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9회 기독교학술원 월례포럼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3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신갈포도나무교회(담임 여주봉 목사)에서 ‘에즈베리 부흥과 21세기 한국교회 부흥’이라는 주제로 제99회 월례학술포럼을 개최했다. ©최승연 기자

기독교학술원(원장 김영한 박사)이 3일 오후 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신갈포도나무교회(담임 여주봉 목사)에서 ‘에즈베리 부흥과 21세기 한국교회 부흥’이라는 주제로 제99회 월례학술포럼을 개최했다. 포럼에선 소요한 교수(감신대 역사신학), 박찬호 교수(백석대 조직신학), 김요셉 교수(총신대 역사신학)가 발표했다.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의 주역 하디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한 소요한 교수는 “하디 선교사는 1865년 6월 11일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으로 농업에 종사하는 가정에 태어났다. 토론토 의과대학 1학년에 재학할 당시 부흥운동의 여파로 일어났던 학생자원운동이 한창이었는데 이 운동에 참여하고 주도했던 포어맨의 세미나와 집회에 참여하여 한국 선교에 소명과 도전을 받았다”며 “그 후 토론토대학생선교회의 후원과 파송으로 1890년 9월에 내한하여 서울, 부산, 원산을 중심으로 의료선교를 했다. 그러다가 선교사역에 한계를 느껴 1903년 8월 선교사연합사경회를 인도하다 성령, 회심 체험을 통해 원산 부흥 운동을 이끌게 되었다”고 했다.

소요한 교수
소요한 교수가 ‘1903년 원산 부흥 운동의 주역 하디의 영성’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최승연 기자

그는 “하디는 <기도의 원축>이라는 책을 번역하면서 교역자 제군에게 소개하며 목회 현장에서 당하는 여러 질문에 이 책이 답이 될 수 있다고 할 정도로 기도의 내용을 잘 담고 있다고 했다. 그는 트럼블의 <기도응답>이라는 책도 번역했다. 하디는 ‘기도는 무엇인가?’라는 정의에서 ‘인류는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으로 일반적으로 구하는 기도가 아니다. 성서는 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주장했다. 이는 ‘하나님과 항상 교통하는 것으로 쳉사기 10장 22-33절에 나타나는 아브라함의 기도처럼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교통한다’고 했다”고 했다.

소 교수는 “하디는 신앙의 능력이 현장에 있기 위해서 기도가 필요하며 이는 곧 하나님의 뜻이 기도의 힘을 통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다고 했다. 이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것인데 삶 가운데 필요에 따라 기도의 제목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도 중요했다. 그 기도하는 자의 정체성이 무엇이고 소명이 무엇인지 깨닫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로서 그 정체성을 분명히 인지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해야 한다는 점이다”고 했다.

이어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기 위한 삶은 그의 선교 마지막 시기에 교파를 지양하고 신앙의 본질을 함께 추구하는 차원에서 교파연합을 주장했다. 교파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한국교회의 노력이 그동안 많아지만 결국 서로 양보하지 못하는 이기주의로 인해 분열의 양상은 거듭되고 말았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이념의 해결이 아닌 신앙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 기도를 통해 가장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디의 기도 영성이 내재적 관념과 교회 내 부흥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으로 결실을 맺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03년의 부흥은 단순히 한국교회의 성장, 교세 회복이 아닌 신앙인의 삶이 자신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이 현장에서 드러나는 삶이었다”고 했다.

끝으로 소 교수는 “1903년 부흥을 이끈 하디는 그 생애에 대해서 잘 알려졌지만, 그가 선교 현장에서 펼쳤던 그의 메시지와 내용은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못했다. 이는 한국교회 역사 연구에 있어 나타나는 공통적인 문제로 하디 뿐만 아니라 대부분 인울 연구를 생애, 사건을 중심으로 다루다 보니 특정 인물이 전했던 그 시대의 메시지와 내용은 간과했던 것”이라며 “지금까지 역사를 가르치면서 의례 알겠지 하는 부분들이 후대에게 전달되지 못했음을 고백하며 학술적인 차원의 접근 뿐만 아니라 이들이 추구했던 영성의 내용을 앞으로 실천적인 차원에서 제공하는 것이 필요함을 느끼며 이것을 과제로 남겨두려고 한다”고 했다.

