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대 사학과 윤영휘 교수
윤영휘 교수 ©경북대 사학과 홈페이지

2025년 기독교학문연구회 춘계학술대회가 ‘사회적갈등과 기독교세계관: 책임과회복’이라는 주제로 5월 31일 호서대에서 열렸다. 이날 주제 강연 중 하나로 윤영휘 교수(경북대 사학과)가 ‘윌버포스의 반노예제 운동: 사회적 갈등해소와 도덕자본의 정치’를 발제했다. 윤 교수는 “노예무역 폐지운동은 17세기부터 등장한 과학혁명, 이신론, 계몽주의 등으로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상실하던 기독교가 세속화에 적극 대응하던 하나의 계기였다”며 “영국 복음주의 정치가들은 사회개혁을 통해 기독교적 가치를 정치의 영역으로 가져갈 기회를 발견하게 됐다. 그 시작은 바로 윌리엄 윌버포스의 등장이었다”고 했다.

이어 “윌버포스는 1759년 영국 북동부 항구도시 헐에서 은행업을 장악한 부유한 집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노예선 선장이었다가 복음주의 성직자가 된 존 뉴턴은 윌버포스의 큰아버지였다”며 “윌버포스는 24세의 나이로 영국 요크셔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그러던 중 윌버포스는 당시 가족 유럽 여행에서 동행한 캠브리지대학 수학과 교수이자 성직자 아이작 밀러와의 논쟁, 그리고 그와 함께 가졌던 독서 토론을 통해 진정한 회심에 이르게 됐다”고 했다.

그러면서 “1785년 11월 윌버포스는 자신이 하나님을 위해 살려면 세상을 등져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나, 그의 정치적 동지이자 훗날 영국 총리로 재임한 피트는 윌버포스에게 정치 속의 성자가 될 것을 권면했다”며 “그의 큰아버지 존 뉴튼 또한 세상과의 고리를 끊지 말 것도 권고했다”고 했다.

윤 교수는 “윌버포스의 회심을 계기로 반노예제 운동가들은 윌버포스를 찾아가 노예제 폐지 운동에 동참할 것을 요청했고, 결국 윌버포스는 1787년 5월 설립된 ‘런던 노예무역 폐지 협회’의 중책을 맡게 됐다. 이것이 그의 노예제 폐지를 위한 정치적 투쟁의 서막이었다”며 “그는 1787년 10월 일기장에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내 앞에 두 가지 커다란 사명을 주셨다. 그것은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것과 이 나라의 관습을 개혁하는 것’이라고 썼다”고 했다.

윌리엄 윌버포스
윌리엄 윌버포스 ©기독일보DB

그러나 “노예무역 폐지 담론은 강력한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데이비드 엘티스, 허버트 클레인, 스탠리 엥거먼, 시모어 드레서, 로저 앤스티 등 여러 학자가 제시한 자료들을 종합해 보면 1514년부터 1866년 사이에 약 1,060만 명의 흑인 노예들이 대서양 반대편을 향해 팔려 갔다. 아프리카를 떠난 흑인 중 약 870만 명 정도가 목적지에 하선한 것으로 파악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버드대학의 경제사학자 닐 퍼거슨에 따르면, 18세기 당대 영국은 최대 노예무역 국가였다. 영국에 의해 대서양 반대편으로 강제 이송된 노예의 수와 수익률을 각각 300만 명과 연 8-10퍼센트로 잡는다면 오늘날 영국이 지불할 배상금은 260조 달러에 이른다고 추산했다”고 했다.

특히 “아프리카 서해안에서 수출된 노예는 18세기에 주로 서인도제도로 팔려 갔다. 이는 당시 서인도제도의 제당업은 유럽의 최대 산업이자 고도의 노동집약적 사업이었고 이 필요를 아프리카의 노예들이 채우게 된 것”이라며 “18세기부터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주요 해외 식민지인 서인도제도의 경제에서 노예무역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고, 이는 노예무역 폐지를 어렵게 하는 요인이었다. 특히 당대 정치인 대부분은 노예를 노예 농장주의 ‘재산’으로 파악했고, 그 연장선에서 반노예제 조치는 그들의 재산권 침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예제 폐지는 영국 국가 경제의 엄청난 손실을 끼칠 것이라는 당대 인식으로 1789년 5월 처음 제출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은 좌초됐다”며 “윌버포스는 1789년 하원에서 노예무역 폐지를 처음 주장한 이래 1807년까지 노예무역 폐지 법안은 11번의 패배를 맛봐야 했다. 서인도제도 농장주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의원들의 거센 반발이기도 했다”고 했다.

