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창세기 10:22)

할례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과 이스탄불의 성 소피아(콘스탄티노플)의 삽화가있는 유대인 가족의 할례 장면. R. Smith의 판화. ©위키피디아

얼마 전 우리 대한민국 정부는 면적이 겨우 경상북도만한 작은 나라 이스라엘로부터 여분의 백신을 공급받았다. 말이 경상북도보다 조금 큰 크기이지 이스라엘 국토의 절반은 사막형 지역이다. 참 창피하기는 하나 온 세계가 백신확보에 전력을 다하는 상황에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코로나19와 관련하여 일사 분란하게 백신 확보에 성공한 이스라엘을 보며 세계가 다시금 그 정보력과 추진력을 주목하고 있다. 코로나19 시대에도 이렇게 이스라엘은 여전히 주목받는 국가요 민족이다. 무엇이 이들 유대인들을 그렇게 특별한 존재로 만든 것일까?

구제를 부끄럽게 여기는 한국인, 구제 받기에 당당한 유대인

우리나라 사람들은 공개적으로 남에게 도움 받는 것을 대단히 부끄럽게 여긴다. 그만 그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부잣집 아이들에게도 가난한 집 아이들과 동등하게 공짜로 학교 급식을 먹게 만들어버렸다. 참 미련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다. 겨우 가난한 집 아이들이 받을 자존심의 상처 때문에? 그럴 바에야 급식비를 동등하게 거둔 다음 가난한 집 아이들 통장에 급식비보다 더 많은 돈을 슬며시 입금시켜 주면 될 일을 가지고 말이다. 부잣집 부모들만 만세 부르게 되어버렸다. 마찬가지로 전국민 재난 지원금 지원도 한국인들의 좀스러운 수준을 보여준다.

필자가 어릴적 미국에서 원조한 밀가루와 옥수수 가루를 가지고 가난한 집 아이들만 옥수수죽과 빵을 급식하였는데 그것을 먹으며 무슨 문제가 되거나 자존심 상한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옥수수죽 정말 맛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 아이들은 아마 대부분 먹지 않을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과거 최고급 빵이었던 단팥빵조차 맛 없다고 잘 안 먹으니까(우리 집 입맛 까다로운 막내 아들의 어릴 적 이야기다).

무상 급식하는 그 돈이면 8만명의 새로운 선생님 채용이 가능하다던데 선생님 되고 싶어 줄을 서서 기다리는 안타까운 사범계 학생들과 그 부모님들 마음은 어떨까? 그리고 채식주의자들이 증가하는 요즘 이 아이들의 급식은 어찌할 것인가? 이것이 우리 국민들의 수준이다.

구제를 당당하게 여기는 유대인

이스라엘의 광야
이스라엘의 광야 ©by E. S. Cho

그런데 여기 우리 민족과는 정반대로 구제 받는 것 자체를 아주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민족이 있다. 바로 유대인 이야기다.

기독교인이 많은 우리들보다 더 성경적(구약성경적)으로 사는 민족말이다. 유대인들은 구제금을 내는 사람보다 구제금을 걷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긴다. 또한 구제금을 걷는 사람보다 구제 받는 사람들이 더 떳떳하다. 왜 일까? 구제를 해야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는데 구제 받을 사람이 없으면 구제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구제 받는 나 때문에 하나님께 복 받는 줄 알아라!' 바로 이런 의미다. 구제하여 하나님께 복 받고 싶은 자들이 많으니 당연히 유대인들의 구제 기금은 언제나 넘쳐난다(레 19: 10; 신 14: 28; 마 6:2-4; 고후 9:7; 행 24:17; 행 10:12). 유대인들이 구호 기금이 많으니 당연히 암 연구, 기아 구조 운동, 환경 운동, 약자 보호(여성, 소비자, 고아) 등에 강하고 구제 기금이 충분하여 공부하고 싶으면 마음껏 공부하고 연구할 수 있으니 당연히 노벨상 수상자도 많아지고 부자들도 많은 것이다. 필자 딸의 절친 안나가 이스라엘 여행을 연수를 통해 공짜로 즐길 수 있었던 것도 키부츠 출신 필자 딸의 조언 덕분이었다.

