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라디아 5:16)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유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율법주의자들은 인력으로 조문(條文)을 하나 하나 실행하고자 한다. 그것은 결국 실패한다. 그러나 복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은 기독신자는, (1) 사랑의 동기로 행하면서 율법을 괴로운 짐으로 여기지 않고 순종하며, (2) 성령님의 도우시는 힘으로 말미암아 그의 실행력이 강하고, (3)그의 행실에도 약점이 있으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시지 않는다.
우리나라 신문학의 개척자 춘원(春園) 이광수(李光洙, 1892-1950)의 수많은 작품 중 가장 기독교적인 작품은, 장백산인(長白山人)이라는 필명으로 1924년에서 1925년에 걸쳐 동아일보에 218회 연재된 <재생(再生)>이다.
미션 계통 여학교의 모범생 김순영은 얼굴이 예쁘기로 소문이 났고 또한 모든 방면에서 재능도 뛰어났다. 유혹이 없기에는 순영의 얼굴이 너무나 예뻤고, 유혹들을 물리치기에는 순영의 육신이 너무나 나약하였다.
용모가 예쁘고 재능이 많았기 때문에, 그리고 겉보기와는 달리 그 마음은 정욕으로 불타 있었기 때문에, 순영은 신봉구의 순정어린 고결한 사랑을 거부하고, 장안의 갑부(甲富)이며 건달인 백윤희와 놀아났다.
순영은 백윤희의 불덩어리 같은 뜨거운 살이 항상 그리웠고, 힘있게 자기를 꽉 껴안는 백윤희의 두 팔이 그리워서, 50일 동안이나 남몰래 사랑의 도피행(逃避行)을 하며, 별별 음탕한 짓을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신봉구를 꾀어 육신의 향락을 찾아 석왕사(釋王寺)로 여행하였다. 신봉구에게 자기의 과거가 탄로나게 되자, 순영은 자기의 무명지를 깨물어 “영원불변(永遠不變)”이라고 혈서를 써서 자기 결백을 주장하는 영악한 면도 있었다.
이와 같은 생활을 하면서 이따금씩 순영의 마음을 노크하는 것은 성경 말씀이었다. 그 때마다 순영은 회개하고 돌아서는 길로 다시 향락을 찾았다.
순영은 신봉구의 아이를 밴 채, 돈이 탐나서 백윤희의 소실(小室)이 되었다. 순영의 친구 인순은 보다 못해 충고하였으나 순영은 들은 체하지도 않고 소실이 되었다. 달이 차서 순영은 아들을 낳고, 한 해 후 백윤희의 딸을 낳았다. 그 아이는 맹인이었다.
신봉구의 아들인 낙원을 백윤희의 자식인 체해야 하고, 그 위에 맹인인 딸을 낳은 순영의 심신(心身)은 지칠 때로 지쳤다. 순영은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더 짊어질 기운이 없어, 맹인인 딸을 데리고 금강산 구룡연폭포에 갔다.
미션 여학교 모범 학생이던 시절의 자기 모습이 주마등(走馬燈)과 같이 머리에 스쳐 지나갔다. “주의 부르시는 소리 들리네.” 이 찬송가를 순영은 얼마나 감격스러운 마음으로 부르곤 하였던고. 때도 아니 묻고 백설같이 흰 순영의 영혼은 얼마나 수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묵상하는 일로 보냈던고. 순영은 눈물을 흘리며 맹인 딸을 품에 품고 끝 모르게 깊은 구룡연폭포에 몸을 던졌다.
순영은 영혼 구원 문제를 미결로 남긴 채, 단풍이 곱게 물든 금강산 구룡폭포 속에 몸을 던져버리고 말았다. 작자가 의도했던 바와는 반대로, 또한 <재생(再生)>과는 달리, 순영은 자결하고 말았다. 이와 같은 결말은 작품 구성의 필연성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과일 것이다.
김희보 목사는
예장 통합총회 용천노회 은퇴 목사로, 중앙대 국문과와 장신대 신학대학원(M.div.)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Min.)와 명예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월간 「기독교사상」 편집주간, 한국기독공보 편집국장, 서울장신대 명예학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문학과 기독교(현대사상사)」, 「그림으로 보는 세계사(3권)」, 「지(知)의 세계사(리좀사)」, 「세계사 다이제스트100」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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