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대림절이다. 성탄절 전 4주간을 일컫는 대림절은 아기 예수님의 탄생과 재림을 준비하는 특별한 의미의 절기이나 어느 때부턴가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이나 ‘제야의 종소리’와 같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로 빛이 바래가고 있다.

기독교가 대림절을 지키기 시작한 건 주후 4세기경부터다. 처음엔 성탄 4주 전부터 시작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축하하고 감사하는 성탄절을 준비하기 위한 절기였다. 그러다가 7세기 후반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초림뿐 아니라 재림을 기다리는 절기로 그 의미가 확대되었다.

달력에서 12월은 한해의 끝자락이지만 교회력에서 대림절은 한 해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기다리고 다시 오실 주님을 고대하는 믿음으로 새로운 해를 시작하는 뜻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런 특별한 의미의 절기를 오늘 한국교회가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의문이다.

지난달 20일 시청 앞 서울광장에는 대형 성탄트리가 불을 밝혔다. 그리고 거리 곳곳에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해 연말이 다가왔음을 실감케 한다. 사람들은 교회보다 일찍 더 크고 화려하게 성탄 트리를 장식한 도심 상가를 보며 크리스마스 시즌이 다가왔음을 피부로 느낀다.

대림절에 교회가 성탄트리에 별을 달고 각종 장신구와 전구로 장식하는 건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오랜 전통이다.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숲속에서 눈이 쌓인 전나무가 달빛을 받아 빛나는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처음으로 성탄트리를 만들었다는 설도 있다.

그러나 성탄트리가 전 인류에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는 장식으로 보편적으로 정착한 건 사실이지만 그 자체가 대림절의 본질이라 할 순 없다. 성탄절이 세상에서 기독교적 가치를 지닌 하나의 문화로 확산한 걸 뭐라 할 수 없겠으나 교회까지 바르게 지켜야 할 절기를 그저 하나의 계절적인 문화로 함께 휩쓸리는 건 곤란하다.

서울 도심 한복판에 위치한 유명 백화점들은 몇 년 전부터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세간에 화제가 되어 왔다. 사람들은 코로나19 사태로 답답한 상황에서 도심 한가운데서 펼쳐지는 화려한 파노라마 LED쇼에 매료돼 요즘 20~30대 사이에선 그곳이 ‘인증샷’ 명소로까지 떠올랐다고 한다.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이 매년 세간에 화제가 되다 보니 12월이 되기도 전에 백화점마다 ‘보이지 않는 경쟁’이 펼쳐진다. 이처럼 유명 백화점들이 엄청난 돈을 쏟아부어 가며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더 크고 더 화려한 장식이 사람들의 눈길과 마음까지 사로잡아 결과적으로 고객 매출 증대로 이어지길 바라는 속내 때문이다.

교회는 어떤가. 언제부턴가 도심에 위치한 대형 교회들도 더 크고 화려한 성탄트리 장식에 신경을 많이 쓰는 분위기다. 세상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방법을 고민한 결과이겠으나 배보다 배꼽이 커서는 곤란하다. 더 크고 더 화려한 것을 좇는 방법으론 결코 세상을 이길 수 없다.

예수님은 유대 땅 베들레헴의 작고 누추한 구유에서 태어나셨다. 별을 연구하는 동방박사만이 그곳에서 아기 예수님이 나셨다는 사실을 알고 찾아와 경배했을 뿐이다. 주님이 세상에 왕이나 권력을 쥔 자의 모습을 갖추고 오실 수 있었는데 그렇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땅의 교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전하기 위한 목적의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 그런데 어느 때부턴가 세상을 뒤쫓아 가려는데 온통 신경을 쓰고 있지 않나. “더 크고 더 화려하게”의 목표는 주님이 아닌 세상이다. 잠시 세상의 이목은 끌 순 있어서 그게 오히려 주님의 영광을 가릴 수 있다.

코로나 팬데믹 이후 교회의 고민은 다음 세대를 향하고 있다. 잠시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겠지 했는데 돌아오지 않는 이들이 있다. 사실 코로나 그 이전부터 교회들은 ‘가나안’(안나가) 교인 문제로 속앓이를 해왔다. 교회를 향한 ‘안티’ 세력의 무차별적인 도발도 마찬가지다. 저들의 이유 없는 적개심을 모두 교회의 탓으로 돌릴 순 없지만, 무엇이 저들을 교회와 세상이 다를 바 없다고 느끼게 만들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교회가 세상을 닮아가는 걸 세속화라고 한다. 그건 교회의 크고 작음, 즉 규모와 사이즈의 문제가 아니다. 복음의 가치를 물질, 명예, 권력과 바꾸려는 유혹에 흔들리면 세속화는 그 틈을 비집고 들어와 성(聖)과 속(俗)을 뒤엉키게 만든다.

해답은 만군의 왕이신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에 있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화려한 궁전이 아닌 어둡고 냄새나는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을까. 주님은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고 말씀하셨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하신 주님의 말씀을 한국교회가 다시 한번 가슴 깊이 새기는 대림절이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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