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94회 학술발표회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94회 학술발표회가 온라인 줌으로 진행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줌 영상 캡처

한국기독교역사학회(이재근 회장)가 5일 오후 2시 제394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을 통해 개최했다. 이날 김은정 연구원(연세대 국학연구원 연세학연구소)이 ‘근대전환기 주변적 여성의 ‘성장’에 있어서 기독교의 ‘역할’; 신마리아(1873~1921)의 생애를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김 연구원은 “신마리아는 고종의 친정이 시작된 1873년에 태어나서 일제의 문화정치 하에서 신여성의 시대가 본격화된 1921년에 세상을 떠난 초기 개신교 여성의 이름”이라며 “그의 어릴 적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세례명은 김마리아, 결혼 후에는 남편의 성을 따라 신마리아라고 했다”고 했다.

이어 “그는 조선의 개항기, 대한제국기와 일제의 식민화 과정 등 우리나라 근대사 격동의 시기를 살았고, 이름에 나타나듯이 서양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다”며 “신마리아는 현재 정신여자중학교 건물이 그의 이름을 따서 ‘신마리아관’이라고 부르는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정신여학교의 처음 기초를 다지고 초기 역사를 함께 한 교사였다. 그런데 그들이 보지 못한 젊은 신마리아를 헤론 부인(Harriet G. Heron)은 ‘작은 신 부인,’ 기포드 부인(Mary H. Gifford)은 ‘관우물골 전도 부인,’ 수잔 도티(Susan Doty)는 ‘서울 여학교의 신 부인’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고 덧붙였다.

또한 “미국 북장로회의 여성사업 개척자로 1885년부터 1892년까지 서울에 머무른 헤론 부인부터 신마리아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는 초기 여성교인이었다”며 “그리고 호칭의 변화에 드러나듯이 선교사의 고용인에서 전도부인과 교사로, 나중에는 교회 지도자로 성장했다”고 했다.

그는 “신마리아가 살았던 시대는 정치·문화·사회적으로 격변기였다. 조선이 근대 자본주의적 세계화 질서에 편입되고 봉건적 질서가 해체되면서 화폐자본이 점차 전통적 상거래 방식을 잠식해 가고, 하룻밤 사이에 세도가가 몰락하고 새로운 권세자가 나타나는가 하면, 기계의 도입과 산업의 변화에 따라 유망한 직종도 변화했다”며 “무엇보다 박영효가 올린 개화상소(1888)를 비롯해서 과부의 재가, 축첩폐지, 여성교육 등 여권에 관한 논의도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기층민 사이에서는 천주교와 동학을 통해 여성관이 변화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1890년대 후반 독립협회운동이 일어나자 본격적으로 사회라는 공론장이 발달하고, 여성도 거리시위에 모습을 나타내고 통문을 발표하면서 근대적 여성의 출현이 예고되었다”며 “각양각색의 인간들이 누비고 돌아다닌 서울 한복판에서 그들과 같은 거리를 걸었던 신마리아는 조선 남성이나 서구인, 또는 북촌 양반 부인들에 비하면 주변적 인물이었다. 신마리아를 가까이 두었던 여선교사들조차 처음에는 그를 주목하지 않았다. 신마리아는 명색만 남은 가난한 양반 출신으로, 보통의 조선 여성들처럼 제대로 된 교육에서 소외된 채 어린 나이에 결혼을 했다. 나머지 생은 출산과 육아, 쉼 없는 노동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일생을 따라가다 보면 그와 비슷하면서 또 다른 주변부 인물들이 등장한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한국 기독교사에 족적을 남긴 세 자매 중에서 신마리아의 이력은 동시대나 현재의 통념에 비추어볼 때 특이하다”며 “그는 남편과 자녀, 시모, 친정까지 책임지는 동시에 사회활동을 했다는 점에서 동생들과 구별된다. 또한 그의 마지막 경력은 정신여중학교 교감이었는데 그가 거친 여러 종류의 직업과 활동의 이력은 우리나라 근대 여성의 출현과 지도력 형성에 기독교가 미친 영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고 했다.

