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할로윈 참사 소식을 듣기 전, 지인을 통해 축제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다양한 코스튬을 입고 발 디딜 곳 없이 모여든 동영상을 보았다. 그들이 입은 코스튬은 드라큐라, 악마, 좀비, 끔찍하게 신체를 훼손시킨 것처럼 보이는 것들이 가득했다. 어떤 코스튬은 코스튬이라 할 수 없는 민망한 속옷 차림, 노출 심한 옷들도 있었다. 영상으로 볼 때, 이태원 거리의 코스프레는 아이들과 같이 가서 즐길 수 있는 정도의 수위를 한 참 벗어나 보였다. 이런 코스프레를 볼 때, 어떤 불쾌한 느낌이었을지는 구체적으로 표현하지 않아도 대부분 알 것이다.

그런데 이 느낌을 가지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주시는 조명은 내가 느낀 것과 달랐다. 성령님은 그들이 왜 이런 옷차림으로 이태원에 발 디딜 자리 없이 몰려들었을지 생각하게 하셨다. 그것은 그들이 행복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령님은 그들의 눈빛 속에서 행복을 갈구하는 절박한 심정을 보게 하셨다. 귀신과 해골과 자기 몸과 얼굴을 훼손한 듯한 코스튬과 아슬아슬하게 노출한 옷차림으로 돌아다니는 그들은 잠시라도 공허와 마음의 괴로움을 잊게 해 줄 진통제를 찾고 있는 것이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가슴이 먹먹하고 시려왔다.

이런 묵상을 하는 가운데 잠시 후 믿을 수 없는 끔찍한 소식이 들려왔다. 이태원에서 150명이 넘는 젊은이들에게 참변이 일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소식과 함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무엇이 이 젊은이들을 할로윈 축제에 모이도록 했는가?”라는 것이었다. 이 문제에 대해 대한민국 사회 전체는 공동의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특정 누군가에게만 이 책임을 묻기보다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 자체가 스스로를 뒤돌아보고 책임감을 느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장 먼저 책임감을 느껴야 하는 곳은 교회라 생각한다.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 진리의 기둥과 터로 부름 받은 존재다. 따라서 교회는 할로윈 행사에 대해 성경적인 가르침과 경고를 했어야 했다. 사람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이 행사가 얼마나 반기독교적이며 불경건한 유래를 가진 행사인지 가르치고 경고하고 반대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인들조차 할로윈 데이 행사에 대해 심각하게 반응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기독교인 교사들조차 유치원이나 학교, 학원에서 긍정적으로 말하고 거기에 학생들을 동참시키는데 한몫하기까지 했다.

방송국도 결코 책임에 자유로울 수 없다. 방송국의 역할은 공공의 유익을 주는 데 있다. 그런데 방송국들이 할로윈 데이가 이 사회에, 특히 젊은이들 속에 침투해 들어오는 데 있어서 이렇다 할 경고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모 방송사는 이 끔찍한 참사 하루 전 금요일에 이태원 현장 중계까지 해서 젊은이들에게 호기심을 자극하고, 일종의 홍보 효과를 줬다. 참사가 일어난 당일 이태원에, 경찰이 예상한 10만 명을 훌쩍 넘긴 13만 명이 축제에 몰린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생각된다.

또 책임감을 가져야 할 대상이 있다. 그것은 할로윈 데이를 상업주의 관점으로만 바라본 사람들이다. 상업주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도를 넘어선다면 상업주의는 자본주의의 뿌리를 갉아 먹는 가장 무서운 원흉이 된다. 상업주의에도 윤리와 정의가 있어야 한다. 이윤도 좋지만 넘어서는 안 될 선이 있고, 지켜야 할 도리가 있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돈벌이에만 급급한 상업주의를 크게 반성해야 한다.

그 외에도 우리는 서양 문화에 대해 비판 없이 추구하는 문화 사대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서양 문화를 받아들이는 태도는 심각한 수준이다. 서양의 문화라면 비판 없이 추구하는 것뿐 아니라, 그 문화의 부정적인 요소를 너무 과감하게, 너무 빠른 속도로, 더 심하게 추구하는 경향까지 보인다. 필자가 알기로 정작 할로윈 축제의 본산지인 유럽도 이렇게 과도한 모습은 보이지 않는 것으로 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교회의 역할을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겠는가? 교회가 아니면 세상의 어떤 것으로도 짠맛을 낼 수 없다.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세상에서 짠맛 내는 소금 역할을 해야 하겠는가? 세상에서 진리의 기둥과 터 역할을 해야 한다. 진리의 기둥과 터 역할은 정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정죄하는 것만으로는 짠맛을 낼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자를 향하여 돌로 죽이는 것이 소금 역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녀를 사랑함으로 소금 역할이 무엇인지 보여주셨다. 소금 역할은 세상을 정죄하기보다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랑이 죄와 불법과 부정함에 대한 관용으로 이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사랑하셨지만 죄는 미워하셨다. 간음하다가 현장에 붙잡힌 여자를 품고 사랑하셨지만, 그녀에게는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고 하셨다. 이것이 교회가 세상에서 소금 역할을 하는 방식이다. 이런 차원에서 교회는 유명을 달리한 젊은이들을 향해, 또 그 향락과 광란의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을 향해 정죄하기보다 같이 아파하고 슬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 끔찍한 참사를 가져온 할로윈 문화에 대해서는 냉철하게 비판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주님은 공생애 기간에 그렇게 하셨다.

마지막으로 이번 참사를 정치권에서 정쟁 도구로 사용하지 않길 소망한다. 더 이상 국민의 쓰라린 마음을 자극하지 말고 보듬고 감싸주는 정치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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