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식은 음식을 절제하는 목적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에 온 마음과 영혼을 쏟는 것
진정한 예배를 소유하지 못할 때
그 그림자인 의식·의례에 빠질 수 있어
1874년, 남성 세 명이 만주 장로교회의 핵심 성도로 세례받았습니다. 1890년에 들어서자 세례 교인이나 학습 교인으로 교인 명부에 오른 신자가 2만 7천 명을 넘었습니다. 아마 가족관계로 이 신자들과 연결된 사람들 절반 이상은 우상숭배를 중단했을 것이고, 자신들이 어떤 면에서 기독교 교회와 이어져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또한 교인 명부에 오른 신자의 열 배가 넘는 사람들이 기독교의 기본 교리 지식을 습득하여 기독교에 존경심을 갖기에 이르렀고, 그들 가운데 다수는 기독교가 중국의 미래의 종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선교단체들은 우리의 선교 사역을 일으키고 지금까지 그 토대 역할을 해 온 원칙들에 관하여 책을 쓰면, 기독교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강력히 제안했습니다. 선교 방법론을 조직적으로 연구하는 데 작게나마 기여할 수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선교단체 지도자들은 이런 종류의 체계적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지도자들은 선교 방법에 대해 문외한인 이들이 선교 방법을 추천하기 때문에, 현재 그리 합당하지 않은 선교 방법들이 많이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책에 싣기로 한 주제들은, ‘최초의 이방인 선교사’(바울)의 원칙을 우리가 당시의 중국 상황에 어떻게 적용했는지 명확하게 설명하는 내용으로 정하여 간략히 논했습니다. 그러나 책을 구상하다 보니 많은 부분을 제외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만주 교회는 한 곳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현재 만주 교회는 광범위하게 커져 다양한 색채를 띠고 있지만, 만주에 있는 교회는 어떤 교회라도 사실상 하나입니다.
제가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항구와 남쪽 몇 지역과 북쪽 길림 지역의 교회를 제외한 모든 교회는 직간접적으로 심양에서 태동했습니다. 따라서 이 책이 주로 심양에서 일어난 일을 설명해도, 만주 선교회 전체를 나타낸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 선교회와 아일랜드 선교회가 함께 일해도 교회는 하나이고, 그들의 사역이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중요한 선교 방법에 어떤 갈등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 책을 신중하게 읽으면, 사도 바울의 유럽과 서아시아 선교에 풍성한 결실을 가져다준 방법론을 오늘날 동아시아 선교에도 적용할 수 있고, 똑같이 풍성한 결실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존 로스, 1903년 2월 심양에서
제 1 장 _ 금식에 관하여
세례 요한은 본질적으로 금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와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와서 먹고 마셨습니다. 한때는 40일을 금식했습니다. 그러나 그때 영적인 문제에 온 마음과 영혼을 쏟았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음식을 절제할 목적으로 자발적으로 40일 광야 금식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광야 금식과 같은 금식의 본질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영적인 문제에 마음을 온통 쏟았던 것과 비슷하게, 바울도 자신의 회심에 마음을 온통 쏟았을 때 사흘 동안 음식을 먹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큰 기쁨이 넘치거나 깊은 슬픔에 짓눌리거나 대단히 중요한 문제에 열중한 사람들은 이런 상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육신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음식을 먹지 않는 경우입니다. 그럴 때는 육신의 식욕이 완전히 끊어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보통 금식이란, 육신이 음식을 먹을 수 있고 갈망할 때, 자발적으로 배고픔을 고통스럽게 참으면서 먹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금식은 어떤 면에서도 예수님의 40일 금식과 비슷하지 않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40일 금식을 마치고 영혼과 마음이 평온해져서 육신의 배고픔을 다시 느끼기 시작했을 때 사탄에게 시험받았지만,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서 배고픔을 채우지 않으셨습니다. 이번에는 배고픔을 고통스럽게 참으면서 금식하셨고, 그런 점에서는 우리가 보통 금식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때 하신 금식은 자기중심이라는 죄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에 관하여 말하면, 여러 차례 먹고 마셨고 그것도 다른 사람에게 눈총받는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셨지만, 자발적으로 금식한 예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금식하는 본을 보이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에게도 금식을 금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4절에서 15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한번은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 옛 관습들을 행하면 거룩하게 살 수 있는데, 왜 행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런 관습들을 비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새로운 질서를 따라 하나님 나라를 세우고 있는데, 그러한 금욕주의 관습들이 그 질서에 모순된다는 뜻을 내비치며 간접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마태복음 9장 15절과 17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냐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킹 제임스 영어 성경 마태복음 17장 21절에 보면, “기도와 금식 외에는 이런 능력이 나갈 수 없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금식의 필요성이나 유용성에 관하여 주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기록된 이 구절은 후대에 성경 본문에 삽입되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구절은 우리 주님이 가르치신 말씀의 전체적인 흐름과 확연하게 모순됩니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바울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본질적인 원칙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세례 요한의 제자들에게 대답하신 비유에 관하여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로마서 14장 17절에서 설명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 5절에서 “먹지 못함 가운데서도”라고 말하고, 11장 27절에서는 “여러 번 굶고”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는 바울이 넘치도록 수고하면서 겪어야 했던 수많은 역경 가운데 한 가지를 예로 든 것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신앙적인 목적에서 자발적으로 음식을 먹지 않은 금식이라면, 바울은 아마 다른 식으로 말했을 것입니다. 금식 문제에 관한 바울의 솔직한 생각은 우리가 금식하지 않는다고 다른 이들보다 못한 것도 아니고, 금식한다고 나은 것도 아니라는 점입니다.
이는 로마서 14장 3절과 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않는 자는 먹는 자를 비판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그를 받으셨음이라 … 날을 중히 여기는 자도 주를 위하여 중히 여기고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으니 이는 하나님께 감사함이요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며 하나님께 감사하느니라”
본질적으로, 금식은 옛 관습이나 외적인 준수 사항과 비슷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그런 것들을 의무로 정하거나 성결에 이르는 방법으로 권하지 않는 한, 자신과 무관하게 여겼습니다. 만약에 금식이 복음에 대한 편견이나 거부감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었다면, 바울은 분명 금식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원하고 머리 깎는 것이 복음에 대한 편견이나 거부감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될 때 바울은 실제로 서원하고 머리를 깎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더 여러 날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 타고 수리아로 떠나갈새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함께 하더라 바울이 일찍이 서원이 있었으므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더라”(행 18:18; 행 21:23, 롬 14:21, 고전 8:13, 10:33 참조)
하지만 중요한 점은, 서원하고 머리 깎는 행위 자체가 선하거나 그런 행위로 큰 유익을 얻을 수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복음을 전해 들을 사람들의 반감을 사지 않으려고 바울이 그렇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금식이나 다른 어떤 육체적 행위가 개인에게 조금이라도 영적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점을 매우 강력히 부인합니다. 골로새서 2장 8절에서 23절을 보기 바랍니다.
바울은 어떤 종류의 금식이나 의식 자체에 중요성을 부여하는 것이 진정한 예배를 드리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영적으로 위험하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 마음이 진정한 영적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오늘날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사람들이 영적인 삶에 정반대되는 육체적 행위와 의식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한복음 4장 24절, 골로새서 2장 17절, 히브리서 8장 5절과 10장 1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진정한 예배라는 실체를 소유하지 못할 때 그 그림자인 의식과 의례를 지키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양한 형태의 의식과 의례를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를 일평생 강력히 반대했습니다. <계속>
발췌: 존 로스 선교사의『만주선교 방법론』
(번역: 순교자의 소리, 감수: 리진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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