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최근 지인을 통해 <기독교 세계관은 없다>는 글을 접하게 되었다. 제목을 보았을 때 흥미롭다고 생각했다. 기독교는 세계관이 없다? 이 표현은 마치 오늘날 성 정체성이 실제로 존재하지만 관념적으로 존재하지 않다고 가르치는 젠더 이데올리기를 떠올리게 했다.

이 글을 읽으면서 과연 기독교 세계관이란 진짜로 없는 것일까? 질문을 던지며 읽어 보았다. 글을 읽는 내내 동의할 수 없는 논리에 글을 써야 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지면상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보자. 이 글을 보면 복음은 사건이지 세계관으로 설명하려 하면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우려를 표한다. 복음이 “세계를 하나의 폐쇄된 체계로 설명하는 총체적 사유가 아니라, 세계를 깨뜨리고 흔들고 다시 열어젖히는 하나님의 사건”이라고 한다. 무엇인가 맞는 주장을 하는 것 같지만 추상적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도대체 무엇을 말하자는 것인가?

좀 더 살펴보면 이 글을 쓰신 목사님은 카이퍼의 영역 주권개념에 불편함을 감주치 않는다. 카이퍼가 영영 주권을 통해 기독교를 “삶의 체계”로 말하는 순간 복음은 점차 세계를 설명하고 사회를 조직하는 총체적 프로그램으로 변형될 가능성을 얻게 만들었다고 한다. 이 주장은 도무지 납득되지 않는다. 복음이 세계를 설명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이다. 복음이 세계를 설명하지 않으면 누가 세계를 올바로 설명할 것인가? 철학이나 다른 종교가 세계를 설명하도록 방치할 것인가? 이런 주장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프란시스 쉐퍼가 “기독교는 기독교의 해답이 바로 현대인이 절망해 버린 것, 즉 바로 사상의 통일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말해 줄 기회를 가지고 있다.”[프란시스 쉐퍼,「이성에서의 도피」,이영재 옮김,(생명의말씀사,1998),p.87.]는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독교 세계관을 통해서 삶을 설명해 줄 때 세상은 절망에서 소망을 볼 수 있도록 돕게 된다.

기독교가 세계관이 없다면 복음을 어떻게 세상에 전하자는 것인가? 이 글은 복음에 대한 원론적인 이야기만 화려하게 나열한다. 복음은 사건이다. 하나님이 인간이 되신 사건, 십자가에서 죽으신 사건, 부활한 사건,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세상의 주로 통치하신다는 사건이라고 한다. 화려한 수식어가 나열되지만 그 사건이 우리의 일상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현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기독교 세계관은 없다>는 글을 읽다보면 기독교 세계관은 마치 이런 전제를 갖지 않고 있다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관은 이런 당연한 복음의 원리를 전제로 한다. 단지 기독교 세계관은 그 화려한 수식어가 우리 삶을 어떻게 해석하고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도록 독려하는지 도울 뿐이다.

이 글은 ‘성경이 기독교 세계관을 말하지 않는다’는 말만 계속 되풀이 한다. 이런 주장의 반복은 독자들을 세뇌하고 기만할 뿐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성경적 세계관을 계속적으로 제시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주님은 간음하다 현장에 붙잡힌 여자에 대한 유대인들의 관점을 정죄하면서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 8:7) 복음의 관점을 제시하여 그들을 침묵하게 하셨다.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옳으냐는 유대주의적 관점을 향하여 예수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라는 충격적인 관점을 제시하셨다. 바울은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에 대한 율법주의적인 관점을 반박하며 ‘아디아 포라’(adiaphora)의 관점을 제시했다. 신약 성경의 가르침은 온통 복음을 사건 영역에서 머무르게 하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전 영역에 구체적으로 적용 가능한 세계관을 제시했다. 복음은 사건에 머무르지 않고 그 사건이 우리의 세계관으로 작용하여 세상을 변혁시킬 것을 명령한다. 이런 차원에서 기독교 세계관은 정확히 성경의 가르침을 추구하는 것이다.

물론 카이퍼가 주장한 것처럼 삶의 모든 영역에 대한 이런 관점을 제시하기 때문에 가정과 사회에서 갈등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갈등은 이미 예수님께서 예고하신 것이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는 가르침이 현실화 된 것일 뿐이다. 복음이 검을 갖게 되는 것은 복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체계 때문이다. 체계가 없다면 세상에서 검을 내려 놓는 것이 된다. 이것을 이데올로기로 매도할 수 없다.

이제껏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문제가 무엇인가 생각해 보자. 사람들은 왜 기독교 세계관에 그토록 목말라 하는지도 생각해 보자. 그것은 신학적(神學的) 피상성에서 신앙적(信仰的) 구체성으로 넘어가길 바라는 열망 때문이다. 오늘날 강단을 바라보며 성도들이 안타까워 하는 것이 무엇인가? 왜 정통 교회들은 이단과 신비주의에 성도들을 약탈당하고 있는가? 중요한 원인 가운데 하나는 모호한 신학과 교리의 논리만 난무할 뿐 현실성이 빈약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점차 피상적 강단 언어에 지쳐가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이 사건에 대한 증언이다. 기독교는 세계를 조망하는 높은 탑이 아니라, 세계의 한복판으로 파고드는 하나님의 돌발적 침입이다. 그것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체계가 아니라, 닫힌 현실을 찢고 들어오는 새 창조의 힘이다.”

