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진 전도사
김윤진 전도사(달라스 세미한교회)가 최근 얼바인온누리교회 금요철야 기도회에서 간증집회를 가졌다. ©얼바인온누리교회
'아무것도 두려워말라' 찬양으로 잘 알려진 김윤진 전도사(달라스 세미한교회)가 최근 미국 얼바인온누리교회(담임 박신웅 목사) 금요철야 기도회에서 간증집회를 이끌었다.

미국으로 이주한 지 1년 3개월이 되었다는 김 전도사는 학교 폭력과 왕따로 얼룩졌던 어린 시절, 자살 시도 끝에 만난 하나님, 그리고 찬양 사역자로서 절정의 순간에 찾아온 목소리의 질병까지, 수많은 어둠으로 점철된 자신의 삶을 고백하며, 모든 소망이 끊긴 것 같은 순간 그를 회복하신 주님의 은혜를 나누었다.

태중에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보호하심

김윤진 전도사는 자신이 계획되지 않은 '늦둥이 막내딸'이었다고 소개했다. 당시 산아제한 정책과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부모님은 낙태를 결심하고 수술 날짜까지 잡았었다. 그러나 수술하러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이웃과 구세군 교회 전도사의 만류와 기도로 수술을 포기하게 되었다.

김 전도사는 "어머니가 낙태를 결심하고 병원으로 향할 때마다 누군가 나타나 기도를 권했고, '이 아이가 나중에 큰일을 할 것'이라며 막아서셨다"며 "하나님께서는 내가 태어날 때부터 나를 지키시고 보호하셨음을 성인이 되어서야 깨닫게 되었다"고 전했다.

지옥 같았던 학창 시절과 십자가 사랑의 음성

모태신앙으로 자랐지만, 그녀의 유년 시절은 고통 그 자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된 따돌림은 학년이 올라갈수록 심해져 전교생의 괴롭힘으로 이어졌다. 책상과 의자가 사라지고, 도시락이 버려지는 것은 예사였으며, 중학교에 진학해서는 폭언과 폭행까지 당해야 했다.

초등학교 3학년, 사소한 다툼 하나로 시작된 왕따는 6년간 계속됐다.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욕이 날아들었다. 책상과 의자는 쓰레기통에, 때로는 학교 참고에 버려졌다. 더 일찍 와도 괴롭히는 아이들은 그보다 더 일찍 왔다. 점심시간은 양호실에서 배고프다고 거짓말하며 보냈다.도시락은 하수구에 버렸다. 중학교에 가도 달라진 건 없었다.폭행은 더 심해졌다.화장실에 갇혀 맞을 때, 수백 명이 유리문 너머로 구경했다. IMF로 아버지는 실직, 집은 점점 더 가난해졌다.아버지는 작은 트럭 하나로 전국을 돌며 돈을 벌었지만, 가족은 10년 넘게 아버지 얼굴을 보지 못했다.

김 전도사는 "그때 제게 남은 건 교회밖에 없었어요.'하나님이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그 말 하나로 버텼습니다."라고 회상했다.

"언니 둘, 엄마, 저 이렇게 넷이 누울 수 있는 단칸방에 살고 있었는데 그 단칸방에서도 나와야 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가사도우미로 일하셨던 어머니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어머니가 일하시는 집에 함께 들어가자고 하셨다.

"어머니께서 물어보셨어요. '윤진아, 너 같이 갈래? 거기 가면 먹는 것도 더 좋고 자는 것도 더 좋고' 이런 이점들을 얘기해 주셨어요."

그렇게 어머니께서 일하게 되신 곳으로 함께 들어갔게 됐다. 처음에는 엄마 말이 진짜 다 맞았다.

"매끼 반찬이 다르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하고, 화장실 욕실 바닥도 번쩍번쩍했습니다. '와 엄마 말이 진짜 맞았구나. 그래 여기서 엄마랑 이렇게 행복하게 살면 되겠구나'"라고 철없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점차 시간이 흘러가면서, 집안에서도 눈치를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배가 고픈데 냉장고 문을 열까 말까, 자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서 깼는데, 화장실을 갈까 말까? 그러면서 그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불편해졌습니다."

엄마의 강도 높은 노동의 모습들을 목격하며 마음에 멍이 들었다. 엄마를 고용한 이들이 엄마를 비인격적으로 대하는 태도들을 자신의 눈으로 목격하면서 그 안에 원망과 분노가 켜켜이 쌓였다.

'한평생 우리 엄마 저렇게 기도해도 아무 소용도 없구나.'

"너무나도 일상적이고 활기찬 아침 풍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침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 제 모습은,18살 고등학생이 머리가 막 다 헝클어져서 술 냄새를 풍기면서 창문에 기대서 아침 풍경을 멍하니 보고 있는 거죠. 살고 싶지 않은 거예요. 이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나 같은 건 없어지는게 낫겠다. 난 가망이 없어. 난 엉망 진창이야. 마치 낭떨어지 끝에 흔들흔들 위태롭게서 있는 것처럼 그렇게 위험한 시간들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삶의 벼랑 끝에서 그녀를 붙잡은 것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이었다. 자살을 시도하려던 찰나, 그녀의 마음에 "윤진아, 내가 너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네가 죽으면 나는 어떡하니?"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김 전도사는 "그 음성을 듣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머릿속에 그려졌다"며 "그 사랑을 깨닫고 용기를 얻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다시 교회로 돌아갔지만, 상처는 쉽게 아물지 않았다. 교회 전도사님께, '이런데도 저를 용서해 주실까요? 저를 사랑해 주실까요?' 라고 물으며 엉엉 울었다.

전도사님은 그의 손을 꼭 붙들고 땀을 뻘뻘 흘리시면서 기도를 시작했다. 그 기도는 아주 오랫동안 계속됐다.

"굉장히 오래 기도하셨어요. 아무래도 용서하기 쉽지 않은 죄였나 봐요. 그렇게 기도하시던 중에 전도사님께서 제 귀에 대고, 말씀해 주셨다. '윤진아, 죄에는 크고 작음이 없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덮지 못할 죄가 없다."

찬양 사역자에게 찾아온 시련, '연축성 발성 장애'

그는 회복의 과정을 거쳐 찬양 사역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성교회에서 예배 인도자로 섬기던 중, 2016년 '연축성 발성 장애'라는 희귀 난치병 진단을 받았다.

의사는 "노래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완치가 불가능하며, 노래를 계속하면 말하는 목소리조차 잃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찬양 사역자에게, 목소리를 잃는 다는 것은 사망 선고와 다름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 고쳐달라고 떼를 쓰며 울부짖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달랐다. '윤진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도 괜찮아. 너는 삶으로 내게 노래하는 사람이잖아'라고 하셨다.

"그때 비로소 찬양은 가사와 멜로디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인식하며 살아가는 삶의 모든 순간이 예배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난은 날씨와 같은 것...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현재는 일주일에 한 번 찬양하고 엿새를 회복하는 방식으로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병은 완치가 불가능하지만, 감사를 선택했다.

김 전도사는 "내게 목숨도 아끼지 않으신 하나님이신데, 이 일 또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 안에 있음을 신뢰한다"고 고백했다.

끝으로 그녀는 "인생의 고난은 날씨처럼 누구에게나 찾아온다"며 "고난의 이유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선하시며 우리의 목자가 되신다는 사실"이라고 고백했다.

"내 인생이 화려한 건축물 같기보다, 하나님의 은혜와 추억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손때 묻은 사진첩' 같은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며 "어떤 아픔 속에 있더라도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주님만을 의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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