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 또 한 분의 큰 별이 졌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설립자인 조용기 목사가 지난 9월 14일 86세를 일기로 소천했다. 조 목사는 한국교회 부흥 및 세계 선교에 헌신하며 한국교회 역사에 큰 획을 그었다.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서 명성을 떨친 그의 목회자로서의 첫발은 1958년 5월 18일 최자실 목사와 함께 서울 불광동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신인 천막 교회를 개척하며 시작되었다. 조 목사는 이 작은 교회를 교인 수 70만 명이 넘는 세계 제일의 교회로 부흥 성장시켰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3년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교회로 등재되기도 했다.

1936년 2월 14일 경남 울산 울주군에서 부친 조두천 장로와 모친 김복선 권사의 5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조 목사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청소년기에 중증 폐결핵에 걸려 병원에서 치료를 포기했었다. 깊은 절망에 빠진 그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은 누나의 친구였다.

누나 친구의 전도로 하나님을 영접한 조 목사는 6.25 당시 부산공고에 주둔해 있던 미군부대에서 학교와 미군 부대 사이의 통역을 맡을 정도로 영어 실력이 출중했다. 그후 미국의 오순절교단인 ‘하나님의성회’ 소속의 켄 타이스 선교사를 만나 집회 통역을 하면서 믿음이 깊어지고 폐결핵이 낫는 신유의 은사를 체험하게 된다. 그것을 계기로 1956년 9월, 20세 때 하나님의성회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이때 조 목사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준 최자실 목사를 만났다. 최자실 목사는 이후 장모이자 든든한 목회 동역자가 된다. 이 두 사람이 1958년 신학교를 졸업하고 그해 5월 18일, 천막을 치고 시작한 교회가 바로 오늘날의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시초였다.

조용기 목사는 최자실 목사의 든든한 동역에 힘입어서 목회자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그가 1973년 9월 아시아에서 최초로 제10차 세계 오순절 대회를 한국에서 개최할 수 있었던 것도 세계 제일의 교회로 성장한 여의도순복음교회 덕분이었다. 그 후 교회를 불광동에서 여의도로 이전한 뒤 더욱 폭발적인 성장세를 이어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79년에 10만 명, 1981년에 20만 명을 넘어서는 비약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조용기 목사는 제3세계 선교에도 크게 기여했다. 1992년부터 2008년까지 세계하나님의성회 총재를 역임하면서 아프리카 아시아 남미 등에서 대규모 성회를 인도하면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소련이 붕괴된 후 1992년 6월에 모스크바에서 가진 집회에서는 참석자 4만명 중 15,000명이 회개하고 결신하기도 했다. 이어 1997년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가진 성회에서는 150만 명이 운집, 개신교 집회 사상 최대 인원 기록을 세웠다.

조 목사는 1975년부터 2019년까지 71개국에서 최소 370차례 부흥회를 인도했다. 비행기로 지구를 120바퀴나 돈 셈이다. 이런 복음적 선교 열정은 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적인 지원이 아니고는 이루기 어려운 기록이다.

이뿐만 아니라 사회구제사업에도 적극적으로 발 벗고 나섰다. 불우청소년과 무의탁 노인을 위한 ‘엘림복지타운’을 건립했으며, ‘굿피플’을 통해 소외지역 개발과 빈곤퇴치, 아동보호 사업에도 앞장섰다. 그 공로로 1982년 ‘대통령 표창’(홀트학교 건립기금 및 장애아동 복지사업)을 수상했다. 또 1994년에는 대한적십자사부터 ‘적십자헌혈유공자 금장’, 1996년에는 심장병어린이 무료시술 지원 및 소년소녀가장 돕기 헌신으로 ‘국민훈장 무궁화장(보건복지부)’을 받았다.

조용기 목사가 이룬 또 하나의 업적은 한경직 목사를 도와 1989년 12월 보수 기독교연합기관인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창립한 일이다. 1989년, 한국교회협의회(NCCK)가 인천에서 ‘한반도 평화 통일에 관한 선언문’을 발표하고 문익환 목사가 방북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6개의 교단으로 이루어진 교회협이 한국교회 전체를 대변할 수 없다는 보수 기독교계의 강력한 응집력으로 탄생한 것이 한기총이었다. 한국교회의 큰 어른인 한경직 목사를 중심으로 정진경 최훈 목사 등 주요 교단의 대표적인 인사들이 앞장섰지만, 실질적인 산파 역할을 한 것은 조용기 목사였다.

이처럼 조 목사가 한국교회에 남긴 발자취는 깊고도 선명하다. 앞으로 한국교회에 조 목사와 같은 선이 굵은 목회자가 다시 나올지 장담할 수 없다. 그러나 조 목사가 걸어온 길이 늘 평탄하고 환하게 빛났던 것만은 아니다.

조 목사의 ‘삼박자 구원론’은 장로교가 주류인 한국교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기복신앙을 부추긴다는 이유로 신학적인 문제를 제기하는 교단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방언 등 성령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 신학의 특성을 배척하는 데서 오는 문제들이었다.

조 목사와 거의 동시대에 교회를 개척해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많은 목회자가 자녀들에게 교회를 물려주는 문제로 논란을 불렀다. 그러나 조 목사는 자녀에게 교회를 세습하지 않고 제자 중 한 명인 이영훈 목사를 후임으로 세우고 목회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분명 한국교회가 새롭게 평가해야 할 일이다. 다만 은퇴 후 일부 장로들에 의해 검찰에 고소 고발되고 아들이 구속되는 등의 문제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조용기 목사는 실로 “한국교회의 거목이요, 세계교회의 위대한 복음전도자”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목회자였다. 특히 6·25 한국전쟁을 겪으며 폐허 속에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며 실의에 빠져 있던 사람들에게 특유의 강력하고 호소력 있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파한 목회자는 찾아보기 어렵다.

2021년 9월 14일, 한국교회는 어른이 부재한 시대에 또 한 분의 지도자를 떠나보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을 복음적 메시지에 담아 희망과 긍정으로 풀어내던 조용기 목사님, 천국에서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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