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신대학교 학술원 신학연구소가 16일 오전 한신대학교 서울캠퍼스 컨벤션홀에서 ‘송암 함태영 목사의 삶과 목회, 그리고 신학’을 주제로 제1회 효촌 강좌를 개최했다.
효촌장학위원회(위원장 배태진 목사)의 후원으로 마련된 이번 강좌는 독립운동가이자 목회자, 대한민국 제3대 부통령을 지낸 송암 함태영 목사(1873~1964)의 생애와 활동을 정치사·교회사·신학적 관점에서 살펴보기 위해 기획됐다.
함태영 목사는 대한제국 시기 법관으로 활동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3·1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렀다.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발전과 신학교육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에는 심계원장과 부통령을 역임했다. 한국신학대학 학장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장 등도 맡았다.
강좌는 이영미 한신대학교 신학연구소장의 사회로 진행됐으며, 강성영 한신대학교 총장이 환영사를 전했다. 이어 이훈삼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총무, 배태진 효촌장학위원회 위원장, 함재봉 한국학술연구원 원장이 축사를 맡았다.
강 총장은 환영사에서 함태영 목사의 생애를 목사와 부통령, 한국신학대학 학장, 교단 총회장이라는 네 가지 역할을 중심으로 살폈다. 그는 함 목사가 법관으로서 정의를 지키고 목회자로서 교회와 민족을 위해 활동했으며, 국가 지도자로서 청렴과 양심을 중시했다고 평가했다.
또한 함 목사가 조선신학교 설립과 운영에 참여하고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서 신학교육의 기반을 마련한 점을 언급하며, 그의 생애를 통해 한신대학교의 창학 정신과 한국교회의 역사적 역할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정무용 교수, 함태영의 해방정국 정치활동과 제1공화국 시기 행보 분석
첫 번째 발제에 나선 정무용 한신대학교 교수는 ‘송암 함태영의 한국 현대 정치사적 위상’을 주제로 함태영의 해방 이후 정치활동과 제1공화국 시기 공직 수행을 분석했다.
정 교수는 함태영이 대한제국 시기 법조인으로 활동하고 일제강점기 3·1운동에 참여했으며, 해방 후 대한민국 부통령을 지낸 인물이지만 그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다룬 연구는 상대적으로 부족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함태영의 정치적 행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해방 직후 건국 과정과 제1공화국의 정치적 상황을 함께 살펴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함태영이 정치적 판단과 선택에 관한 기록을 많이 남기지 않은 만큼, 당시 정치 환경과 그가 참여했던 조직을 중심으로 정치적 입장을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 교수는 해방 직후 함태영이 조선기독교 남부대회를 통해 기독교 조직 재건에 참여하는 동시에 건국을 둘러싼 정치활동에도 나섰다고 설명했다. 함태영은 초기 한국민주당 결성에 가담했으며, 이승만 귀국 이후에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참여했다.
1945년 12월에는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 회장을 맡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지하고 민족통일과 독립을 촉구했다. 이후 김구가 주도한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에도 참여했으며,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 등 건국 과정에서 구성된 정치조직에서 활동했다.
정 교수는 이러한 행보를 토대로 함태영이 이승만과 김구 사이에서 통합 또는 중재를 지향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했다.
다만 그는 “그가 내세운 통합의 범위는 어디까지나 진영 내에서 머물렀다”며 함태영의 정치활동이 주로 우익 진영 내부에서 이뤄졌고, 당시 추진된 좌우합작운동과는 거리를 두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함태영의 공직 활동도 살폈다. 함태영은 1949년 제2대 심계원장에 임명돼 공직자의 윤리와 청렴을 강조했으며, 국가 재정의 관리와 감찰 업무를 수행했다.
정 교수는 함태영이 심계원장 재임 당시 국유재산 관리와 정부 예산 집행에 대한 감독을 강화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법조인 시절부터 중시했던 공정성과 청렴의 원칙이 공직 수행에도 반영된 사례로 분석했다.
1952년 부통령 선거와 관련해서는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정치적 선택과 함태영 자신의 판단을 함께 검토했다. 그는 이승만의 지지가 함태영의 당선에 영향을 미쳤지만, 함태영의 정치적 의사를 단순히 수동적인 것으로만 해석하기는 어렵다고 설명했다.
