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횔덜린, 니체, 고호 1부> 중(PP. 214-217 & P. 230)

박현숙 목사
박현숙 목사

나도 아르카디아에서 태어났어 … 침묵하시는 하나님 - 오, 울어라, 나의 형제들이여 - 침묵하시는 신이 나의 횃불을 아래로 내리셨네 … 내가 주의 보좌 앞에 항의하오니 … 그 별에는 행복한 전설이 있었는데, 당신은 심판의 저울을 가지고 여기 좌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보복자라고 부르죠. 당신의 보좌 앞에서 나는 불평을 제기해, 가려진 판사여 … 자신을 보상이라고 부르지. 여기 - 그들은 말한다 - 사악한 자를 공포가 기다리고, 정직한 자를 기쁨이 기다린다고 … 다른 생에서 당신에게 갚을 것이다 … 나는 다른 생을 위한 지시를 받았고 … 꽃피는 자연 그 뒤에는 말라버린 시체가 남습니다. 땅과 하늘이 폐허로 날아갈 때, 이로써 당신은 성취된 맹세를 목도할 것입니다. 그 유대감은 죽은 자에게 있습니다. 세상은 비웃으며 웃었습니다. 독재자에게 고용된 거짓말쟁이가 진실을 위해 그림자를 제공했습니다. 이 환상이 끝나면 당신은 더 이상 없습니다. 조롱하는 뱀 군대가 건방지게 농담했습니다. 억압적 법령만으로 봉헌할 수 있는 광기 앞에서 떨고 있습니까? 당신의 신은 무엇입니까? 병든 세상의 계획에 따라 영리하게 고안된 구세주, 누가 인간의 재치를 인간의 필요에 따라 사용하는가? 속임수, 무력한 벌레같은 인생들을 향해 강력한 자에게 허락받은, 높은 탑에 불을 붙인 공포의 불, 몽상가의 상상력을 충동질하기 위해, 법의 횃불이 어둡게 타오르는 곳. 무덤이 우리를 덮은 미래는 무엇인가? 당신이 자랑하는영원? 영리한 덮개로 가리기 때문에 존경받는다, 우리 자신의 공포의 거대한 그림자, 양심의 두려움의 텅 빈 거울 속에서; 살아있는 인물들의 거짓된 이미지, 시간의 미라, 추운 무덤의 거주지에서 희망의 향유정신에 의해 지탱되어, 그것이 당신의 열광적인 광기가 불멸이라고 부르는 것인가? 희망을 위해 – 그러나 쇠퇴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한다. 당신은 어떤 재화를 포기했는가? 죽음은 육천 년 동안 침묵했습 니다. 시체가 무덤에서 일어난 적이 있었나요? 누가 복수자에 대해 말했나요? – … 죽은 사람은 무덤에서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 “두 꽃이여”, 그는 외쳤다. “들어라, 인간의 자식들이여 - 두 꽃이 현명한 선각자에게 피어난다. 그것들은 희망과 즐거움이라 불린다. 이 꽃중 하나를 따는 사람은 다른 자매를 원해서는 안된다. 즐겨라, 믿을 수 없는 사람은. 가르침은 세상과 같이 영원하다.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즐거움이 없어도 된다. 세계 역사는 최후의 심판이다. 당신은 희망했고, 당신의 보상은 갚아졌다. 당신의 믿음은 당신에게 주어진 행복이었다. 당신은 당신의 현자들에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이 순간부터 거부한 것은 영원히 돌려줄 수 없다.” (실러, 사임)

위 시에서 독실한 개신교적 집안에서 성장한 실러의 기독교 이해엔 ‘십자가’와 ‘부활’이나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는 “조롱하는 뱀 군대”인 사탄의 말을 빌려 우회적으로 자신의 기독교에 대한 불만과 갈등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기독교 신앙은, 인간이 지닌 양심의 두려움을 이용해, 시한부 선고를 받고 ‘공포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는 무력한 인간들의 헛된 영원을 향한 ‘맹목적인 광기’로 이해되고,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사랑의 주’가 아니라, 법과 심판이란 ‘공포의 횃불’을 들고 인간을 미혹하도록, 병든 세상이 교묘하게 ‘고안한 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실러에게 ‘불멸’이나 ‘사후 세계’란, 실상은 “시든 시체”와 같이 죽음의 “무덤에 덮힌 미래”인 것뿐이나, 헛되이 ‘부활’이란 희망적 믿음을 가지도록, ‘영원’이란 고상한 포장을 입힌 “거짓된 이미지”요, “박제된 시간”인 것입니다.

실러가 ‘무한’하다고 믿는 ‘세계 역사’가 그에게 “최후의 심판”이 되는 이유는, “믿는 자”는 이 세상에서 비록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여도, 사후 세계의 보상이란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므로 이미 이 세상에서 “행복”이란 보상을 받았기 때문이요, “믿지 않는 자”는 자유롭게 이 세상을 즐기며 살아가는 자체로써 이 세상에서 “즐거움”이란 보상을 충분히 받았기 때문이란 겁니다.

