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리 함스
킬리 함스. ©Christian Post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킬리 함스의 기고글인 ‘기독교인들이 불편한 대화를 피할 때 나타나는 6가지 모습’(6 ways Christians sometimes avoid difficult conversations)을 7월 2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킬리 함스는 Hands Across the Aisle Women’s Coalition의 공동 설립자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몇 주 전, 필자는 전국 규모의 기독교 남성 콘퍼런스 강사진을 비판하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프리덤 콘(Freedom Con)’은 인근 지역인 위나치(Wenatchee)에 있는 그레이스 시티 교회의 조시 맥퍼슨(Josh McPherson) 목사가 설립한 단체 ‘스트롱거 맨 네이션(Stronger Man Nation)’이 주최하는 행사다.

올해 강사진에는 아내에게 첫날밤 “남편이 서라는 곳에 서고, 입으라는 것을 입고, 하라는 대로 하라”고 농담한 조시 하워튼(Josh Howerton), 아내가 남편보다 연약해지지 않으면 유해한 존재가 된다고 주장한 라이언 비스콘티(Ryan Visconti), 자기 어머니를 여성의 생식기에 빗대어 표현한 그레이엄 알렌(Graham Allen)이 포함됐다.

그러나 명단에서 가장 논란이 된 인물은 아마 마크 드리스콜(Mark Driscoll)이었을 것이다. 그는 과거 ‘윌리엄 월리스 2세’라는 가명으로 하나님께서 여성을 ‘남성 생식기의 집’으로 창조하셨다는 취지의 글을 쓴 바 있다.

필자의 요지는 단순했다. 우리가 이런 인물들을 꾸짖기는커녕 훌륭한 지도자로 추앙한다면, 무언가 단단히 잘못됐다는 것이다. 이런 남성들이 교회 안에서 남성성의 기준으로 자리 잡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다음 세대에게 통제와 천박함, 지배욕이 성경적 남성성의 징표라고 가르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많은 사람은 그 요지를 제대로 듣지 않았다. 대신 자신이 좋아하는 목회자를 마크 드리스콜과 같은 부류로 취급하는 것은 불공평하다는 항의부터, 드리스콜이나 하워튼, 혹은 필자가 실제로 쓴 글의 내용과는 전혀 무관한 반응까지 쏟아졌다.

필자는 바로 그런 유형의 반응을 살펴보려 한다. 필자는 교회 내부에서 교회를 위협하는 문제들에 대해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부르심을 느끼고 있으며, 그때마다 비슷한 반발과 마주한다. 이것은 비단 필자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반응의 실체를 분명히 드러냄으로써, 진실한 기독교인들이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전에 한 번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말들은 겉으로는 동정심이 넘치고 겸손하며 매우 성경적인 것처럼 들린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그것은 이른바 ‘기독교식 언어’로 포장된 영적 조종이며, 수세대 동안 기독교인들의 입을 막는 데 사용돼온 익숙한 비난의 문구에 기대고 있다.

아래에 그중 가장 흔히 사용되는 표현들을 정리했다. 독자에게도 익숙한 말인지 살펴보기 바란다.

1. “보아하니 상처가 많으시군요. 당신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필자가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것은 논점의 본질과 무관하다.

무엇보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건네는 행위는 종종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안겨 입을 다물게 하려는 시도로 사용된다. 이는 매우 부당한 태도다.

당신은 정말 그 사람의 상처에 관심이 있는가. 아니면 그저 그를 조용히 시키는 데 더 관심이 있는가. 진심으로 그 사람이 상처받았다고 생각한다면, 그 상처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한 번이라도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실제로 어떤 사람들은 깊은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학대 생존자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다른 이들이 반복해서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적극적인 옹호자가 되기도 한다.

그들의 상처는 왜 그들이 목소리를 내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이 참인지 거짓인지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말을 주의 깊게 검토해야 한다.

성경은 말하는 사람의 감정 상태를 지레짐작해 그의 주장을 판단하라고 가르치지 않는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동기를 추측했기 때문에 칭찬받은 것이 아니라, 그의 가르침을 성경에 비추어 살펴보았기 때문에 칭찬받았다.

선지자들은 “당신은 내면의 치유가 필요한 것 같으니 심리 치료나 받으라”는 식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예수님조차 말씀에 대한 제대로 된 반박 대신 “귀신이 들렸다”는 공격을 받으셨다.

누군가 성경적인 우려를 제기한다면, 올바른 반응은 그것을 성경에 비추어 검토하는 것이다. 멀리 떨어진 자리에서 그 사람의 마음 상태를 진단하는 것이 아니다.

2. “당신은 분열을 조장하고 있습니다.”

놀이터에서 누군가 당신의 가장 친한 친구를 때렸고, 당신이 그것을 선생님에게 알렸다고 가정해보자. 그렇다면 분열을 일으킨 사람은 당신인가?

