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강서교회 김창환 목사
김창환 목사

마틴 루터(1483-1546)

종교개혁 508주년을 맞이하면서 종교 개혁을 일으켰던 마틴 루터의 삶과 종교개혁의 전반을 살펴보기로 한다.

[어린 시절]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1483년 독일 작센안할트주 아이슬레벤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더(Hans Luder)와 어머니 마르가레테 린데만(Margarethe Lindemann) 사이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교회의 타락을 묵인하지 않는 신념의 기독교인으로 알려져 있다. 루터는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문장에 부담을 느낄 만큼 엄격한 아버지의 그늘에서 자랐다고 한다. 그래서 진로문제도 자신의 적성과 흥미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정해야 했는데, 루터의 아버지는 아들을 법류가가 되게 하여 사회적 성공을 하게 하려고, 에르푸르트 대학교에 입학시켰다. 그곳은 세계적으로 엄청난 법률가들만 모이는 단체다. 루터는 교양학부에서 삼학(三學, 라틴어: trivium)과 사학(四學, 라틴어: quadrivium)을 마치고서 1502년 9월 문학 학사학위, 1505년 1월 17명 가운데 차석으로 시험에 통과하여 문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루터는 예비학교를 마친 5월에 본격적으로 법 공부를 시작했다.

[회심]
루터가 대학교에서 공부를 계속하던 중, 집에 갔다가 에르푸르트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7월 2일 슈토테르하임 인근에서 벼락이 떨어지는 순간 루터는 땅으로 엎어지면서 광부들의 수호성인을 큰 목소리로 불렀다. 성 안나(성모의 어머니)여, 나를 도우소서! 저는 신부가 되겠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려는 생각이 이미 무르익었던 터라 루터는 뇌우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받아들이는 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루터는 자신의 기대에 어긋나는 아들의 진로 변경에 좌절을 느낀 부친의 분노어린 반대에도,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Erfurt)에 있는 "아우구스타누스도 수도회” 소속 “검은 수도원”에 입회하여 수사신부가 되었다.

[로마 방문]
루터는 1510년에 로마를 방문했다. 그는 로마 방문에 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 도착하자마자 땅에 엎드려 두 손을 들고 말했다. “거룩한 로마여, 인사를 받으소서! 순교자들의 피로 인해 세 번 거룩하도다.” 루터는 영적인 경험을 원했고, 6명의 교황 묘와 8만 명의 순교자 묘지를 방문했다.

성 십자가 계단(Scala Sancta)
[성 십자가 계단(Scala Sancta)]
로마를 방문한 가톨릭 수도사들은 종종 Scala Sancta(거룩한 계단)라는 장소를 찾았다. 전통에 따르면, 이 계단은 예수님이 수난길에서 빌라도 법정(Praetorium)으로 올라가던 바로 그 계단이라고 전해졌다. 계단은 4세기에 성녀 헬레나가 로마로 가져왔다고 한다. 총 28개의 흰 대리석 계단으로, 지금은 나무로 덮여 있다. 계단 옆에는 골고다 산에서 가져온 흙 위에 세운 교회가 있다. 당시 가톨릭 교회는 이 계단을 무릎으로 올라가며 적절히 기도하면 연옥에 있는 영혼을 위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다고 가르쳤다. 계단을 오르며 ‘주기도문’을 외우면 연옥의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고 했다. 루터도 할아버지 린데만 루터(Lindemann Luther)를 연옥에서 구원하기 위해 이 의식을 수행하고자 했다.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며 체험한 깨달음]
루터가 무릎으로 계단을 오르던 중, 마음 깊은 곳에서 천둥 같은 목소리를 들은 듯했다고 전해진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는 놀라움과 함께 계단에서 일어났고, 개인적인 공포와 수치심을 느꼈다. 전설에 따르면, 루터는 외쳤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 루터는 나중에 이 경험에 대해 이렇게 썼다. “비록 나는 거룩하고 흠 없는 수도사였지만, 내 양심은 고통과 괴로움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나님의 정의’라는 말을 견딜 수 없었고, 죄인을 벌하시는 거룩한 하나님을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그분을 몰래 분노하며 미워했다. 이미 원죄로 잃어버린 비참한 피조물에게 율법과 인생의 고통으로 공포를 주고, 복음으로 더욱 괴롭게 하는 그 하나님을 싫어했다. 그러나 성령으로 인해 나는 이 말씀을 깨달았고, 죄인의 의롭다 하심이 오직 주님의 순수한 자비와 믿음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배웠을 때, 나는 새 사람이 된 듯 살아나 하나님 나라에 열린 문으로 들어갔다. 그때부터 나는 성경을 새 눈으로 보게 되었고,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많은 구절을 수집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정의’라는 말을 마음속 깊이 싫어했지만, 이제는 그것이 가장 달콤하고 위로가 되는 말임을 알게 되었다. 진실로, 이 말은 내게 천국으로 들어가는 참된 문이었다.” 루터'는 어느 날 밤 자신의 죄 때문에 참으로 아픈 마음을 안고 잠들었다. 꿈속에서 천사가 흑판 위에 '루터'의 모든 죄를 낱낱이 열거하고 있었다. 루터가 절대로 용서받을 수 없다는 절망 가운데 빠져 있을 때 열거된 모든 죄목 위에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라는 말씀이 기록되었고, 기록하던 대못에 찔린 손에서 붉은 피가 떨어져 내리고 모든 죄의 기록을 깨끗이 지워버리는 것이었다. 루터는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되었음을 깨닫고 활개 치듯 기쁜 마음으로 깨어났다.

