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네이트 셔든 목사의 기고글인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이유는 무엇인가?'(Why did Jesus ride on a donkey?)를 최근 게재했다.
네이트 셔든 목사는 테네시주 프랭클린에 위치한 코너스톤 장로교회 담임목사이며, 프랭클린에 있는 뉴 칼리지(신학대학)에서 겸임 교수로도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예수님께서 나귀와 새끼 나귀를 준비하게 하신 후, 제자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었고 예수님은 그 나귀를 타셨다(마 21:1–5). 복음서 전체를 통틀어 예수님이 어떤 동물이라도 타셨다는 기록은 이 장면이 거의 유일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예수님이 다치셨거나 걸을 수 없는 상태였던 것도 아니고, 병들거나 지쳐서 이동 수단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다. 여기에는 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예수님은 걸어서가 아니라 나귀를 타고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들어가기로 의도적으로 선택하셨다. 이는 단순한 이동 방식의 변화가 아니라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그것은 왕이 오셨다는 사실을 알리는 상징적인 선언이었다. 마태는 스가랴 선지자의 말씀을 인용하며 그 의미를 분명히 밝힌다.
“시온의 딸에게 이르라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를 탔고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 곧 나귀 새끼니라”(마 21:5).
오랫동안 기다려온 왕, 곧 메시아께서 즉위 행렬을 기대하며 길가에 늘어선 무리 가운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역사를 보면 위대한 인물들은 대부분 훌륭한 말을 타고 등장한다. 알렉산더 대왕에게는 검은 종마 부케팔루스가 있었고, 조지 워싱턴에게는 흰색 아라비아 말 블루스킨이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귀를 타셨다. 세상의 시선으로 보면 어쩌면 우스워 보일 수도 있다. 알렉산더 대왕이 나귀를 타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러나 예수님의 모든 행동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다.
예수님은 세상의 정복자들과 같은 방식의 통치자가 아니었다. 그분은 야망이나 사람들의 칭찬을 구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겸손 가운데 오셔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셨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동쪽 언덕을 돌아 예루살렘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 길에는 유월절을 맞아 모여든 순례자들로 가득했다. 어떤 이들은 겉옷을 길에 깔았고, 또 어떤 이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외쳤다.
“호산나!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복이 있도다”(마 21:9) 이 외침은 시편 118편 26절의 말씀이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순례자들은 전통적으로 시편 113편부터 118편까지의 찬양을 불렀다.
‘호산나’라는 헬라어 표현은 히브리어 ‘호시아 나(hoshiah na)’에서 유래했으며, 그 의미는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간구였다. 원래는 도움을 요청하는 절박한 외침이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 의미가 변화했다. 더 이상 단순한 도움 요청이 아니라 구원이 임했다는 기대와 확신의 외침이 되었다. 사람들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지만, 그 마음에는 “구원이 이미 왔다”는 기대가 담겨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사건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보내셨다는 신호였다.
그날 예수님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희망에 찬 눈빛과 기대에 찬 환호를 들으며 큰 기쁨과 위로를 받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실제 모습은 전혀 달랐다. 기드론 골짜기를 바라보며 예루살렘 성이 한눈에 들어오는 순간, 누가복음은 다른 복음서가 전하지 않는 장면을 기록한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눅 19:41)
종려 가지가 흔들리고 호산나의 외침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예수님의 눈에는 눈물이 가득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성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네 가운데 있는 자녀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권고받는 때를 알지 못함이니라”(눅 19:41–44).
겉으로는 환영과 축제가 가득했지만, 예수님은 그 도시를 덮고 있는 깊은 영적 어둠을 보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보았지만, 참된 예수님을 보지는 못했다. 그들은 자신이 기대하던 모습의 메시아를 보고 있었을 뿐이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 영광을 회복하거나 다윗 왕국을 세상적 방식으로 재건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었다. 그분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로마를 무너뜨리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로마까지도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꼭 필요한 구원자였지만, 그들이 원하던 방식의 구원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예언대로 40년 후 예루살렘은 멸망하게 된다. 서기 70년 로마 군대가 예루살렘을 포위했고,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다시 시편 118편으로 돌아가 보자. 사람들이 외쳤던 “호산나” 이전에는 이런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내게 의의 문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시 118:19–22)
바울은 로마서에서 예수님의 십자가가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걸림돌과 거치는 반석”이 된다고 말한다(롬 9:33). 실제로 불과 일주일 사이에 “호산나”를 외치던 사람들의 목소리는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바뀌었다(눅 23:20).
예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구원자였지만, 그들이 원했던 방식의 구원자는 아니었다. 종려주일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가 원하는 왕국을 세워주시기를 기대하며 따르는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세우시는 하나님 나라 안으로 우리가 세워지기를 원하며 따르는가?
만일 우리가 원하는 왕국을 위해 예수님을 따른다면, 우리의 삶은 결국 무너질 것이다.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나라 안에 우리 자신이 세워지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살아 있는 돌이 되어 모퉁잇돌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지는 영적 집이 된다.
예수님은 다시 오신다. 그때에는 나귀가 아니라 백마를 타고 오실 것이다. 하늘의 군대를 이끄는 왕으로 오셔서 공의를 이루시고 역사의 완성을 이루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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