유치원생도 정답을 안다. 하지만 가해자에게 신학교 학위와 베스트셀러 저서, 마이크를 쥐여주면 사람들은 갑자기 누가 진짜 문제인지 혼란스러워한다. 선해 보이는 겉모습에 눈이 멀어 악을 보지 못하거나, 폭력을 휘두른 사람보다 그것을 지적한 사람이 더 나쁘다고 결론내린다.

신약성경은 중요한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죄를 폭로하는 사람과 분열을 일으키는 사람은 동일하지 않다.

로마서 16장은 바른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는 자들을 살피라고 말한다. 디도서는 거짓 교사들을 엄하게 책망하라고 명한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위협받았을 때 베드로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다. 예수님도 자신이 평화가 아니라 검을 주러 왔다고 말씀하셨다.

성경적 연합은 진리 안에서 이루어지는 연합이다. 침묵을 대가로 얻는 값싼 평화가 아니다.

죄와 거짓 가르침, 학대와 위선을 지적하는 것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아니다.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그 죄와 학대 자체다. 그것들의 이름을 정확히 부를 때 상처는 방치되지 않고 비로소 치유될 가능성을 얻는다.

3. “그것은 험담이고 비방입니다.”

이 주장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는 험담과 비방이 실제로 심각한 죄이며 경계해야 할 대상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끊임없이 갈등을 부추기고 자신을 교회의 ‘감시자’로 내세워 영향력을 키우는 사역 단체들이 실제로 존재한다. 그들에게 논란은 곧 콘텐츠이며, 갈등은 계속해서 소비되는 연료가 된다. 이 역시 건강한 모습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남용이 존재한다고 해서 진실을 밝혀야 할 책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성경이 제시하는 분별의 기준은 “당신이 기독교 지도자에 대해 불편한 말을 했는가”가 아니다.

험담은 정당한 목적 없이 다른 사람의 사적인 정보를 퍼뜨리는 행위다. 비방은 다른 사람의 평판을 무너뜨릴 목적으로 악의적으로 거짓을 유포하는 행위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 공적인 사실을 알리는 것은 험담도 비방도 아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의 죄를 지적한 것은 험담이 아니었다. 바울이 서신에서 후메내오와 알렉산더의 이름을 구체적으로 거론한 것은 비방이 아니었다. 고린도교회는 한 남자의 죄를 공개적으로 다루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것을 은폐하는 일이 오히려 공동체에 더 큰 위험이었기 때문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은밀한 죄가 곪도록 방치됐을 때 교회가 얼마나 큰 피해를 입는지는 멀리서 사례를 찾을 필요도 없다. 라비 재커라이어스 사건만 보아도 충분하다.

약자를 보호하기 위해 공인에 관한 사실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것은 험담이 아니다. 그것을 험담이라고 몰아가는 것은 정직을 죄처럼 보이게 만들고, 정작 다뤄야 할 진짜 죄를 계속 감추는 결과를 낳는다.

4. “당신에게 직접적인 피해가 없다면, 그저 기도만 하세요.”

이 말은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이어서 들을 때마다 당혹스럽다.

필자는 종종 혀를 깨물고 은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 뒤에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도 돌보라고 명하셨다는 사실을 조심스럽게 상기시키곤 한다.

성경은 갇힌 자들을 생각할 때 마치 우리 자신이 함께 갇힌 것처럼 여기라고 가르친다. 자신의 가족뿐 아니라 고아와 압제받는 사람을 변호하라고 명한다.

바울은 한 번도 방문하지 않은 교회들을 위해 편지를 썼고,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지 않는 문제들을 바로잡기 위해 힘썼다.

물리적 거리가 개입할 자격을 없애는 것이라면, 신약성경의 상당 부분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도는 좋은 것이다. 그러나 기도가 대화를 시작하는 수단이 아니라 대화를 끊어내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 “말하지 말고 기도만 하라”는 권면은 영적 조종이 될 수 있다.

5. “그 교회에 다니는 것도 아니면서 남의 일에 신경 끄세요.”

언제부터 특정 교회의 교인이라는 자격이 기독교적 책임의 경계가 되었는가?

우리는 한 몸이다. 바울의 서신들은 그가 직접 목회하지 않은 교회들에 보내졌고, 그가 한 번도 방문한 적 없는 회중들 앞에서도 읽혔다. 한 지역교회에서 일어난 일이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 교회에서 발생한 학대나 거짓 가르침을 외부인이 모른 척한다고 해서 그 문제가 그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는 교회를 옮긴다. 교회와 사역 네트워크는 자원과 콘퍼런스, 플랫폼을 공유한다. 침묵은 결국 그 문제로 상처받게 될 사람들의 범위를 더 넓힌다.

