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윤선 대표
정윤선 대표가 3일 ‘복음한국 랜선 청년캠프’에서 간증을 하고 있다. ©유튜브 복음한국TV 캡처

‘복음한국 랜선 청년캠프’가 3일 오후 7시 30분에 유튜브 채널 ‘복음한국TV’를 통해 진행됐다. 이날 윤선디자인을 운영하고 있는 정윤선 대표가 간증했다.

윤 대표는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어떻게 예배자의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라며 “여러분들은 예배자라고 하면 어떤 모습이 연상되는가. 내가 막상 나에게 주어진 치열한 삶을 살다보니 저는 결국 선데이 크리스천의 모습으로 변화 되었다”고 했다.

이어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일상생활에서 진정한 예배자로 살아갈 수 있는가”라며 “저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님께서 이혼을 하셨다. 그래서 아버지를 따라 동생들과 함께 작은 아버지와 어머님 댁에서 살게 되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는 새로운 분과 결혼을 하셨고, 저에게는 새어머니가 생기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새어머니는 오셔서 저와 저의 동생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바로 ‘성경’이었다”며 “내가 좋은 엄마를 만나서 이렇게 좋은 말씀도 듣고, 하나님도 알아가게 되어 너무도 좋았다. 그런데 새어머니도 본인의 인생이 힘드셨던 것 같다. 사실 힘드셨다는 것은 제가 성인이 되어서 이해를 할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윤 대표는 “(새어머니는)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저와 동생을 학대하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 되어서부터였던 것 같다. 학대하는 정도가 우리가 혹여 생각하듯 매를 들고 혼을 내는 것이 아니라, 매가 부러져야 끝이 나는, 그날에 시작과 끝은 매가 산산조각이 나야 끝이 나는 그런 상황이었다. 어떨 땐 어린 나이에 알루미늄인 줄 모르고, 쇠로 된 몽둥이인 줄 알고, 동생과 벌벌 떨면서 보았던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어 “요즘 학대 소식을 듣게 되면 남 일 같지가 않다. 저는 물에 대한 깊은 트라우마가 있는데 지금도 바닷가에 가면 깊은 곳에 들어갈 수가 없다. 숨이 가빠오고, 힘들다”며 “제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물이 담긴 욕조에 내 얼굴이 들어갔다 나왔다했던 경험이 기억에 남아있다. 그 외에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하루는 친어머니께서 저를 찾아와 오랜만에 재회를 해서 떡볶이를 먹었다. 그 모습을 동네아주머니가 보시게 되면서 새어머니도 아시게 되었고, 그날 캄캄한 방 안에 갇혀 나가지도 못하고, 밥도 못 먹고 벌을 받아야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이러한 어린시절을 보낸 저에게 가장 힘이 되신 분이 계셨다.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저에게 피할 길을 주셨던 것 같다. 그게 바로 교회 사모님이셨다”며 “사모님은 제가 엄마에게 혼이 나서 교회로 오면 반겨 주셨다. 밥도 챙겨주시고 안아주시고, 보듬어 주셨다. 저는 그때부터 꿈이 나처럼 힘들어하는 아이들을 안아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훌륭한 사모가 되는 것이었다”고 했다.

이어 “그렇게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면서 제 안에 상처 유발자로 제 마음엔 새어머니가 계셨다. 주변엔 ‘신고했었어야지’라고 말하지만, 저는 어머니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나에게 생긴 너무도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라며 “내가 이 분을 신고해서 떨어지는 걸 상상할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어머니가 ‘도저히 살 수가 없다’며 집을 나가시려고 했던 적이 있는데, 어린 제가 뛰어 나가서 바지 가랑이를 붙잡고 ‘절대 나를 버리지 말라’고 울었던 기억이 있다. 그 만큼 어머니는 내게 커다란 존재였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윤 대표는 “중·고등학교 시절을 보내며 사모님이 되겠다는 그 꿈을 이루기 위해 대학을 신학교로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내 꿈을 물으셨는데 ‘사모님이 되겠다’는 나의 말을 들으시고, 집 주변에 있는 작은 개척교회를 방문하신 적이 있다”며 “개척교회 상황을 보신 아버지는 내가 신학교를 가는 것을 반대하셨다.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이 꿈 하나만은 포기할 수 없었다. 끝까지 고집했고, 아버지는 ‘꼭 신학교에 가려거든 입학금과 등록금을 다 해결할 수 있으면 가라’고 하셨다”고 했다.