(노벨 과학상 수상자 한명 없으면서 아이큐 높은 민족이라) 잘난척하는 한국인 vs 정말 잘난 유대인

이스라엘의 초기 지파들 분포도
이스라엘의 초기 지파들 분포도 ©위키피디아

요즘 우리가 컴퓨터에서 늘 사용하는 USB도 바로 이스라엘 사람 작품인 것 아는가? 이스라엘 장교 출신으로 USB 메모리를 창안하여 ‘모두’(Modu)를 설립한 도브 모란(Dov Moran) 사장은 유에스비 특허와 주식을 팔아 자기 벤처회사 모든 직원들을 갑부로 만들어 주었다. 함께 고생한 직원들을 구제한 것이다.

이스라엘은 인구도 많지 않다. 하지만 대략 노벨상 수상자들의 3분지 1이 유대계이다. 노벨 평화상을 제외해도 총 150명이 훨씬 넘는다(생리 의학 48명, 물리학 44명, 화학상 28명, 경제학상 20명, 문학상 12명- 2007년 통계- 명확히 확인된 숫자만 이정도이므로 이보다 더 늘어날 수 있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유대인보다 인구가 훨씬 많으면서도 여태껏 노벨 과학상, 문학상 한명 배출하지 못한 우리 민족을 부끄럽게 한다. '우리 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머리 좋은 민족'이라고 늘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있던데 참 한심하다. 유대인들을 보면 정말 우리나라 교육이 부끄럽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강남 교육으로 대별되는 주입식 점수병, 일류병, 줄세우기 교육이 치유되지 않고서는 요원한 일이다.

무엇을 배웠느냐고 묻는 한국 엄마들, 무엇을 질문했냐고 묻는 유대인 엄마들

한국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늘 학교서 몇점 맞았고 무얼 배웠느냐고 묻는다. 유대인 엄마들은 선생님께 무엇을 질문(ask why?)했냐고 묻는다. 세상에 바보 같은 질문이란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남보다 잘하는 아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잘 활용하는 이 세상 단 하나뿐인 남과 다른 특별한 아이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도대체 이들 이스라엘은 어디서 온 것일까?

아르박삿 후손들의 정착지

하비루의 왕
1930-40년대에 영국 고고학자 Leonard Woolley가 Alalakh(현재의 터키)에서 발굴한 Statue of Idrimi "하비루의 왕", c. 1460–1400 BC ©British Museum.

이스라엘의 조상을 추적해보면 성경의 아르박삿으로 수렴된다. 셈은 홍수 후 2년 아르박삿(Arphaxad)을 낳았다. 아르박삿은 셈의 다섯 아들 가운데 엘람과 앗수르에 이어 세 번째로 기록된 이름이다.

다른 계보와 달리 셈과 그 아들 아르박삿에서 아브라함으로 이어지는 이스라엘 민족의 족보에는 다행스럽게도 그 조상들의 생존 연대가 기록되어 있다.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고 그 후에도 403년을 더 살아 총 438년을 살았다. 셀라는 에벨을 낳았고 에벨은 벨렉과 욕단이라는 두 아들을 낳았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아르박삿은 438년을 살면서 셀라 말고도 당연히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이다(창 11:13).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은 그 구체적 계보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성경의 족보는 이제 주로 셈의 후손 아브라함을 향한다. 즉 셈의 후손 가운데 아르박삿이 아브라함의 조상이 되었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 인류에게 알려주는 정보다.

하지만 오늘날 이스라엘사람들을 부르는 히브리인(‘이주자’, ‘건너온 사람’)이라는 이름은 과거에는 좀 더 광범위한 영역을 지칭했던 듯하다. 이스라엘이 히브리 족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은 아르박삿의 후손 에벨의 이름으로부터 기원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참조, 창 14:13). 그렇다면 고대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의 출발은 단순히 아브라함 후손만이 아니라 고대 중동에서 보다 더 광범위한 족속을 일컫는 말이었음이 분명하다.

주전 18세기의 유물로 알려진 1933년 패롯(Parrot)에 의해 텔-하리리(Tell-Harriri)에서 발견된 소위 마리(Mari) 토판에는 하비루족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하비루는 칼데아(Chaldeans) 사람들의 조상이었다.

누지 토판(Nuzi tablets)
누지 토판(Nuzi tablets) ©Center for online judaic studies

이것은 주전 15세기 중엽 시대의 기록인 누지 토판 (Nuzi tablets)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누지는 니느웨 남동쪽으로 이 토판에는 칼데아의 창시자를 아립-허라(Arip-hurra)라고 표현하고 있다. ‘히브리’라는 명칭은 바로 여기로부터 왔음이 분명하다.