“당신 일에나 신경 쓰라”는 말은 겸손을 권하는 조언처럼 들릴 수 있다. 누군가 실제로 험담이나 비방을 하고 있다면 지혜로운 경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맥락이 중요하다. 실제 문제를 직면하고 바로잡으려는 사람에게 이 말을 던지는 것은 책임이라는 건강한 과정 앞에 거대한 장벽을 세우는 일이다.

필자는 트랜스젠더 논쟁에서도 이 말을 수없이 들었다. YMCA에서 성인 남성이 소녀들 바로 옆에서 샤워하도록 허용하는 문제가 필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일인 것처럼, 사람들은 “당신 일에나 신경 쓰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의 행동과 방관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6. “이런 이야기는 소셜미디어에 올릴 일이 아닙니다.”

프리덤 콘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광고된다. 강사들은 소셜미디어를 기반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구축했다. 하워튼의 설교 영상도 소셜미디어에서 널리 퍼졌다. 콘퍼런스는 웹사이트를 통해 입장권을 판매하고 인스타그램으로 행사를 홍보한다.

플랫폼이 공적인 영역에서 만들어졌다면, 그 플랫폼에 대한 비판 역시 공적인 영역에서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런데 장소에 대한 문제 제기는 거의 언제나 비판하는 사람에게만 향한다. 이미 수만 명의 팔로워에게 자신의 가르침을 공개적으로 퍼뜨리고 있는 지도자들에게는 같은 기준이 좀처럼 적용되지 않는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개인적인 편지로 꾸짖지 않으시고 성전 뜰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하셨다. 바울도 안디옥교회에서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베드로를 면전에서 책망했다.

그 영향력이 공적이었기에 교정도 공적이었다. 여기서 소셜미디어가 어떤 이들에게는 중요한 평등의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비판하려는 대상만큼의 권력과 영향력, 플랫폼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 소셜미디어는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가 되기도 한다.

필자는 사적인 편지를 보내고 마태복음 18장의 절차를 모두 따랐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어, 마지막 수단으로 소셜미디어에 호소한 사람들을 수없이 보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살펴본 반응들은 정작 실제로 제기된 문제의 본질을 거의 다루지 않는다.

그들은 거짓 가르침의 내용을 인용해 반박하지도 않고, 기록으로 남은 피해 사실을 해명하지도 않는다.

대신 당신이 더 건강하고, 더 사랑이 많고, 더 영적으로 성숙했거나, 훌륭한 기독교인답게 남의 일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면 이런 불편한 질문을 멈췄을 것이라고 암시한다. 이는 대화를 피하는 동시에, 그 대화를 시작한 사람에게 죄책감을 뒤집어씌우는 방식이다.

필자는 나에게 보내지는 모든 선의의 댓글을 냉소적으로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이들은 진심으로 나를 위해 기도하며, 필자는 그 점에 깊이 감사한다. 그러나 진정한 소통과 함께 드려지는 기도와, 소통을 피하기 위한 대체재로 사용되는 기도는 분명히 다르다.

후자의 경우에는 그 의도가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물론 정당한 비판도 부당한 방식으로 전달될 수 있다. 필자 역시 여러 차례 그런 잘못을 저질렀음을 고백한다.

의로운 분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빠르게 다른 감정으로 변질될 수 있다. 필자의 글에 대한 모든 반발이 단지 논점을 흐리기 위한 방어 기제인 것도 아니다.

때로 사람들은 필자의 태도에 반응하며, 이는 충분히 돌아볼 가치가 있다.

그래서 필자는 정기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살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 내 안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소서. 제가 해야 할 일의 가치를 잃지 않으면서도, 주께서 맡기신 일을 묵묵히 감당하게 하소서.”

그러나 스스로 그 겸손의 과정을 충분히 거쳤다면, 지나치게 영적인 언어로 포장된 핑계들이 정당한 문제 제기를 짓밟도록 내버려둘 필요는 없다.

성경은 더 나은 모델을 제시한다: "범사에 헤아리고 좋은 것을 취하라.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라(살전 5:21, 엡 4:15)"

이는 진리와 사랑을 모두 붙들라는 뜻이다. 사랑을 무기로 삼아 진리를 억누르라는 의미가 아니다.

제기된 우려가 성경적이지 않다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보이며 표현이 무례했다면 어떤 부분이 그러했는지 말해주길 바란다. 그러나 입을 열어야 한다는 분명한 부르심을 받은 수많은 옹호자와 필자에게, 늘 반복되는 낡은 문구를 들이밀며 조용히 하라고 강요하지는 말길 바란다.

진정한 질문은 우리가 상황을 완벽히 파악했는가에만 있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선하다고 부를 것인가, 그리고 우리의 침묵 때문에 누가 피해를 입게 되는가 하는 질문이야말로 끝까지 붙들어야 할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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