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독일보는 김철홍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신약학)가 최근 서울 서현교회 교육관에서 열린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제316회 월례세미나에서 ‘우남 이승만의 기독교 개종과 기독교가 그의 정치사상에 준 영향’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논문을 연재합니다.
6. 우남의 기독교 정치사상에 대한 평가
1) 바울의 자유인의 개념
바울이 말하는 자유인의 개념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갈라디아서 4:31-5:1)”에 잘 나타나 있다. 바울은 기독교인은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라고 주장한다. 그가 ‘노예와 자유인’을 대조할 때,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복음’을 대조한다. 율법주의의 강령은 ‘행하라 그러면 구원받으리라’이다. ‘행하라’의 목적어는 율법이고, 그것은 곧 선(善)을 행하는 선행(善行)이다. 율법주의에서 선행은 구원의 조건이다. 율법을 지켜 선행을 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인간에게 선행을 강요한다. 인간은 비자발적으로 마지못해 피동적으로 선행을 하게 된다. 율법주의 안에서 선행은 각각의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자발적인 행동이 아니다. 자율성이 없다. 강제와 타율성이 인간을 지배한다. 율법주의는 하기 싫어도 주인이 시키므로 억지로 일을 하는 노예와 같은 인간을 만들어낸다. 바울이 유대교의 율법주의를 문제 삼는 것은 행위 구원이 결국 우리를 ‘노예의 삶’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복음은 행위구원이 아니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나를 대신하여(substitution) 내가 받아야 할 모든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것을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는다. 그리스도인에게 선행과 율법준수는 구원의 조건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을 다 지키지 않았지만, 미래의 최후의 심판대에서 심판장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판결이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경되었다. ‘의롭다’ 판결로 변경되었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로마서 4:5)”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일’ 즉 선행을 하지 않았으므로 원래는 ‘경건하지 않은 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의롭다’는 선언을 미리 앞당겨서 받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이제 더 이상 율법 아래 묶여 있는 노예가 아니다. 자유인이다. 자유인이므로 선택권이 있다. 자유의 본질은 선택과 결정권이다. 그리스도인은 ‘선행’을 하면서 살아갈지 아니면 계속 ‘악행’을 하면서 살아갈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결정권을 갖고 있다. 이를 선택하는데 강요가 전혀 없다. 오직 자율적인 판단과 결정이 있을 뿐이다.
선행은 더 이상 구원의 조건이 아니지만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선행을 하는 삶을 살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앞으로 그가 하는 선행에 대한 보상은 없다. 왜냐하면 선행을 하면 구원받고, 안하면 구원을 못 받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주의 안에서 선행에는 보상(reward)이 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로마서 4:4)”라는 말씀이 바로 이점을 지적한다. ‘일하는 자’ 즉 ‘선행을 하는 자’ 혹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자신이 한 선행에 대해 ‘급여’(삯)를 요구하게 된다. 하나님께 자신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구원을 요구한다. 행위/일(work)이란 것은 늘 보상(reward)을 청구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선행을 하고 나서 ‘보상’(reward)을 청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일하지 않았는데도 넘치는 보상을 이미 다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 하는 선행은 일(work)이 아니라 봉사(service)다. 행위와 일(work)은 보상(reward)을 요구하지만, 봉사(service)는 보상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율법주의는 노예를 만들어내고, 노예는 타율에 의해 선행을 하고 구원이라는 보상을 청구한다. 하지만 복음은 자유인을 만들어내고, 자유인은 자율에 의해 봉사로 선행을 하는 삶을 산다.
2) 루터의 자유인의 개념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쓴 이래 이런 자유인의 개념을 가장 먼저 잘 이해한 사람은 마틴 루터다. 그가 95개조 반박문을 쓴 지 3년 후인 1520년에 쓴 『기독교인의 자유』 첫 머리에 그는 이런 두 개의 명제를 제시한다. 사실 『기독교인의 자유』란 책은 이 두 개의 명제에 대한 해설이다.
1)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의 우위에 서는 자유로운 군주로서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다.
2) 그리스도인은 모든 이에게 봉사하는 하인으로서 모든 이에게 종속된다.
첫 번째 명제는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자유인의 원리다. 그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다. 한 명, 한 명의 그리스도인은 각각 개인으로서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 명의 그리스도인은 한 명의 ‘자유로운 군주’다. 두 번째 명제는 자유인이 된 그리스도인이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서 지키는 봉사의 원리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에 있는 노예가 아니라 자유인이지만, 본인 스스로의 결정에 의해 모든 사람을 섬기는 ‘하인’이 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웃)을 섬기고, 사회를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봉사의 삶을 살기로 하였기 때문에 ‘모든 이에게 종속된다.’ 바울이 말하는 바를 이보다 더 명쾌하게 요약할 수는 없다. 여기에 ‘자유인 vs. 노예’의 대조가 ‘군주 vs. 하인’의 대조로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되어 있다. 자유로운 군주이면서 동시에 봉사하는 하인이라는 루터의 선언은 바울의 자유인의 개념의 핵심을 찌른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가톨릭교회와 개신교 교회, 두 가지가 생겨났다. 가톨릭교회만 있을 때에는 개인이 교회를 선택하려해도 선택할 수가 없다. 하지만 개신교 교회가 등장함에 따라 선택이 가능하게 되었다. 더 나아가 루터가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함으로 각각의 개인이 성경을 직접 읽고 교황의 설명이 성경적인지, 루터의 설명이 성경적인지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개인은 그 복음을 믿을 것인지, 아니면 믿지 않을 것인지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심지어 자신의 구원조차도 신(神) 앞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게 되는 존재가 됨으로써 종교개혁은 근대적 사상에 형이상학적 기반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종교개혁은 근대적 의미에서 ‘자유로운 개인’이 등장한 첫 사건이다.
로마 가톨릭 교황은 정신적 전제군주와 같고, 가톨릭 신자들은 정신적 노예상태에 있었다. 가톨릭의 구원 교리는 개신교처럼 은혜와 믿음으로만 주어지는 구원이 아니라, 윤리적 행위가 구원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요인이므로 유대교의 율법주의와 그 종교적 패턴이 유사하다. 그러므로 가톨릭은 노예를 만들어내고, 개신교는 자유인을 만들어낸다. 루터가 바울을 결정적으로 이해하고, 종교개혁으로 나아가게 된 것은 ‘유대교 율법주의 vs. 복음,’ 그리고 ‘노예 vs. 자유인’의 대립 구도 안에서 ‘가톨릭 vs. 개신교’의 대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의 원리에 의해 정신적 절대왕정인 가톨릭교회가 무너졌다. 정신적 절대왕정이 무너졌으므로, 향후 시민혁명을 통해 정치적 절대왕정이 무너지는 것은 역사적 필연이 되었다. 왜냐하면 정신적 절대왕정을 무너뜨린 개신교도들의 후예들이 정치적 절대왕정을 허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이 자유인의 개념에서 근대의 자유로운 개인이 유래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독교인들이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바울이 말한 것의 핵심을 루터가 깨달았을 때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종교개혁으로 인해 근대 시민혁명이 일어났고, 그 결과 현재의 자유인의 제도인 자유민주주의와 자유시장 경제제도가 생겨났는데 사실 많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이 점을 잘 모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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