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마크 크리치 목사의 기고글인 ‘"기독교 민족주의자’라는 낙인을 받을 때, 우리가 생각해 볼 점"(When people call you a 'Christian nationalist,' here's what to think)를 4월 8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마크 H. 크리치 목사(Rev. Mark H. Creech)는 노스캐롤라이나 기독교행동연맹(Christian Action League of North Carolina, Inc.)의 사무총장이다. 그는 이 직책을 맡기 전에 20년 동안 목회자로 사역했으며, 노스캐롤라이나에서 다섯 곳의 남침례교회와 뉴욕주 북부에서 한 곳의 독립침례교회를 섬겼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성경 전체를 살펴보면, 교회의 초기 시대부터 하나님의 진리를 공적 삶 속에서 전했던 이들은 종종 그들을 모욕하고 신뢰를 떨어뜨리기 위한 이름으로 불렸다.
‘그리스도인(Christian)’이라는 명칭 자체도 처음에는 비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도행전 11장 26절에 기록된 것처럼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던 안디옥에서 이 표현은 명예로운 칭호가 아니라, 그들을 그리스도와 연결시켜 조롱하고 주변부로 밀어내려는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패턴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선지자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비난을 들었고, 선지자 예레미야는 나라를 약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обвин받았다. 사도 바울 역시 “염병 같은 자”, “소요를 일으키는 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이 모든 경우에서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선 의도가 있었다. 그것은 곧 침묵시키려는 시도였다. 메시지는 분명했다. 전달자를 불신하게 만들면, 메시지 역시 무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오늘날 공적 영역에서 기독교적 목소리를 잠재우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 중 하나는 특정한 이름을 붙이는 것이다. 충분히 위험하게 들리는 이름을 붙이면 더 이상의 논의가 필요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 이름이 바로 ‘기독교 민족주의(Christian nationalism)’이다.
이 용어는 언론과 학계, 심지어 교회 내부에서도 자주 사용된다. 매우 넓고 모호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많으며, 거의 항상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용어와 연관될 가능성만으로도 주저하게 만들거나 침묵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이 표현이 갖는 영향력의 일부는 ‘민족주의(nationalism)’라는 단어 자체에서 비롯된다. 현대 사회에서 이 단어는 결코 중립적인 의미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20세기 동안 역사상 가장 억압적인 정권들 가운데 일부가 국가 정체성이라는 언어를 활용했기 때문이다. 아돌프 히틀러가 이끌었던 정당의 이름 역시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ational Socialist German Workers' Party)’이었다. 그 이념은 단순한 단어 이상의 복잡성과 위험성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연상 작용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그 결과 ‘민족주의’라는 단어는 종종 권위주의, 강압, 극단주의의 이미지를 불러일으킨다. 여기에 ‘기독교’라는 단어가 결합되면 의심은 설명 이전에 이미 형성된다. 이 용어는 중립적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이미 특정한 의미가 덧입혀진 채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을 받아들이기 전에, 그 의미를 먼저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물론 교회의 사명과 국가의 목표를 잘못 결합하는 왜곡된 형태의 신앙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국가를 하나님의 나라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가 아니며, 복음은 강압으로 확장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많은 신실한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공적 도덕 문제에 대해 말할 때 의미하는 바는 이러한 왜곡된 형태가 아니다. 성경적 진리를 공적 삶에 적용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위험하다고 말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오해하거나 왜곡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개인의 경건 생활이라는 좁은 영역에만 국한된 주가 아니다. 그분은 모든 영역의 주이시다. 그분의 권위는 개인의 마음뿐 아니라 가정과 교회, 그리고 인간 삶의 질서를 포함한 더 넓은 영역에까지 미친다. 성경은 개인의 구원뿐 아니라 진리와 거짓, 옳고 그름, 정의와 불의, 그리고 창조 질서에 대해서도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생명의 존엄성을 강조할 때 그것은 정치적 극단주의가 아니라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에 모든 생명이 거룩하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성경적 결혼의 정의를 지지할 때 그것은 통제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를 증언하는 것이다. 그 질서는 무시될 때 심각한 결과를 가져온다.
가정의 중요성, 진리, 도덕적 책임에 대해 말할 때 그것은 정치적 의제를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초월한 진리를 현재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질서와 일치하며 인간의 번영에 가장 유익한 길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확신이 의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면 문제는 그 확신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려는 문화에 있을 것이다. 바로 여기에 위험이 존재한다.