김 연구원은 “평범한 소녀였던 마리아는 서양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인 후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동시대 여성들이 겪는 고통과 어려움을 극복하고, 기독교를 통해 다른 여성의 성장을 돕는 교사와 지도자가 되었다”며 “그는 미국 북장로회의 선교기관 중 하나인 서울 여학교, 즉 정신여학교의 역사를 30여 년간 함께 하면서 자주 교체되는 외국인 교장을 도와 교풍을 이어가고 학생들의 교내생활에 안정감을 제공했다.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조선 여자교육계의 은인’이라고 기렸듯이, 그에게서 성경을 배우고 생활지도를 받은 제자들은 1920년대 여성계의 지도자들이 되었다”고 했다.

이어 “19세기 우리나라에 들어온 개신교, 특히 장로교는 여성을 그 위계질서의 하위에 두고 고정된 성역할을 부여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른바 빅토리아적 성별 위계와 가정 이데올로기는 장로교 여성사업의 기조를 받치고 있었다”며 “신마리아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난 후 권위를 이해하는 방식에 급진적 변화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는 학교생활에서 상급자에 대한 순종, 규칙에 대한 순종,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강조했다. 그러나 하나님을 최고의 권위에 둔다는 점에서 신분제와 내외법과 같은 조선의 관습을 상대화하고 선교사가 가져온 문화를 이용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기독교는 신마리아가 여성 지도자로 성장하는 데 성경과 실생활에서 찾은 모델 기독교인, 실천을 추동할 교리와 신학, 대안적 행동방식과 문화, 사회적 관계의 역동성 등의 자원을 제공했다”며 “초기 한국 개신교 공동체 안에 편만했던 신분과 계급, 인종, 성, 장애나 질병의 유무와 관계없이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신앙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형제와 자매로 만들었다”고 했다.

또한 “선교활동은 왕실과 권문세가, 양반가 등 상류층과의 교우와 협력을 중요시하면서도 무당과 판수, 백정, 갖바치 같은 사회적으로 천시 받는 하층민과 전염병으로 버림받은 사람들까지 포용했다”며 “초기 개신교회가 조직의 성장과 유지에 이들을 이용한 것이 아니라 본래의 인간다움과 존엄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성장을 추구하는 교회들에 주는 시사점은 적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한편, 성장은 육체적, 외형적 크기뿐 아니라 심리적, 지적, 도덕적 발달, 종교적 차원에서는 영적 성숙 그리고 구원과 성화, 완덕이라고도 하는 발달을 포함한다”며 “신마리아는 이러한 인간의 성장을 이해하는 교육자였고, 어머니마다 자녀를 성장하게 만들 권세가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어머니들이 기독교 안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여성사업을 병행했다”고 했다.

이어 “근대는 여성이 삶에 대한 통제권과 자기결정권을 어느 정도 획득하게 된 시대였다. 이러한 여성 주체의 발아기에 기독교는 여성에게 교육의 혜택, 사회적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 근대적 직업의 기회와 경제적 독립을 제공했기 때문에 여성에게 ‘해방과 자유’의 종교로 각인되었다”며 “초기 개신교 선교와 그 교육적 영향을 받은 여성들은 평등과 사랑의 기독교, 배움의 원천인 기독교를 받아들여 자기성장을 이루어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신마리아의 실천과 사회적 지위의 변화는 기독교적 정체성 없이는 설명하기 어렵다”며 “그는 여성의 인권과 교육권을 강조하는 개신교 선교사들을 만나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고 꽃피울 수 있었다. 하지만 지식과 교육의 필요는 여성의 모성적 역할 때문에 강조되었을 뿐, 교육받은 여성은 이기적이라는 편견이 암암리에 스며들어 있었다. 신마리아는 교회와 학교라는 더 큰 공동체의 유익을 명분으로 여성의 영역으로 경계된 가정 밖으로 나왔고, 자신에게 닥친 어려움을 해결하는 하나의 출구로서 지식을 추구했으며, 자신만의 고유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고 했다.

아울러 “그가 기독교적 훈련을 통해 습득한 지식은 예측 불가능한 삶에서도 무너지지 않고 버티는 힘을 주었고, 신마리아는 서울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살면서도 넓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주시하며 중심과 주변이 역전되는 신앙의 진리를 살아내고 전파했다”고 했다.

김은정 연구원
김은정 연구원이 한국기독교역사학회 학술발표회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줌 영상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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