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1973년의 빌리그래함 전도대회와 한경직목사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70년대 한국의 대형집회의 출발은 무엇보다도 73년에 개최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였다. 사실 빌리 그래함과 한국의 관계는 오래 되었다. 빌리 그래함이 한국에 처음 방문한 것은 1952년 말 크리스마스를 전후해서였다. 그 때 빌리 그래함은 한국교회와 미군들을 상대로 전도했다. 그는 “당신이 한국인이든지, 미국인이든지, 중국인이든지, 일본인이든지 하나도 다르지 않다. 모든 사람은 죄인이며,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다”고 외쳤다. 이 집회의 통역은 한경직목사였고, 이것을 시작으로 한경직과 빌리 그래함의 관계는 시작되었다.

이 후 한경직과 빌리 그래함의 관계는 계속되었다. 빌리 그래함은 1956년에도 다시 방문했는데 이 때 역시 한경직목사가 통역을 하였다. 당시 이 집회에는 이승만대통령과 함태영부통령, 그리고 육군참모총장 등이 참여하였다. 이것은 빌리 그래함의 집회가 정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당시 한국은 전쟁 이후 반공에 대한 분명한 입장이 필요했다. 하지만 미국의 NCC와 WCC는 반공주의가 아니었고, 이념을 초월한다는 이름으로 자본주의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고,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우호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반공을 내세우는 이승만은 반공을 분명히 하는 미국 복음주의의 지원이 필요했을 것이다. 한경직목사 역시 북한에서 공산주의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철저한 반공의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비록 한경직은 WCC에 대해서 우호적인 한국 NCC에 가입한 통합측 목사이지만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는 이승만과 빌리 그래함, 그리고 복음주의 입장에 서 있었던 것이다.

한경직은 원래 애국과 복음화 운동을 하나로 생각하였다. 그는 한국이 잘 되는 길은 민족의 복음화에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서 “민족을 살리고 부흥시키는 일은 기독교신앙을 받아들이고, 그대로 사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있어서 한국 복음화에 가장 큰 장애물은 바로 공산주의인 것이다. 원래 그는 공산주의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적대적이 아니었다. 하지만 해방 직후 그는 북한에서 직접 공산주의를 경험하였고, 이 경험은 그로 하여금 공산주의와 기독교가 양립할 수 없다는 분명한 입장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민족복음화와 반공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한경직은 복음으로 한국을 새롭게 만들려는 열정이 있었고, 빌리 그래함은 원래부터 세계를 돌아다니며 전도하는 복음전도자였다. 빌리 그래함과 한경직은 한국전쟁과 그 이후 깊은 교류를 가져왔고, 한경직은 빌리 그래함의 한국집회를 통역했을 뿐만이 아니라 빌리 그래함은 한경직을 초청하여 자신의 국제 집회에 강사로 일하게 하였다. 1973년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는 바로 이와 같은 두 사람의 공동정신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경직은 빌리 그래함과의 관계를 통하여 복음주의 세계에 깊숙이 발을 들여 놓았다. 원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강사로 활동했던 한경직목사는 빌리 그래함이 주도했던 1966년 베를린대회에 김활란을 비롯한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 대회는 WCC의 종교다원주의를 반대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의 유일한 소망이라고 선언하였다. 특별히 한경직목사는 이곳에서 전도의 전략에 대해서 새롭게 배웠다. 그것은 전도를 하려면 첫째 사람이 많이 모인데 가야하며, 둘째, 방법이 새로워야 하고, 셋째, 전도자를 잘 훈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한경직목사는 이것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이렇게 한경직목사는 김활란박사와 함께 전국복음화 운동을 전개하는 가운데 빌리 그래함을 초청하자는 의견을 갖게 되었고,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함께 이 사업을 진행시켰다. 빌리 그래함은 20세기의 최대의 복음전도자였다. 그는 전도를 기독교의 지상목표로 삼고 있으며, 미국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을 구원하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빌리 그래함은 전도를 강조하기 위해서 사소한 신학적인 차이를 무시하며, 더 나아가서 전도의 기회만 주어진다면 무신론적인 공산사회에 가서도 복음을 전한다. 실제로 빌리 그래함은 최초로 공산주의국가에 가서 전도집회를 연 사람이다. 이런 빌리 그래함에게 박정희의 독재문제는 큰 이슈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정치체재를 넘어서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우선적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은 빌리 그래함목사가 5월 26일 청와대에서 박정희대통령과의 면담에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박정희는 빌리 그래함을 만나서 북한에 종교의 자유가 없음을 강조했다. 그가 강조하려는 것은 남한 사회가 북한과 비교할 때 분명히 종교의 자유를 인정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빌리 그래함은 공산주의에도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음을 지적했다. 빌리 그래함은 박정희에게 “이제 공산국가에도 신앙의 자유가 없이는 살수 없다는 신념이 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소련 수상 코시킨이 상처(喪妻)했을 때, 그는 그의 부인의 영전에 히브리치 꽃을 바쳤는데 그 꽃은 원래 신에 대한 믿음을 상징하는 꽃이다.”고 말했다. 그는 후에 열린 기자회견에서 공산권에서 전도집회를 가지려는 강한 바람을 나타냈다. 실지로 빌리 그래함은 공산권에서 최초로 대중전도집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복음전도자로서 이념을 넘어서서 가능한 대로 전도할 수 있는 모든 기회를 얻고자 했던 것이다.

