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기독일보 DB
이 전국복음화운동의 핵심은 대중전도 집회였다. 1965년 초부터 전국적으로 시작된 순회집회는 생각만큼 활성화되지 못하였다. 하지만 5월부터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였다. 전국복음화위원회는 중국의 유명한 부흥사 조세광 목사를 초청하여 전국의 주요도시를 순회하며 집회를 가졌다. 여기에 대한 한국교회의 호응은 대단하였다. 이 운동의 주요 실무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조동진 목사에 의하면 조세광 목사의 집회를 기점으로 이 운동이 불을 붙었다. “이러한 수련회가 제 2차로 진행되는 5월 초에 내한한 조세광(趙世光)박사는 전국복음화운동의 고달픈 전진에 불을 끼얹었다. 전북의 김제, 이리에 던진 불길은 부산, 대구, 목포, 광주를 휩쓸고 인천을 거쳐 서울로 올라왔다. 피동적이던 지방조직은 앞을 다투어 스스로의 조직을 개편하고, 명목만의 새로이 재조직을 착수했다. --- 그 후에 지구조직들은 급속도로 유용한 조직으로 개편되었다.” 이런 조세광 목사의 집회를 계기로 전국복음화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였다.

여기에서 전국복음화운동의 주요강사였던 조세광 목사에 대해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조세광 목사는 상해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 목사로서 중국기독교영량세계포도회(中國基督敎靈糧世界佈道會)를 조직하여 세계적으로 활동하는 부흥사였다. 전국복음화운동은 핵심 사업으로 세계적인 부흥사를 초청하기로 하고, 조세광 목사와 교섭하였다. 여기에는 합동측의 조동진 목사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세광 목사는 1965년 5월 4일 김제집회에서부터 6월 3일 인천집회까지 약 한 달 동안 전국을 순회하면서 집회를 하였고, 6월 9일부터 15일까지 서울집회의 주 강사였다.

조세광 목사는 한국인과 비슷한 경험을 가진 아시아인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는 공산치하에 형제를 두고 온 중국복음전도자이며, 그의 이런 경험은 북한에 형제자매를 갖고 있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깊은 공감대를 가질 수 있었다. 조세광 목사는 한국이 바로 이런 공산권에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의 대형집회는 반공과 복음화라는 두 가지를 키 워드로 하고 있다. 전국복음화운동의 보고서는 “이 집회에서 우리는 우리와 공통된 운명에 놓인 조국을 가진 한 아시아인의 육성(肉聲)을 들을 수 있었다. 이 음성은 강력한 반향을 얻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운동은 조세광 목사와 더불어서 한경직, 김활란, 김옥길, 조동진, 강원용 목사 등도 함께 참여하였다. 이들은 전국으로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이 운동의 마지막은 1965년 11월 5일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신도대회가 열렸다. 이 운동은 연인원 백만 명 이상이 참여하였다. 이 운동은 60년대 진보와 보수가 나뉘어져 있는 가운데 한국교회의 실질적인 연합운동이었고, 70년대에 전개될 대형집회의 출발점이 된다.

전국복음화운동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전국신도대회는 한국교회사상 매우 의미 있는 집회이다. 이 모임은 어느 특정한 강사의 전도집회나 부흥집회가 아닌 한국교회의 거의 모든 교파와 기관들이 참여해서 만든 한국 기독교최초의 모든 신자들의 대회였다. 이 집회는 2일부터 4일까지 영락교회, 종교교회, 구세군에서 특별집회를 가졌고, 5일 오후 2시에 서울운동장에서 한국교회신자들이 전체가 모이는 전체집회로 진행되었다. 5일에 열린 집회는 홍현설박사의 사회와 한경직 목사의 설교로 진행되었다. 한경직 목사는 “우리의 살길은 그리스도”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하나님이 먼저 이 민족에게 복음을 주심을 감사하고, 해방 후에 남한에 자유를 주셔서 하나님을 믿게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지적하면서 한국사회를 길을 잃은 사회이며, 병든 사회라고 분석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만이 길을 잃은 민족에게 참 길이 되며, 병든 한국사회를 치유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외쳤다. 아울러서 인간의 근본적인 문제는 생명이라고 말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생명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다. 한경직 목사는 전형적인 복음전도설교를 하였다.

한경직 목사의 설교를 뒤 이어 전국복음화운동신도대회의 신도선언이 낭독되었다. 이 신도선언은 기독교장로회의 조향록 목사가 초안을 잡은 것으로서 조향록 목사, 이대의 김옥길총장, 숭실대의 고범서교수가 낭독하였다. 이 신도선언은 한국교회가 봉건주의와 싸워 근대화에 기여했고, 일제의 군국주의와 싸워 민족의 자주권확립에 힘썼고, 아울러서 조국의 자유번영에 힘써 왔다고 전제하면서 오늘의 한국의 현실에서 교회가 해야 할 일 세 가지를 천명하였다. “첫째 교회에 일치를, 둘째 사회에는 변혁을, 셋째 민족에겐 소망”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보다 구체적으로 이 선언은 한국교회가 분열한 것을 회개하며 성령 안에서 하나 될 것을 강조하고, 한국교회가 한국사회의 건전한 도덕발전과 경제성장을 위한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동시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한국민족에게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선언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통일과 반공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는 것이다.

