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훈 교수
박창훈 교수가 제25회 영익기념강좌에서 발표를 하고 있다.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영상 캡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박명수 소장)가 31일 오전 9시 30분 ‘한국사회형성과 기독교 사회복지’라는 주제로 제25회 영익기념강좌를 온라인으로 개최했다. 이날 박창훈 교수(서울신대)는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 활동과 그 의의’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

박 교수는 “한국 현대사회의 형성에 영향을 끼친 큰 사건 가운데 하나는 한국전쟁이다. 이 한국전쟁은 한국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킨 구체적인 사건이었으며, 그만큼 전쟁의 충격과 결과는 무시할 수 없었다”며 “이 기간에 한국의 교회들은 자신들의 교단을 비롯한 국제적인 연결망을 통해, 외국으로부터의 전쟁구호물자와 후원을 끌어내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고 했다.

이어 “한국전쟁으로 곤경에 처한 한국인들을 위한 기독교 자원단체의 활동은 긴요하고 절실한 것이었다”며 “절박한 생존의 위기에 직면한 한국사회에 이들의 구호활동은 수많은 사람을 살리고 한국사회가 본격적인 자립과 성장의 길로 갈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고 덧붙였다.

또 “제2차 세계대전 중에 곤경에 처한 유럽을 돕고자 결성된 전쟁구호위원회는 이후 세계구호위원회로 발전하였고, 비유럽권까지 활동영역을 넓힌 미국의 전국복음주의협회의 상설기구였다”며 “세계구호위원회는 곤경에 처한 이들에게 구호의 손길을 내밀면서 그들의 영혼까지 구원할 수 있으리라는 두 가지 목적을 가지고 구호사업을 진행하였다”고 했다.

그러면서 “먼저,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 활동은 구호활동에서 시작하여 점차 사회사업으로 발전하였으며, 처음 구호는 전쟁고아, 미망인과 그 가족, 전재민 등에게 집중되어 그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옷과 양식을 나누는 일이었다”며 “한국전쟁 후에도 세계구호위원회는 모자원, 탁아소, 나환자촌과 병원 등을 지원하였고, 특히 수재로 인한 이재민을 돕는 일에 나섰다”고 했다.

그러나 “엘마 길보른을 통한 구호사업은 한국인들이 단순히 수혜적인 차원에 구호품을 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 일하여 자립할 수 있는 사회사업으로 발전했다”며 “특히 정착사업과 간척사업을 지원하면서, 거주지와 농토를 마련하여 난민들이 스스로 소득을 올려서 자립할 수 있도록 한 부분은 분명히 발전한 부분이다. 그리하여 세계구호위원회가 한국을 떠날 때는 사회사업에서 더 나아가 보다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형태의 사회복지를167) 시도할 수 있는 경험과 자원(특별히 인적자원)을 남겨주었다”고 했다.

이어 “둘째,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 활동은 한국성결교회를 통해 진행되어, 교단이 사회의 약자들에게 관심을 두고 인도주의적 프로그램을 시도하는 계기를 제공했다”며 “세계구호위원회가 한국의 책임자로 세운 엘마 길보른은 동양선교회의 선교사였으며, 동양선교회가 한국성결교회의 회원으로서 구호활동을 진행했기에, 교단에 속한 개교회를 통해 분배가 이루어졌다”고 했다.

특히 “세계구호위원회가 추구하는 ‘회심을 위한 구호활동’은 전도를 통한 외형적인 성장과 함께 교단이 사회사업 그리고 사회복지의 측면에서 한국 사회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다”며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구호활동과 사회사업을 둘러싼 교단내의 갈등이 계속 꼬리를 물었으며, 이로 인해 1960년대 교단분열의 한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그런 면에서 세계구호위원회를 주도하고 있는 전국복음주의협회의 이중목적(회심과 구제)은 현실적으로 쉽게 추구할 수 없는 난제였음을 드러냈고, 복음주의를 표방하는 단체가 사회참여를 모색하는 곳에서는 반복되는 문제임을 보여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셋째,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 활동은 전쟁을 통해 형성된 반공의식을 더 강화하는 기능을 했다”며 “이는 기독교 선진국으로부터 구호품을 받는다는 의식을 갖는 한국인만이 아니라, 세계구호위원회를 후원하는 후원자들에게도 동일하게 작용하였다. 공산주의 세력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한국을 지원해야 한다는 명분은 자연스럽게 태평양양측 보수적인 복음주의자들이 반공의식을 공유하게 했다”고 했다.

이어 “넷째, PL480을 통한 미국정부의 세계구호위원회의 지원은 사회사업을 더 강화한 측면이 있으나, 상대적으로 자발적 활동의 한계를 드러냈다”며 “처음 세계구호위원회의 구호품은 옷과 신발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PL480의 지원을 받아 양식을 나누는 일과 이를 통한 정착사업 및 간척사업으로 발전하였다. 이렇게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아 사업은 확대되었으나, PL480의 지원이 끊기는 때에 한국에서의 활동을 정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물론 한국 활동을 마무리하던 때는 한국사회가 그만큼 자립경제를 이룩하는 시점에 해당하기는 하지만, 세계구호위원회를 위시한 자원단체들의 자발적 활동역량은 그만큼 위축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었다”며 “그런 점에서 PL480에 대한 평가를 이제까지처럼 정치·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사회복지와 민간자원단체의 측면에서 평가하는 것이 요청된다”고 했다.

박 교수는 “마지막으로, 세계구호위원회의 한국 활동은 정기적 지원보다는 부정기적인 지원(성탄절, 부활절, 추수감사절)과 부분적인 지원(구호물자가 나왔을 때)을 통해 이루어졌다”며 “그래서 연구를 수행하면서, 자료 활용에 어려움이 있었다. 다시 말해, 세계구호위원회의 활동으로 나누어진, 특정 기간의 정확한 구호품의 양을 확정하기가 힘들다는 것”이라고 했다.

특히 “한국의 세계구호위원회는 자매기관인 동양선교회와 함께 활동했기에 분할 또는 중복 기록되어 있고, 또 민간단체로서 교회를 통해 지원한 것이기에 철저한 통제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도 없다”며 “여기에 PL480에 의한 지원을 받은 후로는 한국 내에서 이루어진 활동의 통계는 더 복잡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문기사, 선교보고, 자료집 등을 이용할 때는 각 시기에 보고된 통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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