[로마와 가톨릭 교회에 대한 실망]
루터는 이후 교회와 로마 자체에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는 이렇게 기록했다. “하나님이 교회를 세우시면, 마귀는 바로 옆에 예배당을 세운다. 믿기 어렵다. 로마에서 얼마나 악행이 자행되는지 직접 보고 들어야 믿을 수 있다. 지옥이 있다면, 로마 위에 지어졌다. 모든 죄가 여기서 비롯된다. 한때 가장 거룩했던 도시는 이제 최악이 되었다. 나는 이 끔찍한 감옥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나는 로마에 양파를 가져갔고, 마늘을 가져왔다.” 루터의 로마 방문은 큰 실망으로 끝났다. 그가 발견한 것은 부패한 가톨릭 교회였다.

독일 드레스덴에 위치한 마르틴 루터 동상.
독일 드레스덴에 위치한 마르틴 루터 동상. ©Robert Mandel/ iStock

마틴 루터의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조의 반박문
[종교개혁의 출발]
이 사건 이후 약 7년 후인 1517년 10월 31일 루터는 독일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95개 조의 반박문을 붙인 사건부터였다. 루터는 성경의 권위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함으로써 부패한 교회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루터가 내건 개혁의 강령은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 오직 성경), 솔라 그라치아(Sola Gratia, 오직 은혜), 솔라 피데(Sola Fide, 오직 믿음)’의 세 가지였다. 이 라틴 말들의 의미는 진리를 판단하는 최종 권위는 교회가 아니라 ‘성경’이며, 구원은 인간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것으로 ‘믿음’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루터가 10월 31일에 이 일을 결행(決行) 했을까? 그 이유는 11월 1일은 ‘만성절(萬聖節, All Saints' Day)’이라고 불리는 모든 성자의 대축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날은 성인으로 칭호를 받지 못하고 죽은 성도들도 함께 추모하는 날이었다. 만성절에 교회 지하에 있는 성인들의 유골을 개방하면 유골을 만지고 입을 맞추며 경배하였다. 이러한 행위가 연옥에 머물고 있는 죽은 조상의 영혼을 천국에 보낼 수 있다고 믿었다. 이 얼마나 미신적인 날인가? 루터는 이러한 만성절의 미신적인 행동을 없애기 위하여 10월 31일 종교개혁을 시작했다. 루터의 일생에 중요한 경험이 있었다. 1505년 7월, 벼락의 경험을 통해 부르심을 받았고, 약 10년 후, 기도탑의 경험을 통해 칭의를 깨닫게 되었다. 사람이 죄 용서함을 받는 것은 돈이나 선행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입혀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음으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루터는 교황에게 죄를 사하는 권세가 없고, 돈을 받고 면죄부를 줌으로 내세의 문제에 관여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래서 루터는 만성절 전야, 10월 31일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적어 비텐베르크 교회 정문에 박아 붙여놓았다.

[파문]

루터는 1521년 1월 3일 교황으로부터 가톨릭 교회에서 영원한 추방(파문)을 선고받았다.

[종교개혁의 영향]
루터의 종교개혁은 단순한 종교적 운동을 넘어 사회와 정치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장은 당시 유럽의 여러 왕국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 많은 지지자들을 결집했다. 루터는 "오직 성경"이라는 원칙을 내세움으로써 신자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 이러한 주장은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독일 비덴베르크의 루터하우스에 있는 루터 성경
[성경 번역]