이 대회는 한경직 목사의 설교 외에도 정일권총리를 비롯한 각료들이 참석하였고, 3군군악대의 연주도 있었다. 이것은 정부가 이 집회에 대해서 호의적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울러서 미국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에서 파송된 레이트 포드와 CCC 세계 총재인 빌 브라이트 박사의 축하인사도 있었다. 이들의 축사는 70년대의 한국교회의 대형집회인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와 CCC의 엑스플로 74를 예고해 주는 신호 같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전국복음화운동의 주역인 김활란박사에 대해서 좀 더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널리 알려진 대로 한국 최초의 여자박사로서 한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이다. 또한 그는 국제선교협의회(IMC)를 비롯한 여러 국제대회에 참여하여 한국교회를 세계에 소개했을 뿐만이 아니라 세계교회를 한국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1930년대 김활란박사는 한국에 사회복음운동을 소개하여 한국의 농촌계몽운동에 기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해방 후 그는 한국사회를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외에 없다는 확신 아래 기도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이것이 1960년대에 금란전도협회라는 모임을 만들었고, 이것이 1965년 다락방전도협회로 전환하였다. 이 운동의 목표는 기도와 전도이며, 김활란박사는 1960년 초 이대총장을 은퇴한 다음에 전도활동에 더욱 매진하였다. 그는 IMC가 WCC와 통합하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그 이유는 WCC가 전도를 소홀히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시 한국교회, 특히 감리교는 WCC에 가입하여 WCC의 새로운 사조를 수용하는데 바빴다. 하지만 김활란박사는 오히려 복음만이 이 나라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고, 전도를 통한 민족 사랑운동을 실천한 것이다.

1965년 전국복음화운동을 정치적인 측면에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964년 한국은 한일협정문제와 월남 파병문제가 가장 중요한 이슈였다. 대다수의 한국교회는 한일협정을 반대했다. 하지만 월남파병문제는 달랐다. 공산주의의 위협에 직면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공산주의의 위협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고, 북한은 미국의 월남전선을 흩어놓기 위해서 남한에 대한 도발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국은 시끄러웠다. 하지만 이런 상황 가운데 일부 진보주의자들이 남북통일론을 들고 나왔다. 여기에 대해서 한국교회는 위기의식을 느꼈다. 홍현설박사는 이런 가운데 이심전심으로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 결과 전국 복음화운동이 시작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은 현실 때문에 정부당국은 기독교를 가장 강력한 반공세력으로 인식하게 되었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정일권은 이 대회의 클라이막스인 전국신도대회에 참석하여 “그리스도인의 이 역사적인 신도대회가 민족을 살리고 공산주의를 타도하는 놀라운 계기가 될 것”이라고 축사를 하였다.

비록 전국복음화운동이 한국인에 의해서 한국인 강사를 중심으로 출발했지만 외국교회의 도움도 여기에 큰 역할을 하였다. 이미 위에서 지적한 대로 중국의 조세광 목사는 실질적으로 전국복음화운동의 불을 지핀 인물이다. 또한 밥 피얼스와 세계선명회, 빌리 그래함 전도집회가 파송한 두 명의 전도자와 국제 CCC의 총재 빌 브라이트 박사, 미국 장로교회의 마이얼스박사와 미국 감리교전도국 총무를 지냈던 덴만박사 등이 이 집회에 참석하여 강사로 수고했다. 따라서 이 운동은 한국인이 주도했지만 선명회, CCC, 빌리 그래함 전도협회등과 같은 복음주의 단체들과 미국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의 협력도 중요했다고 본다. 이 외국인 강사들은 주로 미션 스쿨들을 순회하면서 대대적인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처음부터 이 집회는 한국교인들의 헌금으로 충당하려고 계획하였다. 특별히 김활란박사는 한국의 중요한 기독교실업인들을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여 만찬을 대접하고, 헌금을 호소하였다. 당시 대표적인 기업인이었던 최창도, 김형남, 최태섭장로 등은 당시로서는 거금이었던 10만원씩을 헌금하였다. 이와 같은 한국 기업인들의 참여는 한국교회 대형집회 운영의 중요 요소가 되었다. 교회로서는 당시 영락교회의 헌금이 가장 많았는데 20만원을 조금 넘는 액수였다. 서울의 연합집회의 헌금은 약 40만 원 가량이었다. 재정에 있어서도 외국교회의 협조가 컸다. 조세광 목사, 미감리교의 덴만은 각각 100만원 가량을, 선명회는 2백 50십만원의 후원금을 냈다. 이외에도 외국인들의 협조가 많았다. 사실 전체 예산 900만원 가운데 반절 가량이 외국인의 도움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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