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Explo 74와 김준곤 목사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1974년 여름에 열린 엑스플로 74는 아마도 한국교회 역사상 대형집회의 절정일 것이다. 약 일주간 동안 여의도 광장에서 열린 이 대회는 단순한 저녁 부흥집회가 아니라 전국에서 몰려온 신자들이 일주일 동안 함께 먹고 자며 전도훈련을 받는 집회였다. 이 집회를 통해서 한국교회는 자신들의 저력을 한국사회에 다시 확인했으며, 이것을 기회로 한국교회는 비약적인 발전을 하였다.

엑스플로 74의 안내서에 의하면 엑스플로의 배경으로 세 가지를 말하고 있다. 첫째가 예수혁명이고, 둘째가 엑스플로 72이며, 셋째가 민족복음화운동이다. 여기에서 먼저 예수혁명에 대해서 설명해야 할 것이다. 예수혁명은 1960년대 후반 미국에서 일어난 청년운동이다. 이 운동은 60년대 중반 미국에서 일어난 반문화운동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운동이다. 반문화운동이란 기계문명이 인간의 우상이 되고, 인간이 비인간화되는 미국의 현실을 보면서 여기에 대해 도전하는 일종의 히피운동과 비슷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미국의 월남전 참전에 대해서 강력하게 반대하며, 어느 정도 좌파적인 경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6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이와 같은 반문화운동은 한계를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영적인 것을 추구하는 운동이 생겨나게 되었다. 그래서 많은 젊은이들이 다시 신앙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선교단체들은 이들에게 합당한 새로운 형태의 선교전략을 찾게 되었다.

다음으로 엑스플로 72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엑스플로 72는 미국의 대학생선교단체인 CCC가 예수혁명을 외치는 젊은이들을 1972년 6월 12일부터 17일까지 텍사스 달라스에 모이게 해서 열었던 대학생집회였다. 이 집회 기간 동안에 젊은이들이 약 10만 명 가량 모였고. 마지막 날에는 18만 명이 모였다. 그리고 이 모임은 전통적인 부흥집회와는 달리 음악축제의 성격을 가지고 모여 젊은이들의 흐름과 맥을 같이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여기에서 모여 성경공부와 전도훈련을 받았고, 그 결과 약 2000명의 청년들이 앞으로 선교기관에서 헌신할 것을 약속하였다. 미국의 매스컴들은 이 집회가 미국의 2천여 도시전도운동의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엑스플로 72는 예수 혁명운동을 복음주의신앙과 접목한 것이다. 반문화운동은 모든 가치를 부정한다. 그래서 결국은 회의주의에 빠지는 것이다. 예수혁명운동은 모든 것은 상대적이라는 점에서 반문화운동과 같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절대적이라는 점에서 반문화운동과 다른 점이다. 상대적인 세계에서 절대적인 것을 찾은 예수혁명의 젊은이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라는 복음의 메시지를 믿고, 이것을 전하는데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엑스플로 72에 참여한 젊은이들은 그들이 믿고 있던 좌파적인 이데올로기 자체에 대해서도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한다. 이들에게 절대적인 분은 오직 예수 밖에 없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수혁명운동이 기존의 히피운동과 구별되는 점을 갖게 되는 것이다.

사실 CCC의 메시지는 젊은이들의 언어를 사용한다. 이들은 “예수 혁명”, “성령의 제 3의 폭발”과 같은 자극적인 용어를 사용한다. 이들은 전통적인 예배 복장이 아니라, 자유스러운 젊은이들의 옷을 입고, 전통적인 찬양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좋아하는 복음 송을 부른다. 이들은 또한 전통적인 교회조직이 아니라 순과 같은 새로운 조직을 통해서 모임을 이끌어 간다. 하지만 이들이 말하는 내용은 매우 철저한 복음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역사의 주인이며, 그에게만 소망이 있다고 주장한다. 아울러서 성령의 폭발적인 은혜를 기대한다. 사실 엑스플로는 전통적인 메시지를 새 시대의 옷을 입혀서 전달한 것이다.

또한 엑스플로 74는 한국의 민족복음화운동의 맥락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미 한국교회는 민족복음화라는 강력한 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65년에 김활란박사를 중심으로 전국복음화운동이 시작되었고, 한경직 목사가 주축이 되어 73년에는 빌리 그래함을 초청하여 전도집회를 열었다. 사실 CCC는 65년 전국복음화대회부터 참여하였다. 미국 CCC 대표인 빌 브라이트가 65년 11월 열린 신도대회에 참여하여 축사를 하였다. 엑스플로 74는 60년대부터 민족복음화운동을 이끌었던 한경직 목사를 명예위원장으로 하여 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엑스플로 74는 이와 같은 한국의 민족복음화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김활란과 한경직의 민족복음화운동은 김준곤에 이르러서는 새로운 의미로 확대하게 되었고, 보다 조직적이 되었다. 김준곤의 CCC운동은 60년대 학생선교에 집중하였고, 국가적으로는 국가조찬기도회를 주도하고, 군 선교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1970년부터 CCC는 단순한 대학생선교단체에서 벗어나서 민족 복음화를 사명으로 간주하고, 여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1970년 12월 15일 김준곤은 CCC 요원들이 모여 훈련하는 시간에 “민족의 예수 혁명론”이라는 제목의 설교를 하였다. 이 설교에서 그는 지금을 혁명의 시대라고 규정하고, 그것은 정치적으로는 막스의 공산주의혁명이며, 생활의 측면에서는 프로이드의 섹스혁명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당시의 젊은이들이 정치적으로는 막시즘에 매몰되고, 삶에서는 섹시즘에 빠져 있는데 이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를 통한 민족혁명 밖에 없다고 보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김준곤 목사가 김활란과 한경직 보다 더 직접적으로 현대의 불신사조에 대해서 강력하게 부딪히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김준곤은 보다 직접적으로 당시 유행하고 있던 진보주의를 비판하고 있다. 그는 진보주의자들이 사회를 바꾸려면 먼저 사회구조를 변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이것은 잘못이라고 본다. 김준곤 목사는 사회를 변화시키려면 먼저 사람을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신이 잘 아는 선교사를 예를 들면서 윤락여성에게 그 일을 하지 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그에게 복음을 전했을 때, 그 복음이 먼저 그 여인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서 그 일을 그만두었다고 소개하면서 인간의 변화가 먼저라고 강조했다. 이것은 분명 진보주의 신학의 혁명이론을 공격하는 것이다. 김준곤 목사는 이 일을 위해서 목숨을 걸 사람이 300명만 있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서 이 민족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강조한다. 김준곤 목사가 이렇게 설교한 다음 1971년 1월 1일 경기도 수원의 서울농대에서 민족복음화요원강습회를 열고 민족복음화선언을 하였다. 이로서 김준곤 목사와 CCC는 민족복음화운동에 공식적으로 참여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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