또한 “윌버포스의 노예제 폐지 운동은 그와 비슷한 생각을 지닌 공동체를 통해 좀 더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1797년 윌버포스는 런던 근교의 클래팜에 위치한 헨리 손턴의 집에서 복음주의 정치가들과 교류하면서, 이곳은 영국 정치사에서 한 획을 그은 ‘클래팜 파’(Clapham Sect)의 본거지가 됐다”며 “이들은 기독교적 대의를 하나의 정파가 오롯이 대변할 수는 없으며, 사안별로 성경적 가치관을 대변하는 목소리는 다양한 집단에서 나올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했다.

기독교학문연구회 유튜브 캡쳐
윤영휘 교수가 마이크를 잡고 답하고 있다. 그 왼쪽은 최현진 교수.  ©기독교학문연구회 유튜브 캡쳐

윤영휘 교수는 “이들의 탈정파적 태도는 당시 집권 세력인 피트 파와 야당 폭스 파와의 협력으로 1807년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클래팜 파는 노예무역 폐지는 정파를 초월한 국가적 양심가 이익의 문제로 만들기 원했고, 각 정치 세력의 경계를 뛰어넘는 지지 속에서 노예무역 폐지 법안을 통과시킬 수 있었다. 윌버포스를 비롯한 클래팜 파의 초당적 협력이 노예무역 폐지를 이끄는 첫째 요인이었다”고 했다.

또한 “다른 요인으로 윌버포스와 그의 복음주의 정치가들은 이 상황에서 벗어날 실마리를 대중 여론에서 찾았다. 1791년의 패배 당시 이미 517건의 노예무역 폐지를 지지하는 청원서가 의회에 접수되는 것을 경험했던 이들은 이듬해 1792년부터 노예무역 폐지협회를 통해 지역 유권자들의 서명을 받아 의회에 계속 제출했다”며 “이 청원서 운동은 1805년에 정점에 달해 런던 등지에서 최대 규모의 청원 운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반대 여론의 폭발적 계기는 1806년 11월 선거였다. 이 선거는 역사상 처음으로 노예무역이 이슈였던 선거였다”고 했다.

그는 “윌버포스는 이때 노예무역 폐지에 전통적 지지자들뿐 아니라 여성들까지 규합했다. 윌버포스는 ‘여성과 윌버포스는 다시 한번 승리할 것이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고, 참정권을 부여받지 못했던 여성들은 가정에서의 여론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며 “점차 확산됐던 노예무역에 대한 대중 여론의 반감은 결국 1807년 노예무역 폐지를 이끌게 된 두 번째 요인이었다”고 했다.

아울러 “윌리엄 윌버포스 등 노예무역 폐지론자들이 대중 여론의 거센 반감을 이끌던 주된 논리는 당대 종말론적 위기감이었다”며 “노예무역 연구자 니콜라스 가이트는 19세기 초 복음주의 반노예제 운동가들이 공유했던 특징 중 하나로 종말론을 꼽기도 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영국은 당시 프랑스 혁명 이후 나폴레옹 집권 아래 프랑스와 전시 상황 속에 있었고, 심각한 위기 국면에 접어들었다. 영국 복음주의자들은 18세기 말 나폴레옹의 전쟁, 인플레이션, 전염병 등을 영국의 노예무역의 악행이 초래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며 “윌버포스는 노예무역을 영국의 국가적 죄악으로 해석하면서 노예무역 폐지는 하나님의 심판과 처벌을 피하기 위한 수단으로 제시됐다. 윌버포스는 자신의 저서 ‘실제적 견해’에서 영국 사회에 필요한 것이 도덕성의 회복이며, 이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회복이라고 강조했다”고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노예무역 폐지론자들은 영국 정치인들에게 일종의 도덕자본을 부여했다. 즉 정치인들은 노예무역 폐지 활동을 통해 얻은 도덕적 위신을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활용했다”며 “일례로 윌버포스의 친구이자 1783년부터 1806년까지 총리로 재임했던 피트는 집권 1기(1783-1801) 당시 직면했던 정치적 난맥을 집권 2기 때(1804-1806)는 노예무역 폐지를 통해 돌파하려 했다. 피트는 노예무역 폐지론을 주창하며 야당과의 초당적 연합을 이뤄냈고, 또한 당시 나폴레옹의 무력 통치와 구별되는 영국의 도덕적 리더십을 고양하려 했다”고 했다.

