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구 장로
김병구 장로 ©바른구원관선교회

한국교회는 오늘도 설교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묻고 계신다.

“내가 전하라 명한 말을, 너희는 왜 침묵으로 바꾸었느냐?”

하나님을 공적 영역에서 제거하려는 흐름이 분명해지고, 기독교 신앙이 혐오와 차별의 대상으로 규정되며, 교회와 양심을 국가와 문화의 통제 아래 두려는 압력이 점점 노골화되고 있음에도, 한국교회의 강단은 입을 닫았다. 이 침묵은 지혜가 아니다. 성경의 기준에서 보면 명백한 죄이며 직무유기요, 배교의 한 형태다.

하나님은 목회자를 연설가나 종교 관리자로 부르신 적이 없다. 그분은 분명히 파수꾼으로 부르셨다.

“네가 악인에게 경고하지 아니하면 그 악인은 자기 죄악 중에서 죽으려니와 내가 그 피 값을 네 손에서 찾으리라” — 에스겔서

파수꾼의 책임은 분명하다. 위험을 보면 경고하는 것이다. 문제는 몰랐을 때가 아니라 보고도 말하지 않았을 때 발생한다. 오늘날 한국교회 다수의 목사들은 상황을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고도 말하지 않는다. 이 침묵은 무지가 아니라 의도적 선택이다.

오늘날 강단에서는 “평안하다”는 말이 반복된다. 회개 없는 위로, 죄를 삭제한 사랑, 십자가 없는 은혜가 난무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설교를 어떻게 평가하시는가.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 예레미야서

하나님이 없는 평안은 거짓이다. 회개 없는 위로는 기만이다. 죄를 말하지 않는 사랑은 복음이 아니다. 그럼에도 한국교회의 강단은 불편한 진리를 제거하고 사람들이 듣기 좋아하는 말만 남겼다. 성경은 이미 이런 시대를 예언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진리를 떠나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 디모데후서

비극은 성도만이 아니다. 그 귀를 만족시키는 목사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 침묵의 뿌리는 신학이 아니라 두려움이다. 교회 분열이 두렵고, 헌금 감소가 두렵고, 사회적 비난이 두렵고, 자신의 자리가 흔들릴까 두렵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상황을 먼저 계산한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 잠언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하는 순간,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그는 종교 종사자일 뿐이다. 성경 어디에도 침묵으로 시대를 섬긴 선지자는 없다. 엘리야는 왕 앞에서 침묵하지 않았고, 예레미야는 국가 정책을 비판했으며, 세례 요한은 권력자의 죄를 지적하다 목숨을 잃었다. 사도들은 선언했다.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 사도행전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는 하나님보다 상황에 순종하는 법을 더 잘 배웠다.

하나님은 마지막 날 이렇게 묻지 않으실 것이다. “왜 교회가 작아졌느냐?” “왜 사회적 평판을 잃었느냐?” 대신 이렇게 물으실 것이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내 이름이 짓밟힐 때 어디에 있었느냐?” “파수꾼으로 세웠거늘 왜 나팔을 불지 않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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