‘기독교 민족주의’라는 낙인은 신실함을 의심으로 바꾸고, 진정한 기독교적 확신을 극단주의로 보이게 만든다. 이는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말하기도 전에 신뢰를 떨어뜨려 침묵하게 만드는 전략으로 작용한다.
이렇게 이 용어는 단순한 설명을 넘어 전략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다. 말하기 전에 입을 막는 도구가 되는 것이다. 이 전략이 성공할 때 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전하지 않거나, 성경을 삶의 도덕적 문제에 적용하기를 피하는 목회자들은 복음에 더 충실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덜 충실해지게 된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의 모든 부분을 가장 크게 외치고 가장 분명하게 설명한다 하더라도, 바로 지금 세상과 마귀가 공격하고 있는 그 한 지점을 제외한다면, 나는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전투가 벌어지는 바로 그 자리에서 병사의 충성이 증명되며, 다른 모든 전장에서 굳건히 서 있었다 하더라도 바로 그 지점에서 물러난다면 그것은 도피요 수치일 뿐이다.”
복음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다. 복음은 실제 삶과 공동체, 문화 속에 말씀한다. 복음은 죄인에게 회개를 촉구한다. 그러나 무엇으로부터의 회개인가? 복음은 변화를 요구한다. 그러나 어떤 기준에 따른 변화인가?
만일 교회가 문화 속에서 정상으로 여겨지는 죄를 죄라고 말하기를 거부한다면 회개의 메시지는 모호해진다. 공적 삶 속에서 거짓이 지배하고 있는데도 이를 말하지 않는다면 진리의 선포는 현실과 분리되고 만다.
신실함은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한다. 신중하지 못하거나 거칠게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정파적 태도로 말하라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부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성경적으로, 그리고 변명 없이 말할 용기가 필요하다.
“우리는 진리를 거슬러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니”(고린도후서 13장 8절). 이것은 교회가 좁은 의미의 정치 집단이 되라는 요청이 아니다. 교회가 온전히 성경적이어야 한다는 요청이다. 동시에 공적 정책이 하나님의 도덕법을 분명히 거스르거나 창조 질서를 부정하거나 하나님께서 죄라고 하신 것을 법적으로 보호할 때 교회가 말해야 한다는 요청이기도 하다.
이는 삶의 모든 영역 위에 계신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또한 성도들이 개인 경건을 넘어, 진리와 충돌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생각하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우도록 돕는 것이다.
진리가 공개적으로 부정되는 상황에서 침묵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부재이다. 마치 자신의 자리를 떠난 병사와 같다. 비난이 올 수도 있다. 낙인이 찍힐 수도 있다. 놀랄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예상해야 할 일이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신실하게 살아온 그리스도인들은 이름을 부르는 조롱과 거짓된 낙인, 모욕적인 표현을 끊임없이 경험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무엇이라 불리느냐가 아니다. 우리를 부르신 분께 충실하느냐의 문제이다.
교회는 언제나 문화의 인정을 통해 유지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 속에서 성장해 왔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태복음 16장 18절)는 말씀처럼 말이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생계와 생명을 잃을 위험 속에서도 황제 숭배를 거부했다. 인간의 생명이 값싸게 여겨지던 시대에 그들은 버려진 아이들을 돌보고 전염병 가운데 있는 병자들을 섬겼다. 그들의 믿음은 문화를 따르지 않았고 오히려 문화에 도전했다.
수세기가 흐른 뒤, 윌리엄 윌버포스와 같은 신앙인들은 노예무역에 맞서 싸웠다. 그들은 복음이 요구한다고 믿었기에 경제적·사회적 체제에 맞섰다. 처음에는 강한 반대에 부딪혔지만 결국 그들의 헌신은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었다.
미국에서도 목회자들과 교회는 정의와 도덕적 개혁 운동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했다. 그들은 문화의 인정을 기다리지 않고 진리를 말했다. 그들은 문화를 지배하려 한 것이 아니라 진리를 증언하려 했다.
역사는 분명한 패턴을 보여준다. 교회가 가장 신실했을 때, 종종 세상과 가장 어긋나 있었다. 이 원리는 변하지 않고 시대의 압력에 따라 달라지지 않고 낙인에 굴복하지 않는다. 아울러 도전에 직면해 물러서지 않고 그 자리에 선다.
그리고 모든 세대에는 그와 함께 서려는 사람들이 필요하다. 이는 영향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께 대한 충성을 위해 그리고 여전히 빛이 필요한 세상을 위해서이다. 비록 세상이 그 빛을 어둠이라 부르고, 어둠을 빛이라 부른다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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