매하던 가톨릭 성직자들처럼 구원의 중개자를 자처하면서 종교적 권력을 남용하고 또한 이러한 자기모순적 현상에 안주하고 있다. 자신의 기도를 만병통치약으로 착각하는 성직자들이 즐비하고, 웬만한 결격사유로는 담임목사와 당회장 직위가 정년까지 이어지는 사태를 좀처럼 막을 수가 없으며, 엄연히 실정법을 위반했음에도 성직자는 세속의 잣대로 재단해서는 안 된다는 시대착오적 발상이 일부 성직자 집단에 도도히 공유되고 있다. 성직자에 대한 비판은 주제넘고 불경스러운 행태로 인식되기 일쑤이고, 많은 성직자는 여전히 세금에 있어서 특별계급이다.

프로테스탄티즘의 선구자들이 그토록 타파하고자 했던 성직자중심주의를 오히려 고스란히 답습하고 있는 우리의 개신교 문화의 일그러진 자화상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서나 가능한 직위세습이 일부 대형교회에서 버젓이 자행되고 있다. 단일교회로는 지구상에서 최대교인수를 자랑하는 교회의 전 당회장은 교인들의 피땀 어린 헌금을 자식의 회사를 위해 사용하여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의 배임죄로 실형을 선고받았다. 강남의 노른자위 땅에 성 베드로 성당을 연상시키는 예배당을 소유한 교회의 담임목사는 박사학위논문을 표절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숙기간 6개월 만에 강단으로 복귀하였다. 상아탑이었다면 그 정도의 논문표절은 해임이나 파면을 불러왔을 텐데 말이다. 그가 일종의 대포통장을 이용했는지의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배임과 횡령의 혐의마저 받고 있는 사실에 좌절은 더욱 깊어진다. 온 국민에게 트라우마를 넘어 가해자 의식마저 남긴 세월호 사건의 이면에도 성직자중심주의가 득세하고 있다. 일명 '구원파'로 불리는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공동체에서 유병언이라는 한 개인은 필설로 형용할 수 없는 제왕적 권력과 권위를 향유하고 있다. 천인공노할 범죄를 저지른 그의 도피행각을 돕고 있는 신자들의 내면에는 성직자중심주의가 깊이 각인되어 있음이 분명하다. 권력과 재물과 영화는 아침 안개와 같이 허망하고 부질없는 것이라고 교인들을 향해 목 놓아 외쳤던 이들이 온 세상에 드러낸 이율배반과 후안무치를 견뎌낼 재간이 도무지 없다. 한국의 개신교 문화에 넘실대는 교회의 사유화와 성직자의 과도한 권력은 바로 교회 구성원의 평등을 지향한 만인사제주의라는 개신교 본연의 정신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면벌부 판매로 얼룩졌던 기독교 역사의 과오가 재현되는 현 시점에서 종교개혁 오백주년은 한국 개신교에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그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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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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