함태영은 부통령으로서 정부와 국회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으나, 재임 기간 양원제가 시행되지 않으면서 헌법상 부통령에게 부여된 역할을 수행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분석했다.
정 교수는 “그는 발췌개헌에 대해서도 입장을 표명한 바 없었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추진된 사사오입 개헌에 대해서도 특별한 견해를 밝힌 바 없었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함태영이 정당정치에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으며 이승만을 보좌하는 데 무게를 뒀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자로서의 면모가 정치활동에서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반공주의와 이승만에 대한 신뢰가 그의 정치적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분석했다.
김유준 박사, 기장과 한신대 형성 과정서 함태영의 역할 조명
두 번째 발제에 나선 김유준 한신대학교 박사는 ‘송암 함태영의 교회사적 위상과 기장과의 관계’를 주제로 함태영이 한국 장로교회와 한국기독교장로회 형성에 미친 영향을 분석했다.
김 박사는 함태영이 법조인과 독립운동가, 목회자, 부통령, 교단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한국교회사 연구에서는 그의 역할이 충분히 다뤄지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특히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의 형성 과정에서 김대현 장로, 송창근 목사, 김재준 목사의 역할이 주로 강조돼 왔지만, 이들을 연결하고 제도적 기반을 마련한 함태영의 역할도 함께 평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함태영이 청주읍교회와 마산 문창교회, 서울 연동교회 등에서 목회하며 한국 장로교회의 성장과 교단 조직의 발전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또한 법조인으로서 형성된 정의와 법치에 대한 인식이 목회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신앙은 교회 내부의 경건생활뿐 아니라 사회적 책임과 민족의 현실을 함께 다루는 특징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이어 조선신학교 설립과 운영 과정에서 함태영이 수행한 역할을 살펴봤다. 1938년 평양신학교 폐교 이후 한국인 주도의 신학교육 필요성이 제기됐으며, 1940년 조선신학교가 설립됐다.
김 박사는 김대현 장로가 재정적 기반을 제공하고 송창근·김재준 목사가 신학교육의 방향과 신학적 토대를 형성했다면, 함태영은 학교의 제도적 안정과 교단적 공인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고 설명했다.
함태영은 조선신학교 설립 초기부터 학교 운영에 참여했으며, 이후 한국신학대학 학장으로 활동하면서 신학교육의 기반을 유지하는 데 기여했다. 김 박사는 이러한 역할을 근거로 함태영을 교단과 신학교를 연결한 결속자로 평가했다.
또한 1953년 한국기독교장로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립한 이후 함태영이 신생 교단의 안정과 정체성 형성에 기여한 점도 언급했다. 함태영은 1956년 부통령직에서 물러난 뒤 기장 총회장을 맡아 교단 운영에 참여했다.
김 박사는 함태영의 교회사적 유산을 청빈·법치·신앙이라는 세 가지 개념으로 정리했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동체를 중시한 삶, 정의 실현을 위한 법치의 존중, 교회와 사회의 문제를 함께 책임지려는 신앙이 그의 생애에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생애는 ‘청빈·법치·신앙’이라는 삼중의 유산으로 후배 목회자 세대에게 전승되었으며, 이는 오늘날 기장의 예언자적 사회참여 전통의 원형질이 되었다”고 밝혔다.
김 박사는 함태영이 3·1운동과 교회 활동을 통해 보여준 신앙적 실천이 이후 한국기독교장로회 목회자들의 민주화운동과 민중 선교, 통일운동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기반이 됐다고 분석했다.
특히 함태영을 김대현·송창근·김재준과 함께 한국기독교장로회와 한신대학교 형성의 4대 기둥으로 자리매김할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다만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각 인물의 구체적인 기여와 상호 관계를 확인할 수 있는 사료 발굴과 실증적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정회 교수, 함태영의 생애에 나타난 복음·교회·국가의 관계 분석
세 번째 발제에 나선 김정회 서울장신대학교 교수는 ‘송암 함태영의 생애에 담긴 신학적 주제 - 복음, 교회, 국가’를 주제로 함태영의 생애와 신학적 사상을 분석했다.