즉 유대인들의 또 다른 별칭이 되어 있는 히브리인이라는 이름은 이렇게 아브라함 이전부터 광범위한 지역에 살던 아브라함의 선조인 에벨의 후손들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 후손들 가운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이 번성하면서 히브리인이라는 명칭은 이스라엘 후손들을 가리키게 되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선조 아르박삿의 후손들은 주로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물줄기를 중심으로 비옥한 초승달 지역에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살았다고 볼 수 있겠다.

아르박삿 후손 셀라와 가이난의 미스터리

비옥한 초승달 지역
비옥한 초승달 지역 ©위키피디아

아르박삿은 35세에 셀라를 낳았다(창 10: 24; 11:12; 대상 1:18; 24). 그런데 누가복음에는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Cainan)이 등장한다(눅 3:35-36). 아르박삿이 35세에 셀라를 낳기 전 가이난을 낳았던 것은 분명하다. 앞에서도 설명했듯 아르박삿은 많은 자녀를 낳았을 것이다(창 11:13). 그럼 이 가이난은 누구일까?

누가복음의 계보대로 가이난은 셀라의 부모란 말인가? 성 어거스틴은 <신국론>(DE CIVITATE DEI)에서 불가타 즉 칠십인역의 라틴어역본을 인용한다. 불가타 성경을 따를 경우 아르박삿이 셀라를 낳은 게 아니라 아르박삿은 135세에 가이난을 낳았으며 가이난은 130세에 셀라를 낳았다.

셀라-에벨-벨렉-르우-나홀로 이어지는 출생 연대도 맛소라 사본과 칠십인역은 전혀 다르다. 불가타 성경을 따를 경우 홍수로부터 아브라함까지는 1070년이 된다. 히브리 사본으로는 그 연대가 훨씬 단축된다. 이 골치 아픈 논란을 수습하기 위해 일부 학자들은 누가복음 기록(눅 3:36)의 실수 설을 주장한다(창조과학자 헨리 모리스 등). 하지만 이 같은 주장은 정확무오한 성경을 믿는 보수 신앙을 훼손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이다. 성경의 난제가 어디 한두 군데뿐이던가? 그것을 모두 성경 필사자의 실수라는 식으로 몰아가다 보면 그것은 성경이 아니다. 성경의 내용을 무조건 문자적으로 믿는 것도 위험하지만 반대로 해석이 곤란하다고 함부로 필사자 실수로 몰고 가는 것은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난해한 구절은 난해한 상태로 수용해야 한다. 하나님은 적합한 때에 탁월한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그 난해한 구절에 빛을 비추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바른 태도다.

누가복음의 예수님 족보에 가이난이 왜 삽입된 것인지 아직까지 이 문제를 정확하게 풀 수 있는 성경의 결정적 실마리는 없다. 하지만 무조건 필사자의 실수라고 단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 어찌 필사자가 사람 족보의 인물을 아무 이유 없이 무심코 삽입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일은 평범한 우리 민족의 족보에서 조차 결코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위경(Pseudephigrapha) 요벨서 8장에는 가이난이 아르박삿의 아들로 도시로 나가 점성술사의 가르침을 받고 일월성신의 징조로 점을 쳐 범죄한 자가 되었다고 했다. 위경의 내용을 사실로 수용할 수는 없으나 가이난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나 장자권을 상실했음은 분명하다. 즉 가이난은 분명 셈의 계보에 있던 인물이었고 무슨 이유인지 구체적으로는 모르나 그가 영적, 육적 이유로 장자권을 상실하였다고 보는 것이 바른 해석이라 본다.

이 미스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해석학의 중요성을 암시하고 있다.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사사로이 풀 수 있는 책이 전혀 아니다. 기도하면 모든 것이 그저 술술 풀린다는 단세포적 생각과 미혹이 얼마나 많은 이단과 사이비들을 만들어 왔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공중의 권세 잡은 자가 있는 죄악 된 세상에서 인간이 성령의 생각을 바르고 깊게 아는 일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은혜의 통로가 필요하다.

때로는 신앙의 선배들이 노고로 이룬 해석과 열매들을 참고하는 데 그치지 않고 더 깊은 통찰과 기도와 연구 아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할 때도 있다.

하나님은 가이난의 삽입을 통해 성경이 단순한 책이 아님을 보여준다. 성경은 최고의 성경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이 평생을 파내도 마르지 않는 샘처럼 신비한 영성이 늘 넘쳐난다. 역사 속 신앙의 대선배들의 해석을 존중하고 살펴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 수 있는 이유다. <계속>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 평택대 <신앙과 과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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