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환 목사
김창환 목사

2023년 전국 센터급 이상 응급실을 방문한 환자는 총 583만 676건이었다. 이 가운데 자해 또는 자살을 시도한 사례는 4만 6,359건으로 집계됐다. 성별로는 여성이 2만 9,607건(63.9%)으로 남성(1만 6,752건) 보다 많았다. 2023년 자살 사망자 수는 1만 3978명이었다. 하루에 38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다. 자살은 한 사람의 생을 마감시키는 데 그치지 않는다. 가족과 지인들에겐 평생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자살 유족은 극심한 슬픔과 죄책감과 분노와 혼란 등 수많은 감정에 시달린다. 동시에 자살 고위험군이 된다. 가족의 자살을 경험한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 자살 위험이 3배 이상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고 한다. 아직도 OECD 국가 중에 자살률 순위 1위가 한국이다. 이 통계를 보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필자의 청소년 시절 때 있었던 자살의 충동에 대해 글을 쓴다.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중학교 시절부터 우리 집은 참으로 물질적인 어려움이 많았다. 아버지가 운영하는 세탁소가 어렵게 되자 빚을 지게 되었다. 어느 날 아침, 학교에 가려고 하는데 아버지가 학교공부 끝나면 집으로 오지 말고, 사촌 누나 집으로 가라고 했다. 빚 청산 때문에 당시 보문동에서 전농동 산동네로 이사 갈 수밖에 없었다.

그 산동네는 상수도 시설이 아직 없었기에 학교 등교하기 전에 아침 일찍 일어나, 물지게를 어깨에 메고 물을 사다 먹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곳에서도 아버지가 세탁소를 하셨지만 생활은 여전히 어려웠다. 학교에 분기마다 내는 학비는 제 날짜에 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장남인 나는 물론, 우리 5 남매는 방과 후 교무실에 수도 없이 불려 갔다.

고등학교 1학년 시절, 어느 날 오후였다. 지금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버지에게 무슨 야단맞을 일이 있었던 것 같다. 집에서 나가라고 아버지의 고함소리에 결국 집 밖으로 쫓겨났다. 시간이 한 참 지나자, 아버지 몰래 옆문을 통해 부엌으로 들어갔다. 전기 불을 켜지 않고 아궁이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나이에 무슨 인생 고민이 많다고, 이것저것 생각을 하다가, 순간적으로 살고 싶지 않다는 충동이 들었다. 죽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그 순간 부뚜막 위에 놓여 있는 부엌칼이 눈에 들어왔다. 부엌에서 흔히 쓰는 그런 식칼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 식칼이 집어 들었다. ‘에라... 죽어 버리자’라는 충동이 생겼다. 그러자 별안간에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그 식칼을 배에다 대었다. 그런데 “너 지금 무엇을 하고 있니, 정신 차려”라는 음성이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들려왔다. 순간 그 식칼을 땅에 내 던졌다. (지금 생각해 보니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사람이 목숨을 끊은 것은 누구든지 순간적으로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은 악한 영에 의해서 생긴다는 것을 목사가 된 이후에 알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죽음의 영이 나에게 목숨을 끊도록 유도했던 것이다. 그때 하나님이 지켜주시지 않으셨더라면... 지금 나는 어디에 있을까? 오직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다. 세상을 비관하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유명 연예인을 자신과 동일하게 여기는 베르테르 효과가 나타나고 있어서 안타깝다. 베르테르 효과(Werther effect)는 유명인 또는 평소 선망하거나 존경하던 인물이 자살할 경우, 유명인이 자신과 비슷한 어려움에 처해 있던 것을 느꼈을 때 심리적으로 영향을 더 크게 받고 유명인과 자신을 동일시 여겨 유사 방식으로 잇따라 자살이 일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필자가 00 교회에서 시무할 때, 교회에 다니던 고3 학생이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다. 교회 안은 물론 마을 전체에 소문이 퍼졌다. 그 학생의 부모는 우리 교회의 집사님들이었는데 한동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았다. 자살의 문제는 당사자뿐만이 아니라 가족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키는 사건이다. 당시에 담임목사로서 옆에서 보고서도 적절한 위로의 말씀을 찾지 못해서 매우 안타까웠다.

성도는 죽음의 영에 대하여 반드시 대적하고 물리쳐야 한다. 죽음의 영은 삶을 비관하는 자들에게 접근하여 삶을 포기하라고 끊임없이 유혹한다. 마귀가 예수님을 판 것을 후회하는 가룟 유다에게 이렇게 유혹했을 것이다. “죽고 나면 모든 고뇌가 사라지고 평안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거짓말이다.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나온지라‘(행 1:18). 죽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죽음 다음에는 심판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낙심하여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에게 죽음의 영을 결박하고 대적할 것을 명령하셨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성도는 죽음의 영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해야 한다. 악한 영들(마귀)의 최종 목적은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몰아놓는 것이다. 입에서 ‘죽고 싶다’는 말은 절대로 꺼내서는 안 된다. 어떤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죽고 싶다’라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무척 위험한 신호이다. 그것은 죽음으로 이끄는 마귀의 소리이다. 주 예수를 믿으면 죽음의 영으로부터 해방된다.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행 16:31). 영생의 소망을 갖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1-13). 우리의 싸움은 영적 싸움이다. 영적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기 바란다. 성도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데 있다. 성도는 영원한 삶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 우리를 죽음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주신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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