루터의 신학과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요소이다. 루터의 신학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세 가지 원리를 중심으로 하며, 이는 중세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했다. 루터는 성경이 모든 신자들에게 읽히고 이해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성경이 라틴어로만 존재하는 현실이 일반 신자들이 성경을 접하는 데 큰 장애가 된다고 보았다. 따라서 루터는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신자들이 직접 성경을 읽고 이해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루터는 1521년 보름스 회의 이후 바르트부르크 성에 피신한 동안 신약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는 헬라어 원문을 바탕으로 번역 작업을 진행했으며, 신약 성경 번역은 1522년에 완료되었다. 이 번역은 곧 인쇄되어 널리 보급되었으며, 많은 신자들이 독일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신약 성경 번역 후, 루터는 구약 성경 번역에 착수했다. 그는 히브리어 원문을 바탕으로 번역 작업을 진행했으며, 동료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번역의 정확성을 높였다. 구약 성경 번역은 1534년에 완료되었으며, 이는 독일어 성경 전체의 완성을 의미했다. 루터의 신학과 그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종교개혁의 핵심적인 요소로서, 기독교 신앙과 생활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의 신학적 사상은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라는 세 가지 원리를 중심으로 하며, 이는 중세 교회의 교리와 실천에 근본적인 도전을 제기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신자들이 성경을 직접 읽고 이해할 수 있게 함으로써, 종교개혁 운동을 더욱 활발하게 만들었다. 그의 신학과 성경 번역은 교회와 사회 전반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현대 기독교 신학, 독일어와 문화, 세계 성경 번역 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와 〈캐서린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 1499-1552〉
[독신주의에서 결혼]
1525년 6월 13일, 온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하는 결혼식이 있었다. 이 결혼식이 놀라움을 준 이유는 결혼 당사자들이 가톨릭 교회의 신부와 수녀였기 때문이었다. 이 결혼식의 주인공은 당시 42세였던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와 26세였던 <캐서린 폰 보라, Katharina von Bora, 1499-1552>였다. 루터는 신부로 살다가 결혼한 이유에 대하여 늙으신 아버지께 손주를 안겨드리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진짜 이유는 신앙적인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가르쳐 온 것을 실천으로 확증하고 싶었다. 왜냐하면 복음으로부터 오는 엄청난 빛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소심한 채로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기를 원하신다." 그는 가톨릭 교회의 신부로서 교회의 타락을 보아왔다. 당시 가톨릭 교회의 신부들은 독신으로 살았다. 독신주의를 최초로 공식화한 것은 1007년 <교황 그레고리 7세> 때였다. 그러나 훨씬 이전부터 수도원 등에서 독신주의를 장려해 왔다. 그러나 후에 이로 인한 많은 문제가 생겼는데, 육체적 욕망을 참지 못한 성직자들이 성적 추문을 만들어낸 것이었다. 심지어 교황과 추기경 같은 고위 성직자들이 숨겨둔 여인을 두고 많은 사생아들을 낳게 되었다. 예를 들어 <로드리고>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발렌시아의 대주교였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의 고모가 그의 어머니라는 사실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동생과 관계를 가져 로드리고를 낳은 것이다. 그 후 로드리고는 아버지 후광으로 불과 25세에 대주교가 되었고, 교황 <인노센트 8세, 1484~1492>가 죽은 후, 그 뒤를 이어 교황이 되었는데, 그가 바로 <알렉산더 6세, 1492-1503>였다. 그는 교황의 자리를 얻기 위해 교황 투표에서 반대표를 던진 사람에게 12살 밖에 되지 않은 딸을 내주고 다음 투표에서 한 표를 얻기도 했었다. 이것이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의 가톨릭 교회의 타락상이었다. 루터는 이런 타락상 앞에서 고심했다. 독신주의를 고집한 이유는 주님의 일에 집중하겠다는 본래적 의도보다는 오히려 독신이란 것으로 인해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존경을 받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업적]
루터는 종교 개혁을 통해 중세 가톨릭 교회의 전통을 뒤흔들고, 현대 기독교의 초석을 놓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사상은 종교뿐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깊은 영향을 미쳤으며, 자유와 평등, 인간의 주체성에 대한 현대적 사상에도 큰 공헌을 했다. 루터는 1546년 고향 아이슬레벤에서 사망하였으며, 그의 유해는 비텐베르크 교회에 안치되어 오늘날까지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마틴 루터의 신조 10가지]
종교개혁자 루터에게 어느 날 후배가 찾아와 “어떤 목회자가 진정한 하나님의 종입니까?”라고 물었다. “경건한 사도가 되어야지. ”영성을 제외한 실제 목회 생활에 대해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자 루터는 수첩을 꺼내 거기에 적혀 있는 ‘자기 신조 10가지’를 말해 주었다."
1. 목회자는 쉬운 말로 설교하고 질서 있게 가르쳐야 한다.
2. 훌륭한 머리가 있어야 한다(지식과 지혜를 바탕으로 한 종합적인 사고가 있어야 한다)
3. 분명한 발음 등 언어사용에 능숙해야 한다.
4. 좋은 목소리가 있어야 한다(진실한 목소리, 설득력 있는 목소리를 갖춰야 한다)
5. 좋은 기억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6. 그만둘 때를 알아야 한다.
7. 자기가 하려고 하는 말에 확신이 있어야 한다.
8. 진실을 위해 몸, 영혼, 재물, 명예를 바칠 각오를 해야 한다.
9. 부지런히 공부해야 한다.
10. 고난과 비난을 참고 견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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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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