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쿠자이셨던 아버지에 대한 고백
“어머니의 기도”, 큰 힘이 돼
처음 강단에서 설교한 곳, ‘거리’
돌고 돌아 ‘신학’의 길로 인도하신 하나님
‘무보상’의 선교사 생활 ‘20년’
다니엘 김 선교사가 최근 CBS 기독교 방송 ‘새롭게하소서’에 출연해 자신의 신앙 여정과 사역에 대한 간증을 전했다.
그는 “제가 예수님을 만난 건 중학교 1학년 때이다. 당시 일본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다니던 학교가 외국인 학교여서 저마다 종교를 가지고 있었다. 그 사람들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어렸을 때부터 인식이 되면서 부담이 되었다”며 “그래서 다른 종교인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겠다는 정체성에서 술·담배·춤·연애를 멀리했다”고 고백했다.
이어 최근에 출간한 책 「불멸의 전파자」에 대해 “불멸의 전파자는 제가 사역자로서 살아오면서 겪었던 문제들, 하나님을 섬기는 과정에서 제 삶에 고비가 왔을 때 제게 큰 힘이 되었던 응답들을 정리한 책”이라고 소개했다.
다니엘 김 선교사는 한국과 일본과 미국에서 각각 10년 간 살았었고, 다시 한국으로 온 독특한 이력이 있다. 김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싫어하신다’라는 말이 저에겐 가장 두려운 말이었고, 학교를 다니면서 싫어했던 말이 ‘너 같은 거 때문에 교회 안 가는 거야’라는 말이었다”며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저희 아버지는 장로가 되는 것이 기도 제목이셨다. 저희 아버지는 야쿠자 출신이셨고, 저희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셨다. 저는 어머니께서 완벽하기 때문에 힘을 얻었던 것이 아니라 결혼 후 어머니께서 아버지의 과거에 대해 알게 되었을 때,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셨지만, 저희 어머니에 대한 하나님의 보살피심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모태신앙이셨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엎드리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하나님을 어떻게 섬겨야 하는 것인지를 배웠다. 그리고 아버지의 변화되는 모습이 통해 큰 위로를 받았다”고 했다.
그러면서 “세례 받은 날부터 저희 아버지의 삶에 하나님께서 개입하셨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선별해 나가셨고, 결국 아버지는 야쿠자 생활을 청산하셨다”며 “저는 10살 때까지 10년 간 부모님과 떨어져 삼촌과 외할머니 품에서 자랐다. 아버지께서 일을 청산하기 전이었기에 신변 보호와 저희 어머니께서 저를 일본에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하셨기 때문에 저와 여동생은 외가집에서 자랐고, 어머니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생활하셨다”고 했다.
김 선교사는 가장 기억에 남는 어머니의 모습으로 “제가 5~6세 때 아버지께서 야쿠자 일을 청산하고 나오시던 때, 어머니께서 가장 힘드셨던 시기였다”며 “당시 오산리 기도원에서 금식기도를 3일 하시고, 내려오셔서 보호식을 먹고, 다시 기도원에 가서 3일간 금식기도를 했는데, 한 달에 몇 번씩은 3일식 금식기도를 하셨다”고 했다.
이어 “저희가 섬겼던 서울 변두리에 작은교회가 있었는데, 교회 담임목사님이 저희 가정의 형편을 잘 아셔서 어머니께 와서 기도하라고 교회키를 주셨다. 당시 여동생을 너무 어렸고, 어머니께서는 저와 함께 교회에 가서 기도하셨는데, 6~7시간 매번 기도하셨던 것 같다. 제가 옆에서 자고 눈을 떴을 때, 기도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평안함을 느꼈다”며 어머니의 기도가 가장 큰 힘이 되었음을 고백하며 눈물을 훔쳤다.
그는 “세계관이 형성되는 과정 가운데 하나님이라는 색깔이 끼워진 상태에서 저는 성장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전제로 하지 않는 생각이 제 머릿속에서 나오지 않는다”며 “그래서 ‘하나님이 싫어하신다’라는 것이 저에겐 가장 큰 경고”라고 했다.
