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에는 “자칭 지도자라 칭하지 말라”(마 23:8-10)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1차적으로 교만하지 말라는 뜻이지 지도해 가는 헌신과 의지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다. 구약을 보면 모세, 아론, 여호수아, 다윗, 엘리야 같은 인물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지도자들로서 자신을 헌신한 인물들이었다. 그런데, 이런 지도자들의 삶을 보면 몇몇 특징이 있다. 그것은, 지도자들은 늘 고독한 환경 속에 살았다는 것이다. 지도자라 하면 따르는 사람들이 있음을 뜻하는데, 따르는 사람들이 있으니 뭐가 고독하냐 반문 할 것이다. 사회를 바라봐도 그렇다. 지도자가 되면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고,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본다. 뜻이 맞을 수도 있어 모이고, 무엇에선가 자기의 이익을 무언중에 얻기 위해 모여 들기도 한다. 그렇게 함께 생각하고 활동하므로 절대로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사실 그렇지 만은 않다. 거기에는 그럴만한 몇몇 이유들이 있다.
첫째, 최후 혼자 결정해야 한다. 주변에 인물들을 두어 어떤 사안이 있으면 물어보기도 하고, 견해를 들어 보기도 한다. 이런 저런 아이디어를 제공받기는 하지만, 최종 결정은 자신이 내려야 한다. 의견, 상황파악 후 자신이 판단을 내려 결론을 내고 실행에 옮겨야 한다. 여기에는 많은 고민이 따른다. “바른 판단일 수 있을까”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언제부터 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들이다. 지도력이 약하거나, 사안이 중대하면 고민이 깊어지거나 길어질 수 있다. 이런 것을 재치있게 효과적으로 판단을 내려야 하는데, 이를 잘 하는 사람을 훌륭한 지도자라 하는 것이다.
둘째, 지도자가 힘든 것은 자신의 결정 후에 발생하는 사안들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대표일 때는 많은 사람들을 거느리거나 지시할 수는 있으나, 모든 일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신만이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도 같이 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떤 사안에 부정적인 결과가 나오면 주변의 인물들 대부분 회피하거나 부정하기도 하여 결국 혼자 남게 되기 때문이다. 설령, 영광을 누리는 결과가 나온다 해도 그 영광을 나누어 가지려는 입장들 때문에 오랫 동안 기쁨을 같이 하기 어렵다.
지도자들의 고독의 심정은 구약성경 예언자들을 통해 잘 이해 할 수 있다. 예언자들이란 야훼 하나님 사상을 바탕으로 도덕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인들로서 바른 삶을 늘 강조한다. 구약을 보면 이스라엘인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이방 여인들과 부적절한 생활을 하며, 야훼 하나님 신앙을 버리고 살아, 이를 탓하는 역할을 예언자들이 했다. 듣기 싫은 말을 하니 대중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심지어 배척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야웨 신앙을 이끄는 유대교 종교 담당자들이 있었으나, 그들은 종교를 가장하여 세속인들과 세상을 즐기는 일들을 했다. 야웨 하나님을 믿지 않는, 오히려 바알을 숭배하는 권력자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즐거운 생활을 했다. 하나님 앞에서 공의나 정의를 행하는 일에 무관심 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책망하는 역할을 한 것이 예언자들이었다. 어느 불신앙의 순간, 누구하나 협조하거나 뜻을 세워 보려 하지 않는 상황에서 혼자 하나님의 말씀을 실현하거나 사회정의를 수립하려 노력했던 것이 예언자들이었다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건이 이스라엘 아합왕 시대의 엘리야와 왕궁에서 활약하던 바알 선지자들과의 싸움이라 할 수 있다. 우상숭배자들인 바알 선지자 및 아세라 선지자 850명에 대한 엘리야 혼자의 도전, 과연 어찌 외로운 싸움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자신 포함 850명의 동료들이 있다 할지라도 싸움에는 항상 두려움이 존재하는데, 또 최후 책임져야 하는 그런 임무가 있는 상황임에도 850:1의 싸움에 임한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정의가 이긴다는 확신이 있기에 두려움을 무릎쓰고 나가 싸워 이기고, 야훼 신앙을 회복시키는 큰 일을 했다. 그러한 당시 현상을 보면 힘들고 외로운 싸움이었다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이세벨의 반격에 그는 광야로 피신하게 되었다. 혼자 싸웠기 때문에 상황이 반전되어 피신도 혼자하게 되었다. 지치고 힘들어 로뎀나무 그늘에서 여호와께 ‘자신을 죽여달라’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지도자는 이렇게 혼자 결정하고, 혼자 책임지는 고독한 삶을 살게 된다.