이것이 실체 없는 유령이 아닌가? 구체적인 삶에 대한 제안 없이, 거창한 신학적인 구호는 뭔가 화려한 이상향을 제시하는 것 같지지만 정작 성도들의 머릿속에서는 “그래서, 복음의 사건, 하나님 나라의 사건이 나와 무슨 상관인데?”라고 의문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이것이 유령이 아닌가? 이런 유령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삶의 전 영역의 체계와 실천을 제시하는 기독교 세계관을 향해 유령이라 한다. 또 다른 편으로는 모순적이게도 복음을 축소하는 것이고 체계에 가두는 것이라 한다.

물론 복음이 위대한 사건이라는 것은 이해 한다.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성도들이 이 위대한 사건을 자신의 삶 전체에 어떻게 연동시킬 수 있는지 모르겠다고 호소한다는 데 있다. 이런 탄식은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교회에서의 삶과 가정, 직장, 속의 삶에 일관성 없음으로 드러난다. 그래서 기독교적인 세계관이 부재한 신자들은 자동적으로 이원론적일 수밖에 없다. 복음의 위대한 사건을 통해서 삶 전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통일된 일관적 관점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됨을 기대할 수 없다. 기독교 세계관이 하는 일은 올바른 성경적 관점을 제시하여 세계 전체를 하나의 관점으로 조망하도록 돕는다. 교회의 가르침과 일상의 삶에 일관성을 갖도록 하여 자유함을 누리게 한다. 이것이 기독교 세계관이 추구하는 바다.

그런데 <기독교 세계관은 없다>는 글에는 도리어 이것을 문제시 한다. 세계관은 “내가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의 문제지만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세계 안에서 무엇을 행하시는가”의 문제라고 꼬집는다. 이런 문제의식에도 질문을 던지고 싶다. 도대체 이 둘이 왜 충돌하는 관계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이 둘은 조화의 관계로 보는 것이 적절하지 않은가?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께서 세계 안에서 행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적으로 선명하게 보게 함으로, 그리스도인들이 세계를 바르게 보도록 돕는 것이다. 이 둘은 충돌의 관계가 전혀 아니다.

마지막으로 <기독교 세계관은 없다>는 글에서 한 가지만 더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그것은 이 글이 궁극적으로 의도한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기독교 세계관의 비 실재성을 지적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글이 반복해서 보내는 시그널은 기독교 세계관이 정치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주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문제 의식을 ‘정치 이데올로기’에 귀착시킨다.

기독교 세계관이 그리스도인들의 사고를 명료하게 만드는 것을 이데올로기라고 질책하는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비정상인지 알게 한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고, 맞는 것은 맞다고 주장하게 한다. 이런 명료한 사고 체계로 인해 기독교 세계관은 자연스럽게 오늘날 유물론적이고 무신론적이며 진화론적이고 반기독교적 정치관에 대해 저항하게 한다. 이 글은 이런 태도가 불편하다고 한다. 이것은 마치 교회 안에서 분별하는 사람을 향해 비판하지 말라는 말로 억압하는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논리다.

물론 기독교가 비정치적일 수 없는 종교라는 사실은 인정한다. 하지만, 기독교의 정치성은 “모든 권력이 심판받는다는 사실을 증언하는 신앙”이라는 피상적인 말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 한다. 또 “복음의 분별은 사람을 죽이기 위한 전선이 아니라 회개와 화해를 향한 부름”이라는 미사어구로 죄와 죽음과 어둠이라는 적과 싸워야 하는 복음의 치열한 전선(戰線)을 약화시킨다. 성경은 우리의 회개와 화해가 거룩한 전쟁의 결과로 주어지는 노획물처럼 가르치는 문구들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런 논리는 치열한 전쟁 없는 부드러운 화해만이 복음의 전부인 것처럼 떠올리게 한다. 이런 주장 속에서 우리는 “진리는 대결을 동반한다”는 신앙의 명제를 떠올리기 어렵게 된다.

결론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완전하지 않다. 여전히 많은 부분에서 개선의 여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세계관은 피상화 된 신학과 교리를 성도들의 삶 전 영역에 구체화 하기 위한 도전이라는 차원에서 칭찬받을만 하다. 성도들의 삶에 신학과 교리를 적용시키려는 기독교 세계관을 유령이라 지칭하는 것은 적절한 평가가 아니다. 도리어 피상적이고 거창한 신학적 용어와 비판만 있을 뿐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적용 없는 구호야말로 실체가 없는 유령이라 할 것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있다. 세계관이 없는 기독교라면 영혼 없는 빈 껍데기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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