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사실 김준곤의 민족복음화운동은 곧 전도운동이었다. 1971년 1월 수원의 서울농대에서 430명의 전도자를 훈련시켜 전국에 파송한 다음 김준곤 목사와 그의 CCC는 전도자를 훈련시켜 전국에 파송하는 일을 지속적으로 하였다. CCC가 여기에서 사용한 방법은 승법번식운동이다. 이것은 생명이 생명을 낳는다는 원칙 아래 새신자로 하여금 새로운 사람을 전도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한 결과를 가져왔다. 인천 숭의감리교회의 경우에 이 방법을 통하여 200명이었던 교회가 2년 만에 850명이 되었다.

김준곤 목사는 이와 같은 전도운동과 함께 소위 성시화운동을 벌였다. 이것은 한 도시를 정해서 집중적으로 전도하여 도시 전체를 신앙의 도시로 변화시켜 죄악이 없는 도시를 만드는 운동이다. 그 출발은 춘천이었다. CCC는 춘천기독교성시화운동위원회와 힘을 합하여 춘천성시화운동을 벌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교단체인 CCC와 기존의 지역교회의 연합을 볼 수 있다. 먼저 CCC는 예수혁명의 정신으로 민족복음화에 나섰고, 이런 정신을 춘천기독교에 전했다. 그래서 함께 이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CCC는 춘천성시화운동의 실질적인 업무를 진행하였다. 그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전도운동이었다. CCC는 우선 지역의 교역자들을 훈련시켰고, 그 다음에는 평신도지도자들을 훈련시켜 다른 평신도들에게 전도를 가르치도록 했고, 이렇게 전도 받은 사람들은 5명씩 전도하도록 하였다. 이 모임의 절정은 72년 7월 31일부터 8월 4일까지 춘천시에 있는 강원체육관에서 열린 집회였다. 여기에는 8000명이 참석하였고, 그 중에 등록된 사람이 5000명이었다. 춘천성시화운동을 통해서 CCC는 단지 대학생선교단체가 아니라 한국교회와 함께 민족복음화운동의 주체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엑스플로 74는 엑스플로 72에 참석한 52명의 한국대표들이 한국에 이 대회를 유치할 것을 제안함으로서 한국에서 열리게 되었다. 이 대회는 1974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예수 혁명, 성령의 제 3폭발”을 대 주제로,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성령의 계절이 임하게 하자”는 표어 아래 진행되었다. 김준곤 목사는 개회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10년 후에 엑스플로 74를 역사가가 이렇게 쓰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제 2의 이스라엘이 되었다. 서울시는 제 2의 예루살렘처럼 성시화가 되었다. --- 미국은 민주주의를 수출하고, 일본은 상품을 수출하고, 프랑스는 자유를 수출하고, 영국은 산업혁명을 일으켰고, 러시아는 공산혁명을 일으켰고, 서유럽사회는 섹스혁명을 일으켰는데 한국은 예수 혁명, 성령혁명을 일으켰다. 한강변의 기적은 예수의 기적이다. 그들이 민족의 가슴마다 그리스도를 심어 성령의 계절이 그 땅에 왔다.” 우리는 김준곤 목사의 개회사에서 강력한 복음의 열정을 보게 된다.

엑스플로 74가 이전의 집회와 다른 것은 전국의 각지에서 모인 신자들이 여의도에서 천막을 치고 침식을 같이 하면서 집회에 참석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낮에는 전도훈련을 하고, 저녁에는 부흥전도 집회에 참여하였다. 김준곤 목사는 한국전체 교인의 10분의 1을 전도자로 훈련시키기를 원했다. 그런데 실제로 이 대회를 통해서 30만 명 이상이 등록을 해서 훈련을 받았다. 당시 한국교회의 신자는 3백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이와 같은 전도훈련은 한국교회의 부흥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김준곤 목사에 의하면 엑스플로 대회 한 달 전에 그는 학생들을 주변의 교회에 파송해서 주보를 모아오도록 했다. 그리고 일 년 후에 같은 조사를 했다. 그 결과 출석인원은 33%가 증가하였고, 헌금은 64%가 증가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매해 백만 명이 증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엑스플로 74가 끝난 다음 한국교회는 7백만의 신자가 되었다. 이것은 엑스플로 74가 실제적으로 한국교회의 성장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저녁집회는 빌 브라리트, 한경직, 김준곤 목사를 주 강사로 진행되었다. 이 집회는 사상 유례 없은 인원을 동원했다. 첫날 개막 예배에 136만 명이 참석하였고, 연인원 655만 명이 참석하였다. 이것은 한국 기독교역사상 최고의 기록이었다. 특별히 8월 15일 집회시에는 영부인 육영수여사의 서거소식이 들려왔다. 재일동포 문세광이 권총으로 육영수여사를 저격해서 사망하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은 엑스플로 74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참석자들은 다 같이 북한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국기독교의 반공의식을 다짐했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준곤 목사와 박정희 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김준곤 목사는 1964년 미국의회조찬기도회에 참석하게 되었는데, 이 때 한국에도 이와 같은 모임을 만들 것을 제안 받게 되었다. 1965년 김준곤은 국회조찬기도회를 만들게 되었고, 그 다음해인 1966년에 박정희대통령을 초청하여 대통령초청조찬기도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이것은 뒤에 국가조찬기도회로 바뀌었다. 당시 한국정부의 가장 큰 과제는 국가안보였고, 그 이념은 반공이었다. 당연히 국가 조찬기도회는 기독교를 통하여 남한의 반공이념을 분명히 하는 기회로 활용되었고, 이것을 통하여 정부와 복음주의적인 기독교는 상호 연대를 갖게 되었다.

사실 김준곤은 당시의 어떤 기독교지도자 못지않게 반공이념에 철저했다. 그것은 먼저 그 자신의 경험 때문이었다. 김준곤은 한국전쟁 당시 전라남도 지도에 살았는데 석 달 동안 공산치하를 경험하였다. 이 때 그는 자신의 눈앞에서 아내와 아버지가 죽는 것을 보았다. 그 지역의 20,000명 가운데 2,000명이 공산군에 의해서 죽었다. 이와 같은 그의 경험은 극도의 반공정신을 갖게 만들었다.

김준곤 목사에게 있어서 대한민국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고, 그 가장 중요한 방법은 기독교신앙이다. 김준곤 목사는 엑스플로 74의 마지막 날 설교에서 이렇게 외쳤다:

현대라고 하는 것은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2등분되어 있습니다. 현대사회의 중요한 분수령의 하나는 이 분기점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세계의 공산주의 가운데 가장 악랄한 공산주의는 북한에 있는 김일성공산주의입니다. 그런데 자유진영이라고 하는 것은,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은 그 바탕이 기독교정신입니다. --- 우리 기독교가 언제 공산주의를 소화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서구를 소화할 수 있어야 하고, 공산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현대의 허무주의를 극복해야 하고, 유럽에서 들어오는 도덕적 부패와 기독교 이단과 기독교 쓰레기 --- 모든 쓰레기와 같은 것들을 극복해야 하는데 한국에 성령의 불로 이런 것들을 태워 버리고 한국에서 오순절과 같은 부흥운동이 일어난다면 그와 같은 때를 허락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김준곤 목사가 반공만을 외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서구의 세속주의, 잘못된 기독교에서 한국기독교를 구원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적은 역시 공산주의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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