빌리 그래함 집회는 무엇보다도 조직적이었다. 그는 대회를 어떻게 조직하고, 어떻게 신자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빌리 그래함 집회는 사실 치밀한 준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는 1971년부터 한국인들과 같이 준비모임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와 한국 측 사이의 역할 분담과 재정 분담 등이 논의되어졌다. 사실 이 집회를 이끌어 가는데 미국측과 한국측의 의견의 갈등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한경직목사의 중재에 의해서 잘 해결되었다. 일부에서 ‘외국 전도자를 초청하는 것이 사대주의적인 발상이 아닌가’ 라고 비판하였지만 한국교회는 빌리 그래함의 전도대회를 통해서 한국 교회는 대형집회를 운영하는 기술들을 배웠다고 말 할 수 있다.

이 전도집회는 한국교회를 하나로 만드는데 기여하였다. 중도적인 복음주의 노선을 갖고 있는 한경직목사는 한국교회 전체를 아우를 수 있는 리더쉽을 갖고 있었다. 따라서 이 집회에는 한국의 대부분 교회가 참여하고 있었으며, KNCC도 여기에 대한 찬성을 표시하였다. 여기에 참석한 주요 교단을 보면 기장과 기감을 비롯한 진보적인 교단, 통합을 중심으로 한 중도적인 교단, 합동측과 같은 보수적인 교단이 포함되어 있다. 이 집회를 통해서 한국교회의 주류가 보다 분명하게 형성되게 되었다. 그것은 온건한 복음주의 노선이다. 그러므로 진보적인 그룹도, 근본주의 그룹도 한국교회를 대변할 수 없는 것이다. 빌리 그래함과 같은 온건 복음주의가 한국교회의 주류인 것이다.

하지만 일부 진보적인 그룹과 ICCC 계열은 여기에 반대하였다. 비록 NCC가 빌리 그래함 집회에 대해서 지지성명을 냈지만 한국의 진보주의 인사들은 빌리 그래함 집회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으로 생각했다. 사실 1972년 10월 소위 유신이 선포되었고, NCC를 중심으로 하는 진보주의자들은 유신반대 운동에 나서게 되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가 정부의 지원으로 열리고, 이것을 통해서 한국교회의 주류 기독교가 유신반대의 대열과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좋게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진보주의자들의 이 대회에 대한 비판은 주로 빌리 그래함의 설교와 그 집회의 성격에 대해서 이루어졌다.

우선 가장 일반적인 비판은 빌리 그래함 집회에 예언자적인 메시지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당시 박정희의 독재체재에 대한 비판이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빌리 그래함은 복음전도를 위해서 온 사람이다. 복음전도자에게 정부 비판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다른 비판은 빌리 그래함의 설교가 너무나 평이 하다는 것이다. 특별히 백락준박사는 빌리 그래함의 설교를 사도신경적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대중집회의 생명력은 평이한 설교이다. 빌리 그래함의 설교에서 심오한 철학을 듣고자 했다면 실망하겠지만 그의 설교에서 분명한 복음을 듣고자 했다면 그의 설교는 만족스러운 것일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이 빌리 그래함의 집회를 반대했지만 동시에 보수주의자들도 빌리 그래함의 집회를 반대했다. 사실 ICCC 계열은 일찍이 빌리 그래함을 타협주의자라고 비판하였다. 빌리 그래함은 분명 NAE와 같은 복음주의 계열에 속하지만 WCC 계열인 NCC와 협조하에 집회를 하기 원했고, 그는 복음을 전할 수만 있다면 공산권과도 손을 잡을 수 있다는 자세였다. 이런 측면에서 한국의 강력한 반공단체인 ICCC계열은 빌리 그래함의 집회를 비판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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