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종
영화 <랑종> 포스터 ©제작 (주)노던크로스, GDH, 배급 (주)쇼박스

SYNOPSIS

태국의 한적한 시골 마을. 이곳에서 대를 이어 토속 신 ‘바얀’을 모시는 ‘랑종’(무당을 가리키는 태국어) 가문에 괴이한 일들이 벌어집니다. 평범한 20대 여성이었던 ‘밍’이 무엇에 홀린 듯 흉측한 기행을 일삼기 시작한 것이죠. 과거에 신내림을 받아 바얀 신을 모시며 살아온 무당 ‘님’은 조카 밍이 악령에 빙의되었음을 직감하고 가족들과 힘을 합쳐 퇴마 의식을 거행하려 합니다. 마침 대를 이은 신내림을 소재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자 이들과 동행하던 취재팀까지 이 일에 가세하게 되지요. 하지만 퇴마 의식은 실패로 돌아가고, 악령이 깃든 밍은 마치 지나간 과거사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가족들과 촬영팀을 상대로 대학살극을 펼칩니다.

무지, 그리고 무력한 인간

영화 속 등장인물들은 한없이 무력합니다. 주인공 밍은 젊고 아름답지만 악령에 빙의되자 기괴한 일들을 저지르는데요. 성적 일탈을 비롯해 폭력적이고 흉악하며 불쾌한 행위들을 자행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조종하는 압도적인 힘에 저항하지 못함은 물론 왜 자신이 악령에게 선택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하지요. 그녀의 가족들이야 과거에 저지른 악행 때문에 원혼들로부터 징벌을 받는다 치더라도 밍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죄가 없어 보임에도 악령에게 빙의가 된 피해자인 셈인데요. 영화는 그 이유를 명확하게 말해주지 않습니다. ‘님’은 가문의 대표격으로 신내림을 받아 한평생 그 신을 섬긴 베테랑 무당이지만 정작 자기 가문에 들이닥친 불행을 수습해내지 못합니다. 사건을 해결할 것처럼 보였던 그녀는 퇴마 의식을 앞두고 돌연사할 정도로 무력할 뿐이지요. 심지어 다큐멘터리 촬영팀은 이 가문과는 무관한 이들인데도 밍이 흑화(악한 캐릭터로 변모함을 가리키는 신조어)되자 딱히 영문도 알지 못한 채 참혹하게 살해되어 버립니다.

이렇듯 영화는 불가항력적 운명 앞에 놓인 인간의 무기력함을 공포 영화의 장르적 문법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느끼는 공포의 근원이란 ‘무지’로부터 비롯됨을 감안할 때 밍에게 들어간 악령의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 왜 하필 그녀인지 알려주지 않는 이 영화의 전개방식은 공포를 유발하는 영화적 기법인 동시에, 인간에게 거부할 수 없는 가혹한 운명을 부여하는 절대자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끔 합니다. 그런 점에서 영화 <랑종>은 한바탕 살육의 스펙터클을 펼치는 오락영화이지만 한편으로는 신에 관한 기독교적인 고찰을 불러일으키는 영화이기도 합니다.

신은 대체 무얼 하는가

밍의 기행을 목도하고 불길함을 예감한 님은 자신이 모시는 바얀 신의 도움을 구합니다. 하지만 바얀은 일평생 자신을 섬겨 온 무당 님에게 침묵으로 일관하지요. 악령은 활개 치고 있는데 자신이 모시는 신은 묵묵부답일 뿐이니 님으로서는 바얀 신의 존재 자체를 의심할 수밖에 없을 겁니다. 님과 가족들이 벌이려는 퇴마 의식도 따지고 보면 밍에게 깃든 악령을 속이려는 속임수였는데요. 유치한 것 같지만 자신들이 선한 신이라고 믿고 추종하던 바얀이 침묵함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이었을 겁니다.

