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CECL 서론

허정윤 박사
허정윤 박사

CECL(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은 바이오로고스 재단 홈페이지(https://biologos.org/articles/creation-evolution-and-christian-laypeople.)에 올려져 있다. 켈러는 프란시스 콜린스가 설립한 ‘바이오로고스 재단’ 행사에 참여하여 호스트를 맡아 대화하고 예배하는 행사를 가졌다. 그때까지 복음주의자 목사로 알려진 켈러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단체 행사에 왜 참여했을까? 켈러는 그런 기회를 이용하여 ‘바이오로고스’에 우호적인 CECL을 발표했다. 이윤석이 켈러의 CECL을 논의하는 관점을 살펴보면, 그들의 의도가 모두 나타날 것이다.

1) 무엇이 문제인가?

이윤석은 그의 켈러의 문제적 주장을 다음과 같이 대변한다.

(1) 양자 택일의 문제가 아님

켈러는 과학과 신앙이 양립할 수 없다는 전제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반과학적 종교’와 ‘반종교적 과학’ 중 양자택일의 문제는 아니라고 말했다. 켈러는 정통 신앙과 진화생물학이 양립 불가하다는 것은 극도로 단순화된 논리이고, 실제로는 여러 가지 다양한 형태의 관계가 가능하다고 했다.

켈러와 이윤석은 기독교인이 켈러의 주장에 동의하려면,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가 과학으로 확증된 사실이라는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너무 경시하고 있다.

(2) 이윤석은 “하나님이 일하는 방식을 인간이 제어하지 못함”이라는 항목에서 켈러가 자기 주장을 대변하기 위해 인용한 피터 반 인와겐(Peter van Inwagen)의 글을 “초자연적인 믿음의 보편성에 대한 글”이라고 소개한다.

(인와겐 김병훈 역) “하나님께서 존재하시며 초자연적인 믿음이 사람에게 보편적인 것이 되기를 바라신다고 가정해 보자. 또 어떤 특성들이 사람에게 유용할 지를 -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이 진화적 관점에서 유용할 지를 - 아신다고 가정해 보자. 그리고 이 특성들로 인하여 초자연적 믿음이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사람에게 보편적인 것이 된다는 결론을 갖게 된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이 사실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아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특징들이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의 원인이 되게 하지 않으실 이유가 있겠는가? 마치 자동차의 설계자가 승객을 따뜻하게 하기 위하여 엔진의 남은 열기를 사용하는 것과 같이 말이다.”

[김병훈의 인와겐 인용문 비판에 대한 이윤석의 비판]

이윤석은 “인와겐 인용에 대한 김병훈의 비판” 항목에서 “켈러는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정통 신앙 안에서 진화생물학을 수용할 수 있는 논리적 설명을 위하여 인와겐(Peter van Inwagen)의 다음 말을 끌어온다”고 한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하나님이 진화 과정으로 생명체들과 인간 생명을 창조해 내실 수 있기 때문에 정통 창조신앙과 진화 생물학이 양립 가능하다는 켈러의 신학적 주장 또는 허용은 타당성을 잃는다.”

이윤석은 위 글을 인와겐의 글처럼 소개하고 있으나, 사실은 김병훈의 글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신학정론] 게재)이다. 여기에서 이윤석은 누구의 글인지조차 헷갈리고 있으면서 “켈러가 의도하지 않은 것을 기정 사실인 것처럼 이야기한 후 켈러가 주장하지 않은 내용에 대해 임의로 결론을 내리며 비판함”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윤석이 켈러가 무엇을 의도하고, 주장하지 않은 내용이 무엇인지, 또 누구를 향한 비판인지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켈러를 옹호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그가 쓴 글 제목처럼 허수아비를 공격하는 듯한 말만 내지르고 있다.

(3) 필자가 관련 자료를 전체적으로 살펴본 바에 의하면, 김병훈의 비판 글 앞에는 다음의 말이 연결되어 있다. 그 글을 먼저 읽어야 올바르게 정확한 문맥의 이해가 가능하다.

“인와겐의 진술은 위에서 보듯이 가정들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켈리의 주장에 도움을 주는지 의문스럽다. 인와겐의 결론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진화적 관점에서 생존과 번식에 도움이 되는 특성들이 자연 안에서 정말로 존재하여야 하며, 또한 진화론적 특성이 사람으로 하여금 초자연적 믿음으로 나가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요건이 모두 가정일 뿐이다. 이러한 가정은 철학적으로 논의될 수 있을 뿐이다”.

(4) 김병훈은 켈러가 자기 주장을 대변하기 위해 끌어 온 인와겐의 글을 적절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윤석의 김병훈에 대한 비판은 글의 저자조차 혼동하면서 문장을 거두절미하여 인용함으로써 글의 문맥 파악을 어렵게 한다. 이윤석이 위에서 한 비판은 오히려 자신을 향한 비판이 아닐까 한다.

4. CECL 본론: 3가지 난제와 답변

이윤석은 켈러가 제시한 “진화가 정통 개신교인들에게 제기하는 4가지 난제”를 소개하고 켈러가 자기의 글을 학술적 논문의 수준이 아니라, 대중적 수준의 목회적 답변과 가이드라는 점을 밝힌 점을 소개한다. 켈러는 그렇게 해서 신학적 반론을 피해보려고 의도했겠지만, 목회자의 글은 어떤 것이든 일반 신자들에게 학자들의 논문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조주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런 핑계를 댈 일이 아니다. 이윤석이 무작정 켈러를 유신진화론자가 아니라고 왜곡하는 것도 무책임해 보인다.

