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북한 인민군은 주일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에 기습 남침을 감행했다. 정부와 우리 군이 북한군의 기습 남침에 미처 대비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사이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하고 파죽지세로 남으로 밀고 내려갔다. 우리 군이 낙동강전선을 최후 저지선으로 끝까지 사투를 벌였으나 남한 전체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는 건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런데 9월 15일, 전쟁의 판도를 완전히 뒤바꾼 대역사가 일어났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이 인천에 유엔군과 우리 군을 상륙시켜 전세를 완전히 역전시킨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이다. ‘인천 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는 일거에 역전됐다. 서울은 곧 탈환됐고 낙동강까지 이르렀던 인민군은 퇴로가 끊길까 황급히 북쪽으로 달아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로부터 73년의 시간이 흐른 지난 15일 인천광역시 인천항 수로 팔미도 근해 노적봉함에서 ‘인천상륙작전’ 제73주년을 기리는 전승기념식이 있었다. 이 자리에 현직 대통령으로 처음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인천상륙작전은 공산 전체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자랑스러운 역사이자 자유세계가 기억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라고 강조했다.

6.25 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스탈린그라드 전투, 미드웨이 해전과 비견되곤 한다. 그만큼 기적적인 전과를 올렸다는 의미다. 윤 대통령은 이날 ‘인천상륙작전’에 대해 “작전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에 불과했지만 기적 같은 승리를 쟁취했다”며 “한반도 공산화를 막은 역사적 작전이자 세계 전사에 빛나는 위대한 승리였다”고 평가했다.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계획은 낙동강방어선까지 밀고 내려온 북한군의 기세를 허리에서 끊어냄으로써 국군과 유엔군에 반격의 전환점을 이루는 데 있었다. 성공할 가능성이 극히 희박한 작전이 기적적으로 성공을 거둠으로써 수도 서울을 단숨에 탈환하고 평양까지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었다. 국군과 유엔군에게 사기를 돋우고 반대로 북한군엔 도주해 목숨이라도 건져야겠다는 두려움을 안긴 심리적인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인천상륙작전’의 영웅 맥아더 장군은 6.25 전쟁 이전에는 태평양지역 총사령관이자 일본 점령 연합군사령관이었다. 그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세계 전사상 가장 많은 약 50여 회의 상륙작전을 모두 성공으로 이끌어 ‘상륙작전의 귀재’라는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1945년 9월 2일 도쿄만 미 해군전함 미주리함상에서 연합군 총사령관 자격으로 일본 외상 시게미츠 마모루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아냄으로써 우리를 일제에서 해방시킨 특별한 인연이 있는 인물이다.

그런 영웅의 동상이 1957년 인천 자유공원에 세워졌다. 맥아더 장군 동상을 건립하는 데는 당시 이승만 정부가 결의하고 온 국민이 성금 모금에 참여할 정도로 열성적인 호응이 있었다. 이는 그가 단순한 전쟁 영웅이 아니라 우리나라에 자유를 안겨준 인물로 국민 가슴에 각인됐다는 증거다.

그런 맥아더 동상이 2000년대부터 소위 주사파 운동권의 표적이 됐다. 2002년 경기도 양주에서 발생한 미군장갑차 여중생 사망사건을 계기로 반미투쟁 전선을 형성한 진보 운동권 단체들이 반미투쟁의 상징적 행동으로 맥아더 동상 철거를 시도하면서부터다. 2005년엔 이를 막으려는 보수단체와 반미 운동권단체 회원들 간에 격렬한 충돌이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앞에서 있었다. 2018년 7월엔 기독교 모 목사가 동상에 올라가 불을 지른 사건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들의 동상 철거 시도는 끝내 불발됐지만 아직도 수난은 계속되고 있다.

동상 철거를 주장하는 측은 “맥아더는 해방 당시 태평양 방면 미육군총사령관으로 민족분단과 군정기간 발생한 미군 범죄에 대해 직접적 책임이 있다”고 주장한다. 민족 통일을 위한 내전인 6.25에 미국이 개입해 분단을 고착화시켰다는 논리다.

그런데 6.25 전쟁을 단순한 내란으로 여기는 이들의 논리에는 함정이 있다. 북한의 남침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북한에 면죄부를 주려는 의도가 다분하다 하겠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는 것이 북한식 공산화라면 모를까 만약 미국과 유엔군이 6.25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는 지구상에 존재할 수 없었을 거고, 국민인 우리도 지금과 같은 자유와 민주적 질서 아래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게 있다. 북한이 남한까지 공산화하려는 계략을 어떻게 남침 도발이라는 실행에 옮기게 됐나 하는 점이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남한 만의 민주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총선거를 실시해 제헌의회를 구성했다. 그러자 미국은 주한미군 철수를 기정사실화하고 예정대로 1948년 9월부터 철수를 시작해 그 이듬해 6월 30일에 철수를 완료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김일성이 소련의 동의하에 미군이 남한에 다시 들어오지 않을 것을 확신하고 일으킨 게 6.25전쟁이다.

지금 우리 사회엔 북한을 추종하며 한미동맹을 이간질해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세력이 도처에 있다. 기독교라고 예외는 아니다. 이들의 목적은 맥아더 동상을 끌어내리고 불을 지르는 게 다가 아니다. 수십 년간 이 땅에서 조금도 변함없이 외친 국가보안법 철폐와 미군 철수, 그 다음 수순이 어디일지는 뻔하다. 78년 전 북한이 드러냈던 한반도 공산화의 야욕이 지금도 계속 진행되고 있다는 걸 망각하는 순간 불행했던 과거가 현실이 된다는 사실을 한시도 잊어선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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