박찬호 교수
박찬호 교수가 ‘1907 평양대부흥은 성령의 역사인가 역사적 허구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최승연 기자

이어 박찬호 교수가 ‘1907 평양대부흥은 성령의 역사인가 역사적 허구인가?’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박 교수는 “1907년 평양대부흥을 다룬 여러 자료들을 검토해보면 평양대부흥이 주는 의미는 1) 1907년 평양대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오순절이다 2) 평양대부흥은 20세기 오순절 교회의 출현의 한 현상으로 지목되는 세계적 사간이었다 3) 평양대부흥운동은 연합운동을 통해 성령의 역사가 더욱 강하게 일어난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라며 “1907년 평양대부흥은 1903년 원산대부흥과의 연장선상에서 보면 하디 선교사에 의해 시작된 부흥운동의 클라이맥스가 길선주에 의해 주도된 평양대부흥이었다”고 했다.

그는 “1907년 우리나라 역사에 있어 격동기였다. 당해는 을사늑약이 있었던 1905년과 한일합방이 있었던 1910년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한국교회의 비정치화를 가져왔다는 평가가 있게 되었다. 초기 우리나라 기독교인들은 주변의 열강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려고 했다. 민족의 독립을 염원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인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정치에 빠져드는 것을 경계하여 비정치화 작업을 추진했고 그 결과 대부흥운동을 계획했다”고 했다.

박 교수는 “자신들의 신학적인 입장을 따라 평양대부흥 1차 대각성은 받아들이고 2차 대각성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열광주의에 대해 유의해야 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부흥을 찬성하는 사람 100명보다 열광주의자 1명이 더 부흥운ㄷ옹에 유해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에 경고하고 있다. 1차 대각성 기간 부흥을 반대했던 대표적인 사람은 찰스 존시였다. 그런가 하면 열광주의자로 악명을 떨친 사람은 제임스 데이븐포트였다”며 “데이븐포트는 1차 대각성 기간 순회설교자로 활동했으며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인기를 얻기 위해 동료 교역자들을 정죄하는 전략을 사용했으며 자신이 보기만 하면 구원 받은 사람과 저주받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고 했다.

이어 “부흥과 관련하여 조나단 에드워즈와 대립의 각을 세웠던 찰스 촌시는 합리적 종교를 주장했으며 보편 구원론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미국 독립 전쟁 기간 동안 영국 성공회 주교를 미국 식민지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했으며 설교와 팜플렛을 통해 미국독립의 대의를 지지했다. 그는 훗날 ‘혁명의 신학자’로 불리게 되었다”며 “평양대부흥에 대한 정치적 해석에 대해서는 신앙고백적인 해석을 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 그런 부분이 있었다고 동의하는 부분이다. 하지만 평양대부흥을 허구와 조작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의 주장은 치우친 주장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와 청교도에 대한 미국에서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던 페리 밀러는 무신론자였다. 미국의 1차 대각성운동에 대한 수정주의적인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1차 대각성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1차 대각성에 대한 수정주의적 입장을 평양대부흥에 적용하고 있는 사람들의 개인적인 이력에 대해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 기독교 신학자들이라면 그들의 주장이 과연 어떤 함축을 가지는지에 대해 신중할 필요가 있다고 사료된다”고 했다.

이어 김요셉 교수가 '1973년 한국교회의 부흥운동: 민족복음화 사상과 운동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김 교수는 "1970년대 한국교회는 그 이전괴 비교할 수 없는 비약적인 양적 성장을 경험했다. 이 성장과 변화의 과정 가운데 1970년대 초 연속적으로 개최된 대형 전도집회의 영향이 지대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 시기 한국교회에서 개최된 대형 전도집회는 당시 시대적 상황을 고려할 때 상당히 특이한 현상이었다"며 "1970년대 여러 차례 대형집회를 주도했던 여러 한국교회의 지도자들은 '민족복음화'라는 구호 아래 대형 전도집회를 기획했으며 전국적인 전도운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이 시기에 열린 대형집회는 일차적으로 전도운동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집회에서 전해진 메시지와 이어지는 사역은 주로 개인들을 향한 복음전도와 회심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고 했다.

