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영 통일부 장관이 북한 인권 기록물 공개와 관련한 외신의 질문에 “기록이 실제인지 일방적인 (탈북자의) 의사를 기록한 것인지 아직 확인·검증 과정이 부족하다”고 말해 논란이 일고 있다. 이 장관은 3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서울외신기자클럽(SFCC) 초청 간담회에서 “지난 3년간 기록 과정들이 내부 자료로는 충분히 보고서를 작성해놓은 상태지만 공개적으로 (기록물을) 발간하는 것에 관해서 더 고려할 부분이 있어 보인다”고 말했다고 언론이 보도했다.

이 장관의 이 말은 북한 인권 문제를 탈북자들의 ‘증언’에만 의존하는 것에 신빙성이 의심된다는 말로 들린다. 현실적으로 탈북자만큼 북한의 인권 상황을 생생하게 증언해 줄 수 있는 확실한 정보가 어디 있다고 장관이 이런 말을 할까. 설령 부분적인 과장이나 인식의 오류가 있다 손 치더라도 유엔 등 국제사회가 “탈북자의 ‘증언’만이 북한 정권의 인권 유린 상황을 알려주는 원천”이라는 분명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누구보다 이들의 ‘증언’을 귀담아 들어야 할 정부가 공개적으로 불신을 드러낸다는 것이 납득이 안 된다.

이 장관은 또 통일부가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기록물을 발간하지 않고 있는데 대해서는 “올해 연말 쯤 되면 어떻게 할 지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북한 인권 상황에 대한 탈북민들의 ‘증언’을 수집해 놓은 상태에서 주무장관이 연말쯤 발간하겠다고 하는 것도 아니고 “연말쯤 가서 어떻게 할지 검토하겠다”니 차라리 공개할 의사가 없다고 해야 솔직한 게 아닌가.

장관의 이런 태도는 통일부가 탈북자들의 ‘증언’을 신뢰하기 어려운 수준의 B급 정보로 이미 분류해 놓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가게 한다. 그러니 확인 검증 없이 당장 보고서를 발간하기 곤란하다는 식으로 당당히 말하는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 나치 전범 재판이 시작되었다. 나치 하에서 유태인을 학살한 수많은 전범자들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전쟁 후 이들은 모습과 신분을 감추고 남미 등으로 도피했지만 끈질긴 추격 끝에 체포돼 전범 법정에 섰다. 이들이 아우슈비츠 등에서 저지른 유태인 집단학살의 참혹한 범죄는 살아남은 몇 안 되는 유태인의 ‘증언’으로 세상에 밝혀졌다.

고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 14일 자신이 일본군 종군 위안부 피해자였음을 세계 최초로 공개했다. 김 할머니의 용기 있는 ‘증언’으로 일본이 과거에 저지른 반인륜적 범죄의 실상이 세상에 낱낱이 드러났다.

이처럼 ‘증언’은 역사적으로 많은 문제와 사건을 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해 왔다. 사람이 직접 경험한 것만큼 확실한 증거가 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 분단 상황에서 북한의 인권 상황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음을 국제사회가 공히 인식하게 된 것도 그 체제를 직접 겪은 탈북민의 ‘증언’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이보다 확실한 확인과 검증이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통일부 장관이 탈북민의 증언을 신빙성이 없는 일방적인 주장쯤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가 심각하다. 한 두 사람이라면 모를까 수백 수 천 명의 탈북민이 국내에 정착해 살고 있는데 그들이 직접 겪은 생생한 ‘증언’조차 더 확인과 검토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것은 주무 장관으로서 무책임과 북한에 대한 편향성을 동시에 드러낸 것이다. 정부가 일본 정부에 요구하고 있는 ‘과거사’ 문제가 대부분 몇몇 생존자들의 ‘증언’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과 비교해도 ‘이중 잣대’라는 비판을 받을 만 하다.

반면에 통일부 장관이 최근 3월로 예정된 한·미 연합훈련의 조정 또는 연기문제를 수차례나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나선 것에 대해서는 이례적이다 못해 부적절하다는 지적이다. 외교가 일각에선 아무리 전대협 초대 의장 경력에 여당 원내대표를 지낸 정치인 출신 장관이라도 한미동맹의 상징인 연합훈련에 대해 국방·외교 장관도 아닌 통일부 장관이 나서는 것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재임 기간 중 반드시 이루고 싶어 하는 것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이다. 문 대통령은 신년 기자회견에서도 이 부분을 특히 강조했다. 그러나 이 구상은 처음부터 매우 중요한 몇 가지를 놓치고 있다. 그중 한 가지가 한반도 평화의 상대방인 북한이 세계 최악의 반인권 국가라는 현실이다.

정부로서는 북한 인권 문제와 같은 예민한 사안이 불거지면 남북이 화해하고 통일로 나아가는데 걸림돌이 될까봐 일부러 예민한 사안은 피해 가려는 의도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국제사회에 보편적 상식에 속한 북한 인권 문제의 진실까지 외면하면서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꿈꾼다는 자체가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이나 다름없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 선 이후 대북 문제는 상식적이고 보편적인 균형마저 완전히 붕괴된 모습이다.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미국 등 국제사회로부터 민주주의의 가치를 훼손했다는 거센 비판에 직면해 있는 ‘대북전단금지법’이다.

미국 등 국제사회가 자칫 ‘내정간섭’의 역풍을 부를 수 있는 문제에 대해 이토록 심각하게 여기는 이유는 자명하다. 즉 한국 정부와 여당이 남북 관계 개선에 목을 맨 나머지 세계 최악인 북한 인권 실태에 눈을 감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목표도 과정 없이 달성될 수는 없다. 더구나 그 과정이 인간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쯤 얼마든지 제약해도 상관없다는 식이라면 필연적으로 민주주의의 퇴행이라는 보다 큰 희생을 치르게 될 수밖에 없다. 설사 ‘남북관계 발전’이라는 문재인 정부 집권기에 최고의 목표 달성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거쳐야 할 통과의례라 하더라도,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인권을 외면하고 얻은 결과물인 이상 그 업적은 ‘치적’이 아닌 ‘치욕’으로 후세에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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