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7박 9일간의 유럽순방을 마치고 지난 5일 귀국했다. 문 대통령은 G20 정상회의와 제26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 참석을 위한 이번 유럽순방 중 프란치스코 교황을 단독 면담한 자리에서 지난 2018년에 이어 또다시 ‘교황 방북’을 제안했다.

청와대 박경미 대변인은 문 대통령이 지난달 29일 바티칸의 교황궁 서재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방북을 제안했고, 교황은 “북한에서 초청장이 오면 기꺼이 (북한에) 갈 수 있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교황청 공보실이 낸 문 대통령과 프란치스코 교황의 만남 관련 보도자료에 방북 관련 내용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청와대는 또 지난달 30일엔 문 대통령이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만나 교황에게 방북을 요청한 사실을 직접 설명했다고 전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이 “반가운 소식” “(한반도 문제 해결에) 진전을 이루고 계시다”고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 정작 백악관은 두 정상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에 대해 언급조차 없었다.

문 대통령의 거듭된 의지와 청와대 대변인이 전한 소식만 보면 교황의 방북이 당장 성사될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며칠 후 박 대변인이 영국에서 KBS 라디오에 출연해 한 말이 이 모든 궁금증을 풀어줬다. 박 대변인은 1일 “교황님이 아르헨티나 따뜻한 나라 출신이기 때문에 겨울에는 움직이기 어렵다고 알고 있다”고 했다.

청와대 대변인의 ‘날씨’ 발언은 국제사회에까지 파장을 일으켰다. 미국의소리(VOA) 방송은 “아르헨티나는 항상 ‘따뜻한’ 나라가 아니라, 일부 지역은 혹한 피해를 입을 정도로 기온이 떨어진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미국 북한인권위원회(HRNK) 그레그 스칼라튜 사무총장은 “아르헨티나에 스키장이 있다는 것을 아느냐”고 반문하기도 했다.

미국 워싱턴 정가의 이런 분위기는 교황의 방북이 단지 ‘날씨’에 좌우되지 않음을 시사하고 있다. 정말 교황이 북한의 추운 날씨를 의식해 방북을 꺼리는 거라면 이미 3년 전에 따뜻한 날씨를 골라 방북하고도 남지 않았겠나 싶다. 결국, 문 대통령의 교황 방북 제안을 새로운 국제이슈로 부각시키려 한 청와대의 계획은 교황의 방북이 성사되지 않을 가능성에 대비한 듯한 대변인의 발언이 모든 걸 말해주듯 용두사미(龍頭蛇尾)로 끝나고 만 것이다.

사실 교황은 정말 북한에 가고 싶은 마음일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최악의 인권·종교 탄압국가에 교황에 간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메시지적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북한이 오라고 하지 않는데 가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외교가에선 문 대통령이 임기 종료를 앞두고 어떤 성과라도 내고픈 심정은 이해가 가지만 아무리 그래도 3년 전에 이미 꺼낸 교황 방북카드를 다시 꺼낸 것 자체가 무리였다는 지적이다. 해묵은 카드를 다시 쓰려면 최소한 북한 김정은으로부터 방북 초청 구두 약속이라도 받아 가지고 갔어야 한다는 것이다. 달라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과거와 똑같은 제안을 한 것이 과연 교황의 방북 성사를 위해 정말 애쓰는 것인지 아니면 그냥 외교적 수사(修辭)인지 진정성에 의구심이 들 정도다.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 말이라는 시간표를 의식한 듯 최근 들어 ‘종전 선언’에 더욱 몰두하는 모습이다. 이번에 교황에게 방북을 다시 제안한 것도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현실에서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가능한 모든 시도를 다 해보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제안했던 ‘종전 선언’ 역시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다. 그 원인 중 하나는 이 또한 지난 2018년의 재탕이기 때문이다. 트럼프 미국 전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이 싱가포르에서 정상회담을 할 때 만해도 문 대통령과 청와대는 미·북 간에 ‘종전 선언’이 이뤄질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하노이회담이 실패로 돌아가고 북한 비핵화도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자동으로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3년 전 당시로 되돌아 가 보면 그때는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할 여지가 있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김정은과의 회담 성과를 자신의 노벨평화상 수상과 미국 대선에서 재선으로 연결하고픈 정치적 야망에 가득 차 있을 때였다. 그러나 지금 바이든 행정부는 트럼프 정부와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르다는 것을 왜 모르는가.

지금 전 세계는 2년째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미·중간의 정치·외교·경제적 갈등 관계는 국제 질서의 새로운 재편을 요구하는 상황으로 급변하고 있다. 그런데도 문재인 정부는 무슨 생각에서인지 3년 전에 꺼냈다가 다시 서랍 깊숙이 넣어두었던 ‘종전 선언’과 ‘교황 방북’을 다시 꺼내 들었다. 그러니 애초에 무슨 성과를 바라거나 아니면 이슈를 던지는 것조차 처음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른다.

문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소득주도 성장, 부동산 문제 등에서 드러난 실패를 한반도 평화라는 아젠다로 만회하고픈 마음이 누구보다 간절할 것이다.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라는 큰 그림을 원했던 문 대통령의 그런 일련의 심정을 단순히 고집이 세다는 말로 함축하기엔 적절치 않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문 대통령과 정부가 ‘종전 선언’에 매달리고 집착할수록 외교적 성과 대신 북한에 휘둘릴 가능성이 점점 커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북한으로서는 문 대통령의 이런 조급한 마음을 이용해 어떻게든 한미연합훈련의 중단 등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고 또 내년 대선판을 뒤흔들 불장난도 서슴없이 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모든 상황을 종합해 볼 때 문 대통령과 정부가 밀린 숙제를 한꺼번에 다 하려는 욕심으로 국가와 국민에 더 큰 짐이 되기보다 차라리 모든 걸 내려놓을 때가 아닌가 싶다. 지금 시점에서는 차기 정부를 위해 여백을 남겨두는 것이 보다 나은 선택이 될 수 있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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