이런 실러의 영향을 받은 십대의 횔덜린의 신앙적 갈등과 폐해가 얼마나 큰 것이었을지를 우리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오늘날의 문학도나 문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편 횔덜린의 「시대의 책들」에는 이와는 다른 의미이나 유사한 구절이 나옵니다.

그리고 조롱하는 자여, 너는 조롱하느냐 / 춤추는 환희 속에서 여전히 끔찍한 심판대를?

생각컨대 실러에겐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바, 미래에 다가올 세계사의 종말과 더불어 일어나는 실제적인 “심판(마24, 눅21, 벧후3, 단 12)”에 대한 믿음이 없습니다.

‘최후의 심판’에 대한 실러의 불평과 항의는 앞선 「환희의 찬가」에서 ‘죄의 책의 파괴’와 ‘모든 죄의 용서’와 ‘지옥의 부재’를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실러의 신랄한 저항의 분출은 우리로 하여금 그의 영혼의 고뇌와 불안의 정도를 능히 짐작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요컨대 실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삼으시는 ‘성령’이 아니라, 그를 ‘공포’에 몰아넣는 “종의 영”을 받은 것입니다(롬8:15).

‘성령’이 부재한 실러는 하나님을 결코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었습니다(롬8:15)! 그런 그에게 믿음은 오로지 이 땅의 삶에만 국한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하는 ‘최후의 심판’은 신자나 비신자를 가릴 것 없이 저마다 이 땅에서 ‘즐겁게 사는 것’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참된 평안과 기쁨’을 사모하지 않고, ‘땅의 쾌락’만을 맛보고 살아가는 자들이 종국적으로 마시게 되는 ‘진노의 포도주’가 세세토록 이어지는 ‘불과 유황의 고난’인 것을 시인은 알지 못합니다(계14:10-12, 20:10, 15).

‘사탄’이 실로 교활한 증거는, ‘사탄’의 주된 일이 심판대 앞에서 ‘창조주 하나님’께 인간들을 신자와 비신자를 막론하고 밤낮없이 ‘정죄하고 송사’하는(욥1:9; 계12:10)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탄의 책략은 지상에서 신자로 하여금 끊임없는 죄책감에 빠져 낙망케 하거나, 불신자로 하여금 심판대를 부인토록 하여 ‘그리스도’ 없이 교만하거나 방탕한 삶을 살게 함으로써, 사후 ‘전능자’의 심판대 앞에 선 인간들의 죄를 정죄하고 송사하여 자기들의 최후 종착지인 ‘유황 불못’으로 함께 끌고 들어가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는 이미 ‘주님의 보혈’로 죄 사함을 받은 신분임을 확신하고, ‘전능자의 심판대’ 앞에서 신자의 ‘구원’을 위해 변호해주시는 ‘그리스도 예수’를 전폭적으로 신뢰해야 하며, 불신자는 어서 속히 주님의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 회개를 통해 반드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자녀들은 살과 피를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성을 지녔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죽음을 통해서 죽음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멸망시키시고 일생 동안 죽음의 공포에서 종살이하는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입니다(히2:14-15).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요일2:1b) (PP. 214-217)

소시적부터 신앙심이 깊었다던 실러가 그리스의 신들에게 미혹되어 영적 간음자가 되고 만 것은, 정치사회적으로, 종교적으로 불만족한 현실에서 제도적 개혁을 추구하려던 이상과 열심에 너무 경도된 나머지, 정작 그 자신의 ‘영혼의 경성’을 위해 살아계신 ‘성령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한 노력을 등한히 했기 때문일 겁니다.

결과적으로 실러의 영혼을 지배한 것은 ‘생명의 성령’이 아니라, ‘죄와 사망의 영’이었고(롬8:1-2), 그가 그토록 거추장스런 짐으로 여기고, 두려움 때문에 불만스레 꺼려하고 회피 내지 거부하고자 한 것은 하나님의 ‘심판의 저울’이었습니다.

결국 그의 영혼은 심판대를 조롱하는 “사탄의 군대” 에게 넘어갔습니다.

다재다능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진취적인 기상과 열정과 치열한 사고력이 있었으나 영적으로 실족한 실러의 상태는, 오늘날의 신자들에게 ‘구원의 기쁨’(시51:12)’과 ‘구원의 확신’(벧전1:9)과 진리의 ‘말씀 안의 자유함’(요8:31-32)이 그 얼마나 중요한가를 역설합니다.

미혹하는 자가 세상에 많이 나왔나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라 이런 자가 미혹하는 자요 적그리스도니(요2 1:7) (P. 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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