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는 낮은 곳으로 흐릅니다. 예수님조차 낮고 낮은 우리 가운데 오셨습니다. 그 낮은 곳에 흐르는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를 힘입어 사셨습니다. 무엇보다 그분은 우리 중 하나가 되셔서 1/n로 사셨습니다. 자기를 증명하시기 위해 높은 곳에 오르지 않으셨습니다.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신적 권리를 모두 포기하시며 우리 중 하나가 되셨습니다. 사도 바울과 우리가 겪는 고난은 타 종교의 수행자가 겪는 고행과는 다릅니다. 기독교의 고난은 고난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그 고난을 통해 진리나 구원에 이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은 참된 그리스도인은 고난을 기꺼이 감내합니다. 때로는 고난을 자처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는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마다하지 않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었고, 그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교회와 그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은 거룩한 오지랖으로 우리를 이어줍니다.
이지일 - 고갈된 세상 속 충만한 나라
주님의 사역은 그분 자신에게만 완전히 알려져 있었기에, 그분만이 그 사역의 본질을 완전하게 이해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완전한 진리를 가지게 되며, 그 속죄의 본질과 그분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죽음에 자신을 내주신 목적에 대한 모든 진리를 소유하고 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속죄는 인간을 위해서도 필요했지만, 하나님을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이 사랑을 큰 값을 치르시고 나타내신 방식이기에 인간의 노예적인 두려움과 불신을 없애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 죽음은 하나님을 위해 죄에 대한 대속적 희생제사를 제공한 것이었다. 성령은 속죄 사역이 완료된 후에야 주어졌다. 뿐만 아니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사역과 함께 주어진다(갈 3:3). 하나님은 성령을 주실 때 십자가를 중요하게 여기신다. 그러므로 신자들과 교회는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기대할 때, 오직 십자가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조지 스미튼 - 예수님이 가르치신 속죄
사랑은 '관련을 맺는 것'입니다. 사랑을 시작한다는 것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을 뜻하죠. 물론 성경에 나오는 모든 말씀과 관계를 맺을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특정한 말씀과는 관계를 맺을 수 있죠. 이처럼 말씀 묵상이란 내가 그날 묵상하는 말씀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을 의미하며, 사랑의 관계를 맺은 그 말씀은 우리의 영혼에 영원한 흔적을 남기게 됩니다. 사랑은 '품음'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대상을 마음에 품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말씀을 사랑하게 되면 그 말씀을 우리의 마음에 품게 되죠. 그리고 우리가 품은 그 말씀은 우리의 존재 속에 머물고, 결국은 우리 존재의 한 부분이 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처럼 말씀을 품을 때 말씀이 육신이 되는 신비로운 은혜를 체험하게 됩니다.
강준민 – 깊은 말씀 묵상의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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