이어 “제 삶에 크게 영향을 주신 분이 몇 분 계신다. 저에게 설교자와 전도자로서 모델이 되는 아사 호란도 목사가 첫 번째이며, 두 번째로 척추 교정·클릭닉을 운영하시던 의료 선교사이셨는데, 그 분을 따라 선교의 길에 나서게 되었고, 시편 66편 18절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의 말씀을 암송하라고 주셨다. 선교사님을 통해 주님과 교제하는 삶을 알게 되었다”며 이후 회개를 많이 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여동생과 어린 시절 노방전도를 했던 에피소드를 전했다. 김 선교사는 “후쿠오카에 덴진이라는 곳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여동생과 그 길을 지나가다가 이 많은 사람들이 지옥에 갈 것을 생각하니 견딜 수가 없었다”며 “중학교 2학년이었던 제가 전도현장에서 무엇을 외쳐야 할 지 몰라 당황했는데, 일본에 한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저에게 ‘예수 그리스도’만 외치라고 했다. 한 두 시간을 성경책을 들고 그렇게 외쳤는데, 하다 보니 전하는 메시지가 신기하게 덧붙여졌다”고 회상했다.
이어 “제가 처음으로 강단에서 설교를 한 것이 거리에서였다. 그래서 저에게 노방은 특별하고 의미 있는 곳”이라며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시작해서 노방전도를 약 5~6년간 했다”고 덧붙였다.
다니엘 김 선교사는 신학의 길을 바로 가지 않고, 군사관학교로 진학했던 일화를 전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세 가지 꿈이 있었다. 첫 번째는 대통령, 두 번째는 장군, 세 번째가 목사였다”며 정치학을 공부하다가 3개월 만에 심리학으로 전과했고, 장군의 꿈을 이루기 위해 군사관학교로 가게 되었다고 했다.
이어 “미국 남부에 위치한 The Citadel 육군사관학교에 다녔다. 여동생은 저의 동역자였다. 제가 일본을 떠날 때 카세트테이프 하나를 주었다. 한국에 당시 유행했던 노래 모음이었는데, 대학교 1학년을 견디는데,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가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였다”며 인종차별도 심하고, 많이 외롭던 시절 큰 힘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늘 조용한 곳에서 무릎 꿇고 기도했던 김 선교사는 광야의 시기를 지나며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그 시기를 통해 졸업하자마자 신학대학원에 가게 되었다고.
김 선교사는 하나님께서 돌고 돌아 신학에 길로 인도하신 이유로 “첫째로 리더십 훈련을 받고 싶었고, 둘째로 군사훈련을 받은 사람은 장교가 되는데, 훗날 미국의 리더십을 책임질 사람들이다. 그래서 학교 시절 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겠다고 생각했고, 셋째로 등 따시고 배부르면 예수님을 만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어머니께선 ‘믿음으로 산다는 건 신앙의 배짱’이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가 타협해선 안 되는 것들이 있다. 그 말씀이 사역을 할 때 큰 도움이 되었다”며 “특별히 물질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물질에 묶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지켰다. 그러나 참혹한 현실 앞에 눈물로 기도했다”며 훗날 역전의 삶을 살게 하신 하나님의 손길에 대해 고백했다.
그는 후원금을 받지 않는 부분에 대해 “몇 분을 제외하고 후원금을 받지 않고 어느덧 선교사로 산지 20년이 되었다. 20년 동안 저를 하나님께선 먹여 살리셨다. 필요한 부분들을 다 채워주셨다”며 “지금도 노동하는 일 80퍼센트 이상이 무보상이다. 경험을 통해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리라 믿기에 후원을 지금도 사양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도 후원금 받고 안 받고 보다도 후원금을 어디에 사용할지가 중요하다. 하나님 앞에 물질을 받은 만큼 심판 받는다고 생각하니까 함부로 사용할 수가 없다. 그리고 필요치 않은데 물질만 받아서 뭐하냐는 생각도 들었다”며 “저희 예수세대운동(JGM)의 경우 예배 이후 모인 헌금 100퍼센트가 선교지원으로 사용된다”고 했다.
아울러 “저는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종이다. 저는 교회를 위해 일하지만 교회 안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니”라며 “항상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교회를 가는데, 그 교회에서 후원금을 받으면 후원 선교사로 가게 되는 것이며, 조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려질까 봐 하나님 앞에 당당하기 위해 후원금을 거절하는 것”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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