켈러는 4가지 문제(① 성경의 권위 ② 생물학과 철학의 차이를 혼동 ③ 아담과 하외의 역사성 ④ 폭력과 악의 문제)를 제시했다가 곧바로 3가지 난제로 줄여서(앞의 ③과 ④를 합쳐서) 질문과 요약된 답변과 설명으로 넘어간다. 이윤석은 이를 본론으로 본다.

난제 1) 성경의 권위 문제: 진화는 창세기의 문자적 읽기와 조화될 수 있는가?

[질문] 하나님이 진화를 이용하여 창조하셨다면, 우리는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데, 또 우리가 그럴 수 없다면, 성경의 다른 부분은 왜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답변/이윤석 역] “성경 저자들의 권위를 존중하는 방식은 성경을 성경이 취해지기 원하는 식으로 취하는 것이다. 때로는 성경은 문자적으로 취해지기 원하고, 때로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성경을 경청해야 하며, 우리의 생각과 의제를 성경에 강요해서는 안 된다.”

[켈러의 관점] 이윤석은 켈러의 답변을 번역(또는 잘못 번역된 것을 인용)하면서 원문에서 저자들을 가리키는 they 또는 them을 ‘성경’으로 바꿔 놓아서 켈러의 관점을 흐리고 있다. 켈러는 ‘성경’이 아니라, 저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취하라고 말하고 있다. 이윤석은 “켈러의 관점”에 대해서 나름대로의 해석을 펼쳐 놓는다.

(1) “켈러는 창세기 1장이 실제로 있었던 정확한 사실을 기술적으로 표현하는 것을 의도하여 기록된 것은 아니라는 입장을 보여줌”. 켈러는 말을 그렇게 비틀지 않고, 분명하게 ‘문자 그대로 볼 수 없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2) “켈러는 출애굽기 14-15장이나 사사기 4-5장에 나오는 장면처럼 창세기 1장을 역사성이 있는 시적 표현 같은 성격으로 이해하”는 입장이라고 하는데, 켈러는 창세기 1장을 “역사성이 있는” 시적 표현으로 말한 적이 없다. 이윤석이 멋대로 하는 말이다. 앞의 (1)의 자신의 말과도 배치된다.

(3) 창세기 1장 자체는 세상의 창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 그때 사용된 기간에 대해서는 24시간 6일을 통해 세상이 창조되었다는 것을 가르치거나 또는 진화를 가르치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함”이라고 주장하다. 여기서 “역사적 사실을 다루는 것이긴 하지만”이라는 말도 비틀어놓은 말이다. 창조 6일의 시간적 길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이 말은 이윤석이 켈러가 창세기 1장을 “역사적 사실”로 보지 않는 사실을 뒤집어 반대로 보면서, 비틀어 놓은 말이다. 켈러가 창세기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 창조도 아니고 진화도 아니라면, 이윤석은 켈러의 견해가 다른 무엇이라고 보는 건가?

[이윤석의 김병훈 비판]

켈러를 비판하는 김병훈을 이윤석은 다시 끌어와서 비판하고 있으나, 이곳에서도 그의 비판적 주장은 그가 옹호하려는 켈러의 의도와는 동떨어져 있다.

(1) 켈러가 “생물학적 과정인 진화를 인정하는 범위에서 유신진화론을 지지”한다는 김병훈의 지적은 올바르다. 그리고 켈러가 “창세기 1장을 비문자적으로 읽어야 하며 이것은 역사적 사실로 읽을 수 없음을 인정”한다는 지적도 틀리지 않는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윤석은 “우리는 비문자적으로 읽으면서도 역사성 있는 기록으로 읽을 수 있음”을 주장하고, () 안에서 “비문자적으로 읽기 때문에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주장은 창조과학회의 전형적인 입장”이라고 강변한다. 여기서 켈러는 이미 유신진화론을 믿기 때문에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으며, 켈러의 주장은 신자들이 그와 같은 믿음을 갖기 위해 창세기 1장을 비문자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요청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3) 또한 김병훈이 “생물학적 과정인 진화를 인정하는 범위에서 유신진화론을 지지”한다면서 켈러를 “비판하는 근거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음”을 주장한다. 켈러가 CECL을 쓴 목적 자체가 바로 기독교인들에게 생물학적 진화 과정(EBP: Evolutionary Biological Process)을 수용하도록 촉구하기 위한 것이다. 기독교 신자들에게 가설 수준인 EBP를 현대 과학으로 수용하라고 촉구하는 켈러에게 “유신진화론 지지자라는 근거도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고?

(4) 켈러의 “난제 1”은 기독교인이 진화를 믿게 되면 발생하는 창세기 1장의 문제를 답변하는 것이다. 켈러는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저자들의 권위(the authority of the writers)를 존중하여 “저자”가 원하는 방식으로 장르에 따라 읽으면, 창세기 1장에 대해서는 비문자적으로 읽으면서 역사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을 모른다면 이윤석이 주장화는 켈러의 창조론은 어디에 근거하고 있는가? 이것들과 관련하여 켈러의 관점을 제대로 논의하려면, 저자인 켈러가 원하는 방식으로 CECL이나 제대로 읽어 본 후에 하기를 권고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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