그는 "1973년 빌리 그래함 서울전도대회는 1960년대부터 시도되었던 전국적인 대중전도운동의 일환이며 귀결이었다. 한국교회 안에는 1964년 말부터 17개 교파 대표들이 모여 초교파적 복음전도 운동에 대한 기획이 있었고 그 결과 그해 12월 3일 전국복음화운동위원회가 구성됐다. 이 위원회는 '삼천만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표어를 내 걸고 전국적인 활동을 전개했다. 이 모든 과정의 중심에는 한경직과 김활란이 있었다"며 "1960년대 시작된 전국복음화운동은 적극적인 전도운동을 통해 한국교회 안의 형성된 교파적 분열을 넘어선 부흥을 기원하면서 이를 통해 한국 민족 전체를 새롭게 변혁하려한 시도였다"고 했다.

김 교수는 "1970년대 들어와 시도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대중전도 운동은 김준곤 목사가 중심이 되어 한국대학생선교회(C.C.C)가 주도했던 성시화운동이었다. 김준곤 목사는 1972년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춘천에서 성시화운동을 전개했으며 그는 민족 전체의 복음화에 앞서 한 도시를 모델로 정해 전도운동을 통한 변화를 시도했다. 그가 주도한 춘천 성시화운동은 역사적 모범뿐 아니라 성경에서 그 근거를 제시했다. 김준곤은 한 도시의 성시화를 그 도시가 '완전히 복음화'라고 정의하고, 이는 마태복음 28:18-20과 그 병행구절인 마가복음 15:15-16, 사도행전 1:8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지상명령에 순종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했다.

이어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에 이어 1970년대 한국교회의 대형집회는 1974년 개최된 엑스플로 '74 대회였다. 이 대회는 김준곤과 그가 설립한 C.C.C.가 주도했다. 이 대회 역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와 동일하게 영혼 구원을 목표로 한 전도운동으로서의 강조점과 복음화의 대상을 한국 민족으로 삼은 강조점을 분명히 표명했다.민족복음화라는 개념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김준곤이 주장한 민족복음화 사상에는 몇 가지 중요한 특징이 있다. 1) 이 사상은 개인의 영적 경험으로부터 비롯되어 C.C.C. 설립 과정에서 정돈하여 이후 여러 사역을 시행하면서 발전한 김준곤의 독창적인 개념이라는 것 2) 이 사상이 종말에 대한 강한 인식과 그 가운데 한국 민족을 일종의 선민으로 여긴 독특한 이해가 그 기초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점 3) 이 사상의 특징은 이 주장이 단순히 개인구원 차원에 머물렀던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차원까지 포괄했다는 점이다"고 했다.

김 교수는 "1970년대 한국교회가 경험한 놀라운 부흥은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결과였다. 그런데도 1973년 일어난 한국교회의 부흥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이를 통한 21세기의 새로운 부흥을 기대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점을 지적하고 반성해야 한다. 첫째, 이 시기 교회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교회 지도자들과 여러 대형집회들이 당시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대해 침묵하거나 심지어 독재정권과 타협하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며 "둘째, 70년대 대형집회와 그 기초가 된 민족복음화 사상에 대한 정당한 신학적 평가와 비판적 계승이 필요하다. 이외 관련해 21세기 다민죽 다문화 사회로 전환 중인 한국 사회에 어울리는 민족복음화의 개념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설명이 필요하다. 더 궁극적으로는 성경이 말하는 부흥의 개념이 어떤 것인지에 대한 면밀한 신학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했다.

끝으로 그는 "21세기 상황에서 여전히 대형 전도집회가 가능하며 유용한지에 대한 실천적인 반성과 점검이 필요하다. '더욱 모이기를 힘쓰라'는 히브리서 10:25의 명령은 여전히 존중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순종해야 할 '모임'의 성격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반성이 요구된다.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담당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따를 때 개인과 교회의 변화가 가능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따르는 것 자체가 성경이 가르치는 '부흥'임을 21세기 한국교회가 다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발표에 앞서 개회사를 전한 김영한 박사는 “존 웨슬리의 부흥운동은 비단 수많은 영혼을 구원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한 영국 사회를 갱신하는데 역시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부흥운동은 정치, 문화, 경제, 사회 등 많은 면에 있어 유럽 전역에 새로운 이상을 보여주었다. 영적 부흥으로 인해 한국교회의 ‘내적’ 체질이 바뀌어 사회에 대한 교회의 ‘영적’ 권위가 회복되어야 한다”며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가 담당한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따를 때 개인과 교회의 변화를 통한 사회적 성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학술원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