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은 즉위해서 사망할 때까지 모든 권력을 한 손에 쥐고 군림한다. 그만큼 절대권력자이기에 단 한 명만 존재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하늘에는 두 개의 태양이 있을 수 없고 땅에는 두 명의 왕이 있을 수 없다”(天無二日 土無二王)며 절대 왕권을 강조했다.

그러나 왕조시대 정치가 언제나 원칙대로만 운영된 건 아니었다. 왕이 어리거나 경험이 미숙할 경우 왕위를 물려준 후에도 얼마동안 보호 목적과 정치 경험 계승을 위해 선왕이 ‘상왕’(上王) 지위에 있었던 예가 있다. 실제로 조선조에는 태조에서 고종에 이르기까지 5명의 왕이 ‘상왕’ 노릇을 했다.

그런데 왕정 시대도 아니고 21세기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때아닌 ‘상왕’ 논란으로 시끌벅적하다. 다름 아닌 북한 김여정이 우리 정부를 향해 매번 이래라저래라 간섭하는데 질질 끌려다니는 듯한 문재인 정부를 빗댄 표현이다.

북한 노동당 부부장 김여정은 남북 정상 간 친서 교환을 통해 남북통신선이 복원된 지 6일만인 8월 1일 발표한 담화에서 “한미군사연습은 남북관계의 앞길을 흐리게 한다”며 “남측이 큰 용단을 내릴지 예의주시할 것”이라고 언급했다. 그러고 나서 이틀 만에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이 국회에 나와 사실상 한미연합훈련을 연기해야 한다는 식으로 답변하면서 논란이 일파만파로 커졌다.

이에 대해 국민의힘 정보위 간사인 하태경 의원은 기자들과 만나 “국정원이 김여정의 하명기관으로 전락했다”고 맹비난했다. 김기현 원내대표도 “김여정 말 한 마디가 떨어지자 한미연합훈련을 그만하자는 말이 나오는데, 북한이 ‘상왕’이라도 되는 양 행동하는 것은 문재인 정부의 굴종적 태도 때문”이라고 했다.

한미군사훈련 연기론의 불을 지핀 것은 통일부다. 통일부 고위 당국자는 지난달 30일 기자단 간담회 자리에서 “연합훈련의 연기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며 처음 연합훈련 연기를 주장한 데 이어 3일에도 똑같은 입장을 재확인했다. 국정원장의 한미연합훈련 연기론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한미연합훈련에 대한 정부의 이런 소극적인 자세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다. 문 대통령은 올 초 신년기자회견에서 “한미연합훈련 문제를 북한과 협의하겠다”해 논란을 불렀다. 지난 5월 여야 5당 대표 초청간담회에서는 급기야 “코로나19로 대규모 군사훈련이 어렵지 않겠느냐”며 연합훈련의 중단 내지 연기에 운을 뗐다. 문 대통령을 비롯해 여권이 마치 코로나19 확산세가 큰 문제인 것처럼 핑계를 대고 있지만, 코로나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한미연합 군사훈련은 북한 침략에 대비하는 방어훈련이다. 북한이 가공할 핵무기를 포기하고 적화 야욕을 포기하면 구태여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연합훈련을 놓고 소모적 갈등을 유발할 필요도 없다. 북한이 이런 것을 모를 리 없다. 다만 트집을 잡아 원하는 것을 손에 넣으려는 전략 전술의 하나로 끊임없이 우리 정부를 압박하는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핵무장의 시간을 벌고 명분도 축적한 그들이다. 그런 점에서 북한은 잃을 게 없다.

반면에 문재인 정부는 실체는 없고 말 뿐인 ‘평화’에 집착해 시간을 허비하고도 기존의 입장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아 걱정스럽다. 다른 게 아니라 안보문제라서 더 그렇다. 야권으로부터 “연출된 위장 평화쇼”라는 비난을 받은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가공할 전술 핵무기를 완성하는 단계에 들어섰지만 정부는 문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줄곧 주창해온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의 실체가 무엇인지 아무것도 국민에게 보여준 게 없다.

한미연합훈련은 한미 두 나라가 동맹관계라는 것을 증명하는 상징과도 같다. 자유민주주의 가치 안에서 두 나라가 서로 군사적 유대를 다지는 안보 공동체 개념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연합군사훈련이 필요한 나라는 미국보다 우리나라다. 미국이 한국과 굳건한 동맹을 과시하는 것만으로도 북한과 중국 등 주변국으로부터 전쟁을 억제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매번 북한에 끌려다니며 인권을 외면하는 법(대북전담금지법)을 만들더니 이제는 통상적인 연합훈련을 연기하자고 정부와 여권까지 들고 일어서는 형국이다. 이런 모습을 동맹의 한 축인 미국 바이든 행정부가 어떻게 받아들일까. 모든 걸 돈으로 계산했던 트럼프 행정부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한미군사훈련을 대비해 한국군 55만명 분의 백신을 무상 지원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북한 김여정이 한미연합훈련 중단을 압박하자 통일부에 이어 국정원장까지 나서 유연한 대응을 주문하며 연기론에 힘을 싣는 모습은 마치 미리 짜 맞춘 듯 모두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훈련을 중단할 테니 대화를 재개하자는 것이다.

한미연합훈련을 대북 협상의 카드로 삼으려는 이런 정부의 발상은 위험할 뿐 아니라 얻을 게 없는 밑지는 장사다. 아무리 교착상태에 놓인 남북 경색 국면을 타개하기 위한 선택이라 하더라도 안보는 국민 전체의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그걸 수단화해 대화를 구걸해서는 얻을 게 없다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 김여정의 말 한 마디에 ‘대북전단금지법’을 만들고 한미연합훈련까지 연기하려는 것에 대해 야당이 ‘상왕’ ‘하명’ 등의 원색적인 용어를 써가며 비난을 쏟아내는 것은 차라리 약과란 생각이 든다. 매번 북한에 굴종하는 듯하는 정부가 앞으로 초래하게 될 냉엄한 결과들에 비하면 말이다. 지난 5월 한미정상회담에서 어렵사리 재확인된 한미 동맹관계가 복원된 지 3개월 만에 또 다시 금이 간다면 그보다 큰 손실이 어디 있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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