이어 “제가 다니던 교회는 교인 수 전체 15명밖에 되지 않는 구세군 교회였다. 거기에 찬양 가수 한 분이 찾아와 집회를 열었는데, 앞에서 찬양을 인도할 사람이 필요했지만 할 사람이 없어 제가 교복을 입고 찬양하게 되었다. 나름 열심히 했다”며 “며칠 후 그분에게 연락이 왔다. 저에게 음반을 한 번 내보지 않겠냐고 권유했다. 그 때가 97년으로, 찬양 1집 ‘친구여 들어 보았나요’라는 제목의 음반을 냈다. 그렇게 집회를 다니며 사례비를 받게 되어 열심히 모았고, 98년도에 성결대 신학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1~2학년은 잘 보냈지만 일을 하지 않았던 터라 수중에 돈이 금방 떨어져 일을 다시 해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학교 앞 복사집에서 오후 5시까지 일을 하고, 이후 어머니의 호프집 셔터문을 열었고, 새벽 2시까지 어머니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며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장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 그때이다. 왜냐하면 술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오백만 원을 모으게 되어 복학을 준비 중이었는데, 아버지의 차를 사야한다는 어머니의 말씀에 복학을 포기하고 모았던 돈을 드렸다”며 “저는 지금도 성결대 98학번 중퇴자로 최종학력은 남아있다. 그런데 우리에게 스펙(Spec)이란 얼마나 중요한가. 세상이 정한 스펙은 정해져 있고 분명하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스펙은 차원이 다르다”고 했다.

이어 “어머니의 그늘을 벗어나 번듯한 직장을 다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역 신문을 가져와서 보게 되었지만, 마땅히 저의 수준에서 갈 수 있는 곳이 없었다. 그러다 어떤 교회에서 선교원을 뽑는다는 광고를 보게 되어 지원을 하게 되었다”며 “그런데 ‘유아교육 자격증 소지자’라는 문구를 눈여겨보지 않았다. 만약 유아교육 자격증 소지자이만 불편, 불친절한 사람과 자격증은 없지만 열정이 있고, 친절한 사람이라면 누구를 선택하겠는가”라고 했다.

그러면서 “저는 후자라고 생각했고 후자가 되기 위해 노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3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며 “지금은 ‘윤선디자인’이라는 기업을 운영 중이다. 사원을 뽑을 때 스펙엔 눈길이 가지 않는다. 유일하게 스펙을 본다면 어떤 곳에 오랫동안 근무를 했는가이다. 그리고 자기소개서에서 얼마나 열정이 있고, 자신에 대해 소개할 수 있는지, 밝은 사람인지 그 부분을 본다”고 했다.

윤 대표는 “선교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온누리교회 파워스테이션’이라는 곳에서 찬양팀을 했다. 교회는 구세군교회였지만, 초교파적으로 찬양팀을 모집하고 있어 싱어로 섬기게 되었다”며 “거기서 목사님이 파워웨이브 간사로 부름이 있었다. 그래서 선교원 아이들과 이별을 하고, 온누리교회 간사직을 맡게 되었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 2시 예배 싱어로만 17년을 섬기게 되었다. 오래 섬겼지만, 예배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예배자 매너리즘에 빠졌던 것 같다. 그러던 중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1년 반 연애 끝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로부터 보호해 줄 벽이 생긴 것 같았다”며 “남편은 작곡가라 새벽에 일을 많이 했다. 두통이 심해 타이레놀을 달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님이 몸이 편찮으셔서 병원에 갔다가 남편도 같이 검사를 받게 되었는데, 그 결과 뇌종양으로 밝혀졌다”고 했다.