밍이 저지르는 대학살은 설령 당사자들이 과거에 저지른 악행의 업보를 치르는 것이라 할지라도 과도해 보이는데요. 바얀은 마을의 수호신이면서도 이 일에 전혀 개입하지 않습니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바얀 신은 아무 것도 하지 않지요. 심지어 영화 후반부에서는 누군가에 의해 석상의 머리가 잘려버릴 정도로 무력하고 무능합니다. 반면에 악령은 과시하듯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살육, 식인, 불결, 성적 방종 등은 인간의 생득적 윤리관념으로 직관할 수 있는 악함의 증표이지 않습니까.

이렇듯 영화 속 신은 인간 세계에서 벌어지는 악함과 불의함, 그로 인해 인간이 겪게 되는 고통 등에 대해 무책임할 정도로 방관적입니다. 존재감 자체가 거의 없을 정도이지요. 이 대목은 자연스레 기독교가 마주해야 할 질문과 연결됩니다. 그 질문이란 ‘악한 세상에서 신은 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라는 것과 ‘그런 신에 관한 믿음이 온당한가?’일 것입니다.

랑종
영화 <랑종> 스틸 이미지

‘믿음’에 관한 기독교의 답변

영화 말미에서 님은 애당초 본인에게 바얀 신이 들어왔는지조차도 모르겠다고 말하는데요. 평생을 무당으로 살아왔으면서 사실은 신을 경험하지 못했다는 허망한 고백한 셈이지요. 이는 곧 믿음에 관한 본질적 질문을 유발합니다. ‘인간의 믿음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것이죠. 이 영화의 전작이라고 할 수도 있을 <곡성>(2016)에 이어, 다시 한번 관객에게 ‘믿음인지 현혹된 것인지 자문해 보라’고 묻는 듯한 영화의 태도 앞에 기독교의 답변은 분명합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믿음은 ‘보이지는 않지만 그것이 사실임을 아는 것’입니다(히브리서 11:1). 그래서 바울 사도는 기독교인이란 ‘보이는 것을 바라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자’라고 역설했지요(고린도후서 4:18). 믿음이란 자기기만 또는 허위의식이 아니라 ‘진리의 편에 굳건히 서는’ 인간의 자발적 의지로부터 비롯되는 것입니다.

영화는 가문에 임한 저주를 상징하는 인형을 보여줌으로써 마무리되는데요. 이는 영화 전반에 걸친 음습한 분위기와 맞물려 ‘이것이 너희 인생이다!’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운명처럼 주어진 저주 앞에서 인생들이란 아무리 발버둥 쳐 봐야 벗어날 수 없는 무력한 존재에 불과하다는 것이죠. 이는 무지와 무력이라는 실존적 한계에 갇힌 인간을 마치 관음하듯 그려내는 것이 영화의 목표임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욥기 34:10-12). 인간에게 운명의 굴레를 씌워 놓고 이를 지켜보며 재미 있어 하시는 악취미를 지닌 분이 결코 아니지요. 비록 우리 인간들로서는 인생사에서 일어나는 일들의 인과관계나 그 결과를 쉽사리 알 수 없지만, 인간의 미래는 선하신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열어나가야 할 유동적인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괴팍한 결정이 각 사람의 운명을 완고하게 막아서고 있지 않음을 여러 곳에서 진술하고 있습니다(예레미야 18:7-10).

선정적인 묘사와 엽기적인 표현은 자극에 그칠 뿐, 영화의 주제를 탄탄하게 뒷받침하지 못하며 대중예술로서의 완성도 또한 높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이 영화는 수작으로 꼽히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별개로 영화 <랑종>이 신에 대해, 믿음에 대해 던지는 질문들은 오히려 이 영화가 매우 종교적인 성격의 것이라고 넌지시 말해주고 있습니다.

노재원 목사는 현재 <사랑하는 우리교회>(예장 합동)에서 청년 및 청소년 사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유튜브 채널 <아는 만큼 보이는 성경>을 통해 기독교와 대중문화에 대한 사유를 대중과 공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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