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허벅지 찔러 가면서 참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참으면 다 된다고 누가 그럽니까? 차이는 단하나입니다. ‘네 안에 약속이 있느냐’입니다. 그래서 성경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약속투성이입니다. 말씀을 읽지 않으면서 신앙이 흔들린다고 말하는 것은 약속 없이 누군가를 계속 기다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의 사명은 분명합니다. 새로운 사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명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말을 대화로만 쓰지 말고, 격려와 희망의 말로 사람을 살리시기 바랍니다. 이것들 모두 오늘, 지금 바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화살은 손질할 때가 아니라, 적진에 날아가 꽂힐 때 비로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화살통에 화살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최선을 다해 싸우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화살은 화살통에 남아 있을 것이 아니라, 적진에 꽂혀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주님을 위해 아무것도 남기지 말고,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나부터 그렇게 할 때, 교회는 변화될 것입니다.
박찬열 – 오늘 나는 선을 넘는다
칼빈의 언약신학이 철저하게 성경에 기반하고 있으되, 그의 언약신학이 내용상 분명히 그리스도 중심적이고 율법에 있어서도 역사적으로 연결되는 통전적임을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율법 자체가 가지고 있는 언약관계 속에서의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와, 인간 간의 관계에 관한 내용을 펼쳐보게 될 것이다. 이를 그리스도는 모두 보이셨고 친히 모범이 되시기에 이를 지향하는 신자의 자세인 율법의 제3용법을 통해서, 선행으로 표출되는 성화는 언약 관계에서 신자가 지향할 내용임을 확증할 수 있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에임스는 퍼킨스의 학문적이며 신앙적인 제자일 뿐아니라 전통적 언약신학의 계승자로써 그 존재감이 참으로 크다. 왜냐하면 영국상황의 어려움 때문에 네델란드로 망명하게 되면서, 그의 활동이 영국을 넘어 유럽대륙 전체에 미치는 영향력을 발휘하였기 때문이다.
문정식 – 개혁주의 언약신학
교회를 알고자 할 때, 교회를 배우고자 할 때,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교회에 대한 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하신 교회 본래의 상(像)을 바르게 깨달아 알고자 할 때 에베소서만큼 정교하고도 신령하게 서술된 책은 없다. 찬찬히 묵상해 보면 ‘교회란 본래 이런 곳이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교회, 예수님이 꿈꾸시는 교회란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깨닫게 된다. 하나님을 새롭게 아는 것이 왜 중요한가? 성도는 결국 맨눈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다. 성도라면 끊임없이 하나님의 앵글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보는 눈이 낡고 고루하며 진부하고 오래되어 있으면 우리는 그와 동일한 앵글로 세상을 볼 수밖에 없다. 그러니 바울이 하나님을 더욱더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은 지금, 여기, 이 순간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르게 깨치고 알아서 하나님을 끊임없이 새로운 마음과 새로운 영으로 만나고, 이 세상에 바르게 대처하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이다.
이상학 – 바울의 교회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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