지도자가 갖는 최후의 빛나는 사명 하나는 어떤 불리한 상황이나 여건이 조성된다 할지라도 끝까지 자신의 의지를 지킨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할 때, 많은 말들을 듣게 된다. 좋은 결과가 나와도 비난이나 비평 같은 것은 항상 존재한다. 심지어 생명에 대한 협박같은 것도 당하게 된다. 자신 혼자로서 이럴 때 보통 사람들은 그런 상황에서 벗어나 피하려 한다. 자신의 의지를 스스로 꺽어 고독이라는 어려움으로 부터 피하려 한다.
이런 현상에 대해, 또는 삶의 자세에 대해, 한국의 어느 통상교섭 전문가며, 정치인, 학자며 법률가는 이런 말을 인용했다.
“아마추어는 어떤 일을 하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가 오면 거기서 stop 하지만, 프로는 그때부터 시작한다.”
이 말이 지도자의 면모를 알려준다. 지도자는 프로다. 프로니까 지도자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현 상황을 보면, 여러면에서 사람을 피곤하게 만드는 일들이 일상속에서 벌어진다. 이런 것은 기독교 교계, 즉, 목회, 논문, 학술 이론에도 예외없이 벌어진다. 오늘날 교회가 듣는 안타까운 말, 제도, 행태들을 개선하려니 혼자서 외치는 격이라 힘들기 짝이 없다. 성경은 1점 1획도 인간의 의지나 지식으로 바꿀 수 없는데, 성경조차 인간 마음대로 직성이 풀릴 때까지 변경, 그릇 해석하거나 목회나 학문에 적용하는 사례가 많아, 정통성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는 심란함을 일으키게 하여 머리와 가슴이 아플 뿐이다. 잘못을 지적해도 교묘하게 둘러 대기 때문에 실망하게 되기도 한다. 그래서, 광야로 피신한 엘리야처럼 피곤하며 고독함을 느낀다.
그런데,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가 그러하듯 진정한 지도자는 거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자신의 곧은 의지, 불변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탕으로 바름을 세워 나간다.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지켜주시고, 뜻있는 인물들을 붙여 주셔서 그 뜻을 완성하게 하신다. 마치 엘리야가 로뎀나무 아래 지쳐 쓰러져 있을 때, 그의 주변에 7,000명의 지지자를 준비해 두셨다는 것처럼, 그리고 하나님이 미세한 음성으로 엘리야에게 물과 먹을 것을 가져다 주어 소생케 하신 것처럼 말이다. 이런 것을 보면 지도자는 절대 혼자가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아무도 지지 않으려는 죄의 짐을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여 본인이 지셨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리더쉽의 근본이라 하는데, 공감하는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로 혼자 결정하고, 혼자 모든 죄인의 죄를 담당하는 책임을 지심으로 지도자로서 모범을 보이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 지도자 정치 지도자 사회 지도자들, 저마다 자부심과 긍지를 갖는 우리들은 과연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 진정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지도자 인가를 스스로 자문자답 하되 구약의 모세와 여호수아 다읫과 느헤미야 엘리야, 신약에 베드로와 바울 사도, 그리고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존 칼빈, 존 웨슬리를 롤모델로 삼고 인간적으로는 고독하지만 하나님이 세상 끝날까지 나와 함께하심에 영광을 품고 모름지기 사명자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길 소원한다.
누구보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얼마나 외롭고 고독하셨을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했던 것은 하나님이 항상 나와 함께 하셨음이라”(John Wesley)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양기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