그러나 “1807년 노예무역 폐지가 공식화된 이후 이와 관련된 구체적인 실행안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였다. 이는 1833년 하원에서 통과된 노예제 폐지 법안을 통해 구체화 됐다”며 “영국은 2000만 파운드가 넘는 보상액을 지출해야 했고, 이는 1833년 당시 영국 예산의 40%에 이르는 금액이었다”고 했다.

윤 교수는 “이 과정에서 윌버포스는 노예제로 큰 수익을 창출했던 서인도제도 농장주들에게 적절한 보상을 제공해 개혁에 동참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는 방식을 제시했다”며 “결국 반노예제 세력들은 서인도제도 농장주 세력과의 정치적 타협을 통해 반대편도 설득하는 도덕 자본의 최대치를 얻는 방식을 택하게 됐다”고 했다.

또한 “보상 비용은 대부분 영국 국채관리청의 국채 발행을 통해 조달됐고, 노예해방으로 영국 정부가 지게 된 부채는 2015년이 돼서야 모두 상환됐다. 윌버포스는 국가 개혁이란 ‘선한’ 대의를 따르는 사람들뿐 아니라 그것에 따르지 않던 사람들까지 동조했을 때 이뤄진다는 것을 체득해 왔다”며 “그리고 자신이 정의롭게 여기는 것을 당연시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설명하는 과정을 통해 조금씩 실현해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했다.

윤 교수는 “노예무역 폐지는 18세기 복음주의 운동의 특징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기계적 우주관과 이신론의 영향으로 일반인의 심성에 끼치는 영향력을 상실해 가던 유럽의 기독교가 18세기 초중반의 부흥 운동으로 수세에서 벗어났다면, 18세기 말 영국의 복음주의 정치가들은 기독교적 가치를 현실정치의 영역으로 가져가는 노력을 했다”고 했다.

그는 “어떤 국가 안에 기독교인 비율이 높아진다고, 혹은 기독교인들이 높은 지위를 차지한다고 기독교 사회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며 “지금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불의와 불평등의 문제가 높은 지위에 있는 기독교인의 수가 적어서 일어나는 것은 아닐 것이다. 18세기 영국의 복음주의 정치가들은 기독교인이 어떤 직책을 차지하는가가 아닌 기독교적 가치를 어떻게 정책에 반영할 것인가에 관심을 가졌다”고 했다.

나아가 “앞서 설명한 것처럼 그들이 노예무역 같은 악습을 철폐하고 도덕 개혁을 위한 정치적 운동에 나서게 되는 데는 종말론적 위기감이 중요한 동기로 작용했다”며 “하지만, 그들은 이러한 운동 안에 있는 보편적인 도덕적 가치가 제공하는 도덕 자본을 강조하여 비기독교인들도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을 제시했다”고 했다.

이런 점에서 “18세기 말 19세기 초 영국 복음주의 정치가들의 운동은 상반돼 보이는 종교(도덕)와 정치적 이익의 한쪽을 포기한 것이 아니라 그 최대 공통 분모를 실현하는 방식에 대한 예를 제공했다”고 했다. 패널토의는 김동춘 박사(현대기독연구원 대표)가 맡았다.

한편, 이날 주제발표는 최현진 교수(경희대 정치외교학과)가 ‘이념 분열의 시대, 기독교는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를 전했고, 패널토의는 이명헌 교수(인천대 경제학과)가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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