김 교수는 “그의 삶 속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신학적 주제는 복음, 교회, 국가였다”며 세 주제가 서로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연결된 관계에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함태영이 대한제국 시기 근대 법학을 배우고 법관으로 활동하면서 공정성과 정의의 중요성을 인식했다고 분석했다. 이후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정의에 대한 이해가 법적 공정성을 넘어 인간의 존엄과 사회적 책임을 포함하는 방향으로 확장됐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특히 함태영이 3·1운동에서 수행한 역할에 주목했다. 함태영은 기독교계 인사들을 규합하고 천도교 측과 협의하는 과정에서 역할을 담당했으며, 독립운동의 준비와 조직에도 참여했다.
함태영은 민족대표 33인의 명단에는 포함되지 않았지만, 3·1운동의 준비 과정에 관여했다. 김 교수는 그가 독립운동을 정치적 행위이자 기독교적 정의를 실천하는 신앙적 과제로 이해했다고 분석했다.
이어 함태영의 목회와 교회관을 살펴봤다. 함태영은 평양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회자의 길을 걸으며 부흥회와 성경교육, 전도 활동을 통해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교회의 성장을 추구했다.
김 교수는 함태영이 선교사 곽안련의 신학과 목회관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회심과 영적 각성을 중시하는 복음주의적 전통을 바탕으로 교회의 부흥을 추구하면서도 교육과 사회사업, YMCA 활동 등을 통해 교회가 사회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보았다는 것이다.
또한 함태영이 사회복음 사상을 수용하면서도 이를 기존의 복음주의 신앙과 분리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개인의 구원과 사회의 변화는 연결된 과제이며, 교회는 성도들의 신앙생활뿐 아니라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는 데에도 역할을 해야 한다고 인식했다는 설명이다.
국가에 대한 이해 역시 이러한 신학적 토대에서 형성됐다고 밝혔다. 김 교수는 함태영이 기독교의 자유와 정의, 사랑과 나눔의 가치가 국가 운영의 기초가 돼야 한다고 믿었으며, 해방 이후 기독교적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중요한 사명으로 여겼다고 분석했다.
그는 함태영이 해방정국에서 독립촉성기독교중앙협의회와 그리스도교도연맹 등 기독교계 정치조직에 참여한 것도 이러한 신념을 실천하는 과정이었다고 설명했다.
특히 함태영이 1949년 심계원장으로 취임한 이후 공직자의 도덕성과 청렴을 강조한 점에 주목했다. 함태영은 국가의 정의가 제도와 법률뿐 아니라 공직자의 윤리적 책임을 통해 실현돼야 한다고 보았으며, 공금 횡령과 부정부패를 막기 위한 감찰 활동에도 나섰다.
김 교수는 함태영의 신앙과 정치적 실천을 종교인의 공직 진출로만 이해하기보다 기독교적 가치가 국가와 사회의 운영 원리로 구현돼야 한다는 신념의 연장선에서 살펴야 한다고 밝혔다.
그는 “함태영의 생애는 개인 구원(복음)과 영적 공동체(교회), 정의로운 사회 건설(국가)이 유기적으로 통합된 실천적 신학의 여정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세 번째 발제에 대한 논찬은 박종현 연세대학교 박사가 맡았다. 박 박사는 함태영의 생애를 복음과 교회, 국가라는 세 가지 주제로 정리한 연구가 한국 근현대사 속 기독교인의 정치·사회적 활동을 이해하는 데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또한 함태영의 정치 참여가 기독교적 가치에 기초한 근대국가 건설이라는 목표와 연결돼 있었다고 분석하면서, 이러한 목표가 실제 정치 영역에서 어느 정도 실현됐는지는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한편 이날 강좌에는 송암의 목회와 신앙 유산을 주제로 한 좌담도 마련됐다. 좌담은 김주한 한신대학교 교수의 사회로 김주용 연동교회 목사와 김정곤 송암교회 목사가 참여하도록 구성됐다. 전병금 한국기독교장로회 증경총회장은 축도를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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