이어 “남편은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받았다. 남편이 먹고 싶다던 포도를 사러 갔지만, 소매치기를 당해 지갑을 잃어 버렸다고. 설상가상으로 집엔 도둑이 들어 엉망진창이었다”며 “경찰을 부르고 그날 너무 무서운 나머지 시아버님이 안방에서 주무시고, 큰 아이를 재우는데, 참아왔던 눈물을 쏟아져 나왔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날 엄청난 터닝 포인트가 찾아왔다. 이전에 가졌던 예배자의 매너리즘으로부터 빠져 나오게 되었다”며 “남편과 병동에서 재회를 하고, 잠깐 어린이 병동에 앉아 있었는데, 아이 엄마다 보니 아픈 아이를 데리고 병원에 있는 부모님들을 보게 되면서 제 아이의 건강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잠깐이지만 감사 기도를 드렸다. 그 찰나의 기억이 스쳐 지나갔다. 모든 순간에 대한 감사를 하게 되었다. 제 입술을 통해 작은 감사를 시작으로, 원초적인 것까지 감사를 하고 있었다”고 했다.

윤 대표는 “청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것들, 보이는데 보이지 않았던 것들, 원초적인 것들이 과연 여러분들의 공로로 인해 주어진 것인가”라며 “저는 그날 알았다. 저에게 값없이 주어진, 정말로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어주신 ‘은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은혜로부터 원초적인 것에 대한 감사가 흘러나오는데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나오기 시작하면서 제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뒤바뀌어 버리는 역사가 제 삶에 일어났다”고 했다.

이어 “제가 생각하는 예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며 “하나님께서 내 삶을 통해 예배를 받으실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은 나에게 주어진 삶을 내가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고, 최선을 다해 이 삶에서 내가 감사하면서 열심을 다해 살아가는 것 또한 내가 이 삶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덧붙였다.

더불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통해 누군가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더할 나위없는 것”이라며 “나를 통해 선한 영향력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했다.

윤 대표는 “남편은 1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해야 했기에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오전에는 아이를 보고, 남편 간호를 하고, 새벽에 하는 일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며 “새벽에 할 수 있는 일은 컴퓨터로 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디자인을 시작했다. 예전에 사모님이 되기 위해 디자인 학원을 7개월 정도 다녔는데 일러스트를 접할 무렵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계속해서 다니진 못했다. 한 지인이 맡긴 디자인 일을 인터넷을 통해 간신히 할 정도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재미가 붙었다”고 했다.

이어 “우선 문제는 내가 나를 먼저 디자이너로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었다. 여러분들은 나 자신을 인정하는가. 자기 자신에 너무 심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아닌가”라며 “이 시간을 더불어 조금이나마 그 잣대를 풀기를 바란다. 나만큼은 자신을 인정해줘야 상대방도 인정해줄 수 있다. 그래서 저는 제 명암을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알리기 시작했다. 그러니 일이 조금씩 들어오기 시작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저는 청년들에게 ‘선택하기 이전에 두려운 마음을 가지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며 “저는 어머니를 선택했고, 그 당시 제 동생은 어머니를 선택하지 않고 집을 나갔다. 몇 년 전 저희 어머니가 가족들 앞에서 눈물의 용서를 구했다. 나 또한 힘든 일을 겪지 않아도 되었었다. 그러나 저는 어머니와 가정의 끈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후 제가 일로 인해 서울로 올라가야 할 때, 제 동생이 집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모두가 똑같이 어머니와 사이좋게 지낸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아름답게 바꾸어 놓으셨다”고 고백했다.

아울러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늘 선택을 해야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며 “사무엘의 꿈처럼 하나님이 저에게 직접 길을 말씀해 주신 적은 없었다. 제가 경험한 하나님은 내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내가 하나님과의 일대일 관계가 아름답게 잘 되어 있을 때는 하나님은 여러분의 삶을 선한 방법으로 인도하신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

#정윤선디자이너 #복음한국랜선청년캠프 #간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